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룻 3:1-5, 4:13-17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 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 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 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응송 | 시 12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서신 | 히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 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 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 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복음 | 막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 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 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 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 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2:43을 묵상하십시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 보다 많이 넣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② 룻 3:1, 5을 묵상하십시오. 나오미와 룻의 마음은 각각 누구에게 머 물러 있습니까?
③ 히 9:26, 2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다 보면 죄 많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장년이 되었음에도 나이 들수록 천박하고 어리석게 변해가는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하는 고백들을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고백들 가운데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자신의 행위나 말 중에 악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수록 선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손길을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오른손을 뻗치셔서 배설물보다 더 추한 자신의 마음의 찌꺼기를 다 퍼내어주셨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 하도록 만들어 주셨다며 주님께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당신은 내 속에 있던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비워내시고 그 자리에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혈과 육은 아닐지라도 어떤 쾌락보다 흠모할 만하며, 어떤 빛보다 밝고, 어떤 은밀한 관계보다 더 은밀하며, 어떤 존귀보다 더 높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자기 영광을 구하며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자들에게는 비밀로 남아 계십니다.
그의 이 고백 속에는 자기 영광을 구하며 스스로 높은 체 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주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비워낸 후련함이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어거스틴의 이 후회와 후련함은 어쩌면 현재 우리 안에도 혼재되어 있어서 번갈아 오버랩 되는 현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른 손을 뻗치셔서 배설물보다 추한 내 마음의 찌꺼기들을 다 퍼내어주셨음을 느낄 때는 우리도 주님을 어떤 쾌락보다 흠모할 분으로 또 어떤 빛보다도 밝은 분으로 체험하겠지만, 거짓 자아에 겨워 내 영광을 구하며 높은 곳을 탐할 때는 비밀스럽고 모호하게 체감되는 주님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두 종류의 사람을 모델로 그 각각의 마음의 상태를 풍자(諷刺)해 보여주십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서기관들입니다. 율법 학자인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전통 깊은 엘리트 계급입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던 당시에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녀는 헌금을 드릴 때도 가진 것이 적어서 아주 적은 헌금만 헌금함에 넣을 뿐입니다. 주님은 먼저 서기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 막 12:38-39
여기서 마가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라는 표현을 통해 이 말씀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35절 상황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이 누구인지는 언급해주지 않아서 알 수가 없는데, 같은 상황을 다루고 있는 마 22:4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시작된 말씀이, 이어지는 마 23:1에서 "무리와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눅 20:45) 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본문의 상황은 성전에 먼저 와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들이 물러간 후에 백성과 제자들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당시 서기관들을 경고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여기 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우선 그들은 호화로운 옷을 입음으로서 자기를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의 옷은 세마포로 만들어진 통옷과 땅에까지 닿는 백색의 긴 두루마리 형태였습니다. 이 옷들은 의전적,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주로 착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의를 입도록 명령하신 목적은 그런 자기 과시가 아니었습니다.레 16:4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론을 성소로 들어올 것을 명하시면서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제사장일지라도 원죄를 지닌 죄인이었기에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룩한 옷'을 입어서 몸을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그 본래적 의미를 망각하고, 자기들의 명예를 과시하는 도구로 성의의 의미를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외견상의 위엄과 자기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이마나 팔에 성구를 넣는 갑을 매달고 다니거나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마태는 이들의 행위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마 23:2)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했다"(마 23:5-7)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빙자해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며,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호화로운 옷을 걸치고 있다 해도 본질상 그 옷 안에 가려져 있는 것은 시시각각 시들어가는 초라한 몸뚱이이며, 끝내는 죽을 몸뚱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자기 실존을 깊이 인식하고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사람이 자기 정체를 똑바로 깨달을 때, 주어진 현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경거망동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장터를 다니며 인사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장터 같은 곳에서 서기관을 만나면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며, 존경의 표현으로서 '랍비'라는 호칭을 불러주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의 눈길을 한 눈에 끌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인 시장터에 즐겨 다녔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머리는 숙이지만 부딪히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했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에는 명망 있는 사람이나 공적인 인물을 위해 토라를 넣어두는 상자 바로 앞, 혹은 회중 전체가 바라보기에 좋은 곳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누가 권하기도 전에 의례히 자기들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잔칫집의 상석은 출입구에서 가장 안쪽이었고, 그날 잔치 주인공의 오른쪽 자리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지나 세력가들은 잔치를 베풀 때, 노령자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서기관들에게 이 자리를 제공했습니다. 노인과 부모 앞에서 그 상석에 앉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는 필경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상석이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를 즐겼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내심 불편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을 삼가라 | 막 12:39
여기서 '삼가라'시는 말씀을 원문에서 보면 '블레페테 βλέπετε' 즉 '보라'라는 뜻입니다. 서기관들의 외식을 '보고' 그들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그들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하시는 보다 심각한 사유가 등장합니다.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막 12:40
지금 예수님께서 서기관이라는 특정 계급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 주 복음서에서 보았듯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 라고 물었던 서기관에게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 12:28) 라고 칭찬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시는 이유는 고대 유대사회에서 법적 보호 대상이었던 과부와 고아를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는 모세의 율법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리를 떠나 여인의 뜰로 나가십니다. 그곳은 엄격하게 구별된 장소였고, 여인은 거기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한 여인을 보셨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마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 막 12:41-44
거기 여인의 뜰을 구분하는 벽을 따라 놋쇠로 된 나팔처럼 생긴 헌금함 열세 개가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 열 세 개의 헌금함 가운데 아홉 개는 헌금이나 성전세를 담게 되어 있었고, 나머지 네 개는 빈민 구제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찬찬히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니까 이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화폐의 가치에서 '렙돈'은 '레프톤 λεπτόν' 즉 '작은 것'이란 뜻입니다. 두 렙돈이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드란트' 즉 '코드란테스 κοδ-ράντης'는 라틴어 콰드란스(quar-drans)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두 렙돈에 해당되는 로마의 동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부자의 헌금에 비해 비교도 안될 만큼 과부가 적은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 막 12:43-44
이 말씀이 이해가 가십니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41절과 42절에서 부자를 '여러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과부를 말씀하실 때는 '한 가난한 과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명의 과부를 기준으로 보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 모두가 '여러 부자'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한 과부'가 드린 헌금이 '여러 부자'가 드린 헌금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당시 대개의 사람들이 가짜 자기에 취해 허례(虛禮)의 예복을 입고 자기를 과시하며, 허식(虛飾)을 좋아해 장터에서 인사나 받으려 하고, 허영(虛榮)이 강하여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탐하고, 허욕(虛慾)이 과하여 과부들의 가산마저 삼키려 할 때, 여인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기댈 남편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처신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군림하기 위해 처신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은 자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기의 경지를 넘어섭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관대하신 분이기에, 자기도 하나님께 관대하게 처신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것을 희생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명을 잊고 자신에게 집착하면, 사람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이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삼가라신 이유는 그가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성전 안에서 그녀는 가장 가난했지만 모든 사람 중 유일하게 자기를 넘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이 과부와 같은 자유인들이 나옵니다.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 룻 3:1-5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의 행복을 위해(룻 3:1)' 그녀를 기꺼이 보아스에게 보내줍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대로 순종해(룻 3:5)' 보아스에게로 가 자기의 미래를 맡깁니다. 보아스는 기꺼이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그녀 안에 메시아 탄생의 길을 열어줍니다(룻 3:6-13). 그 중 한 사람도 자기를 지키려고 자기 입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인 구속사를 이어가셨습니다(룻 4:13, 17). 자기를 몽땅 희생한 자기희생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십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히 9:27-28
예수님은 살아 계실 적에 자비와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기득권자들에게 죄인으로 몰려 끝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희생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애써 예복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것으로 자기를 위장하고 과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화로운 예복으로 감춘다 해도 인간은 그 본질에 있어서 벌거벗은 존재입니다. 차라리 화려한 옷 안에 감추어진 허례와 허식과 허영과 허욕을 포기하고, 과부처럼 룻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간절하게 당부했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초기 교부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삶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대립시키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영성(靈性)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서기관과 과부의 모습 안에서 어떠한 삶이 영성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과시 이면으로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비밀처럼 흐릿해져버린 서기관과 같은 삶 아닌, 겉모습은 초라할지 몰라도 주님을 어떤 쾌락보다 흠모할 분으로, 또 어떤 빛보다 밝은 분으로 체험한 과부처럼 영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자아(自我)를 넘어서지 못해 주님이 비밀로만 느껴지지 않는가?
② 자아를 넘어 주님만이 나의 전부로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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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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