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23:1-7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 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 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 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 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 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응송 | 시 132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서신 | 계 1:4b-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 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 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 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 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복음 | 요 18:33-38a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 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 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 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 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 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 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8:37을 묵상하십시오. 세상나라를 지탱하는 싸움과 달리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② 계 1:5을 묵상하십시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 도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③ 삼하 23:2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의 영이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며, 그의 말씀이 어디에 있다고 다윗은 고백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이자 왕국주일이기도 합니다. 전례적 교회들은 이 왕국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 부르는데, 이 축일이 제정되던 1925년 당시 세계는 전쟁과 혼란 속에 있었고, 교회는 사람들이 세속적 이념과 물질주의에 빠져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만이 온 세상의 참된 왕이심을 선언하고 믿음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왕국주일을 제정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마지막 날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다스리실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왕국주일의 의미는 오늘 우리를 초청하시는 '예배에의 부름'을 통해서도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이것은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왕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찬미하며 드리는 노래입니다(계 5:11). 한 해의 교회력이 저무는 이 시점에 우리 모두 지금껏 걸어온 내 신앙의 여정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한 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온 것일까? 아니면 실상은 내가 나의 왕이 되어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뿐일까? 이런 질문은 늘 흔쾌하지 못합니다. 삶이 고백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현실이 질문 앞에서 알몸처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하지만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사뭇 다른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일상에서의 우리는 주님이 아닌 다른 왕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주님의 통치 방식이 세상 왕의 통치 방식과 그 성격과 지향에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의 왕권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진리로, 공의로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주님을 왕이라 고백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때때로 세상 임금들의 왕권은 정적이나 백성들의 피를 제물로 할 때가 많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1513년에 쓴 군주론에 보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군주는 필요하면 잔인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상대방을 강하게 만드는 자는 스스로를 망치게 될 뿐'이라며, 나의 생사여탈권을 절대 남에게 주지 말고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할 것을 주문합니다. 타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세상의 군주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통치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철저하게 자신의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능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능함과 나약함 속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왕들과 다르게 불의한 폭력의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서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를 심층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 요 18: 33, 34
예수님께서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 이 장면은 요한이 기록한 수난 사화의 중심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요한복음 수난 사화의 핵심 주제는 역설적이게도 예수가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왕으로서 당당하게 체포되고(요 18:1-11), 왕으로서 당당하게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고(요 18:12-27),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이 왕이라고 천명하며(요 18:28-40), 십자가에서 왕으로 등극하고(요 19:17-27), 왕으로 죽음을 맞이하며(요 19:28-37), 왕으로서 장례식이 엄수됩니다(요 19:38-40). 예수님을 부르는 많은 칭호들 중에서 비교적 사람들에게 간과되었던 것 중 하나가 '왕'인데, 공교롭게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와 나눈 대화에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의 정체가 공히 밝혀집니다. 문장의 흐름 안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유대인의 왕 사칭'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첫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다른 증인이 동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예수에게 홀로 조용히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이 질문의 근원이 빌라도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즉 유대인 대제사장의 무리인지를 되묻습니다(요 18:34). 그러자 이때 빌라도의 대답이 시사적입니다.내가 유대인이란 말이냐? 네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너는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 요 18:35 표준 새 번역
이 대답이 시사적이라는 이유는, 이 대답 속에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때 빌라도는 유대를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로마에 속한 식민지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금 그를 예민하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왕권이 로마에 대해 반역적 성격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이 재판에서 안전하려면, 로마에 위협적인 발언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 앞에서 피해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 나라(My kingdom)'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시면서, 당신이 정말 왕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요 18:36
의외의 대답에 놀란 빌라도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냐?"(요 18:37a 표준 새 번역). 그러자 예수님은 더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요 18:37b).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하스몬 왕조에서 대제사장들에게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 때에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의미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요 1:49). 따라서 예수님이 그런 의미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셨다면 정말 로마 황제의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흐름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이해도 아니고 예수님시대 로마인들의 이해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a).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b). 이 말씀은 당신의 나라가 로마와 경쟁하는 나라가 아닌, 전혀 다른 성격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관심인 '이 세상'보다 더 궁극적인 차원에 있었습니다.예수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 세상' 혹은 '여기'입니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힘이 곧 정의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헤롯이나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했고, 그 힘에 압도된 약소국들이 반란조차 꿈꿀 수 없게 된 상황을 가리켜 평화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소수의 평화였습니다. 로마는 점령지마다 로마의 문화를 이식시켰습니다. 로마는 제국과 여러 도시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도로(via Egnatia)와 항구를 만들고, 그 길이 연결된 도시의 입구마다 제국의 위용과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도 지중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이란 이렇게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빌라도에게 그의 나라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것은 진리와 공의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꽃피워 냅니다. 어쩌면 그것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 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힘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왕이 아니라,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진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왕은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는 사랑의 왕입니다(눅 5:29). 그 왕은 삶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맨발로 달려 나가는 아버지 같은 왕입니다(눅 15:20). 그 왕은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고,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당하는 왕입니다. 이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마음에 드십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도에 넘친 인자함을 보임으로써 끝없는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약탈과 파괴를 야기하는 군주보다는 가끔 가혹한 행위를 하는 군주가 훨씬 더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비로운 군주'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변덕스럽기 때문에, 사랑만으로 통치하면 위기에 처했을 때 충성을 잃을 위험이 있지만 두려움은 강력한 억제력을 가지며, 특히 군주가 잔인함을 신중하고 적절히 사용하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은 확실히 세상과 다른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호승이 쓴 '서울의 예수'에 보면 한강변에서 낚시를 하거나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우는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 요 18:37
우리는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빌라도가 집요하게 권력에 대해 묻는데,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왕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그 나라 백성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반응을 보십시오.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 요 18:38
그의 이 말은 "진리에 대한 질문으로 나를 괴롭히지 마라.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권력의 언어만 알고 있을 뿐이며, 진리는 권력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철학적 회의론적 언어를 빌어 "진리가 무엇이냐"고 냉소적으로 반응한 후에 밖으로 나가버리고 맙니다. 만약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요?" 하고 물은 후에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더라면 이후로 그의 삶은 퍽 달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 32).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계 1:5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로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을 요한은 그 다음 절에서 말씀합니다.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계 1:6
요한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이들을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바티칸 제 2차 공의회 문헌에서는 바로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이루어 주신 사랑이 모든 사회 구조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감당하시던 사랑의 사역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이 사역을 감당함으로서 그 나라가 무르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일에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 삼하 23:1b-5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내 혀에 담겨 있어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 되심을 고백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 생의 한 순간을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제사장적 삶'의 소명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그 거룩한 소명에 부응함으로 다가오는 신앙의 새해가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내가 나의 왕이 되어 내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왕이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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