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3주 나를 깨어있게 하는 좋은 자존심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수 24:14-15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응송 | 시 139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서신 | 살전 4:13-14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복음 |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묵 상 | meditatio
1. 마 25:13을 묵상하십시오. 성도가 '일상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수 24:14을 묵상하십시오. '깨어있는 자'를 여호수아의 표현대로 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3. 살전 4:14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신자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예비 된 것은 무엇입니까?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나를 깨어있게 하는 '좋은' 자존심
김태정이라는 여류시인이 있습니다. 1963년생인데, 2011년 전남 해남에 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사인 시인은 '김태정'이라는 시에서 그녀를 '순한 서울여자, 서울 가난뱅이'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겁 많은 귀뚜라 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핸드폰 도인터넷도없이,시를써장에내는일도부질없어 조금만먹고거북이 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라며 그녀가 살던 집 헐은 장독간과 경첩 망 가진 부엌문에게 조문을 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 는 저녁'의 첫 번째 시 제목이 '호마이카상'입니다.이제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 거뜬히 일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모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그런데 그녀의 시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호마이카상 앞에서 도무지 감춰 지지 않는 자신에 대한 불편함이 곳곳에 묻어납니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마 25:1
사실 '깨어있음'이라는 주제는 여기에서 갑자기 부각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 있는 두 개의 비유 즉 '깨어있는 집주인의 비유'(24:43, 44)와 '깨 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24:45-51)에서 그 중요성이 서서히 강조되 어 오던 것이, 오늘 복음서인 '열 처녀의 비유'에 이르러 마침내 절정을 이 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 부의 친구들입니다. 이제 그녀들은 신랑이 도착하게 되면, 신부와 함께 신랑 을 영접해서 등불을 켜고 신랑의 집으로 떠나는 연등행렬을 벌이게 됩니다. 문제는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열 명의 처녀 는 신부와 함께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의 행차가 지연되자 그만 졸음을 못 이기고 하나씩 잠에 떨어졌습니다.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 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 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 마 25:2-5
사건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부와 친구들이 모두 깊이 잠들 무렵 한밤중에 그만 신랑이 오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상황을 매우 극적으로 전해줍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두었던 슬기 있는 처녀들은 신 랑을 맞이해서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 한 처녀들은 뒤늦게 허둥대며 기름을 구해왔지만 이미 잔치 집의 문이 닫힌 후였다는 것입니다.(마 25:10) 사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방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이후의 상황을 애처롭게 들려줍니다.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 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 니라 | 마 25:11, 12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신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실 아직도 제자들 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흰 옷 입은 두 사람 이 한 말입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0, 11) 이 말 씀은 제자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기다림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제자 들은 이 말씀을 믿고 하루같이 예수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예 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내심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 어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열 처녀 비유는 매우 의미 있는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로서 자신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 가 무엇인지를 이 비유가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비유를 찬 찬히 살펴보면 졸다가 잠이 들어버린 것은 비단 미련한 다섯 처녀만이 아니 었습니다. 마태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증언합니다.(마 25:5) 마태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도 똑같이 깨어 기다리지 못했음을 지적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마태의 이 기록을 놓고 '문학적인 세련미의 부조 화'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부족이나 부조화의 문제 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의 집필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예수님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다림의 신앙'은 점차 '애타는 기다림'에서 '느슨한 형태의 기다림'으로 전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공동체가 믿 었던 것처럼 즉시 오신다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라고 그들은 판단을 굳혀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처녀들 모두가 잠들 어 있었다'는 마태의 기록은 '슬기 있는 처녀들'이든 '미련한 처녀들'이든 '그 들이 다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금방 당 도할 것 같지는 않은 신랑을 그녀들이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기다리는 장면 을 표현하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의 열화와 같던 기 다림의 열망이 점차 누그러진 후, 당시의 교회들이 보여주고 있던 다소 느 슨해진 모습을 마태는 잠든 처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 서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의 어떤 상황과 사람들을 이야 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이천 년 동안 교회들이 처해 있는 모든 영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처녀들 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서 감지되는 모습들입니다. 신랑이 언젠가 올 것 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평온히 잠들어 있습니다. 애타는 기다림이 아니라 느슨한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어떤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가 아닌,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일 상을 살아가고 있고, 똑같이 잠들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 에 결정적인 차이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기름의 차이'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지만 그러나 일상에서 늘 기름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으면서 기름이 없 다는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 엇입니까?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은 사실은 그 즉석에서 형성된 믿음이 아니라 일상에서 준비되어 온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야기는 우리에게 극단적으로 종말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꾸어 가는 '그리스도인다움'이 마지막 때에 이 르러 그 진가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온한 일상에서 준비된 기름이 란 뭘까요?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의 영성생활이겠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때, 나의 내면이 어떻게 가꾸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직장과 가정과 교회를 오가는 내 소소한 일상 안에서 우리 내면이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윌든 호수가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 이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그것에 다가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십시오. 마치 개가 주인을 따르듯,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뼈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아내십 시오. 그것을 파고들고, 묻어두었다가 다시 파내고, 또다시 파고드십시오. 너무 도덕적이 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신 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23쪽) "평범한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육신을 부양 하기 위해 일 년 내내 삽으로 땅을 파는 일에 열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 범한 사람은 1년의 하루하루를 온전히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자신의 영혼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앞서 있는 실질적인 사람입니다."(p.79) 이러한 삶은 외형적으로 드러나기보단 훨 씬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선 앞에서만 드러나는 나의 감추어진 내면 즉 '나의 중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 중심 을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이때 우리 내면의 허울이 다 드러납니다. 한 인간의 슬기로움도 그 내면으로 평가되고 한 인간의 미련함도 그 내면으로 평가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 는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을 다듬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영원을 준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마지막 결론을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마 25:13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깊고 진지하게 묵상하는 구도자 로써 성령의 임재와 현존하심 속에서 일상을 살며 신랑이신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날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님은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로 여겨서 내일 떠나갈 사람 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때는 서두름 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여호수아는 여호 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 안에 정착해 살기까지 그들을 어떻게 돌보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불러서 그곳에서 그들과 언 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이스라 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 수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 수 24:14a
인류는 두 역사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와 죽 음의 역사와, 예수로부터 시작된 구속과 생명의 역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스라엘도 두 역사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강 저편' 즉 유프라테스 건너편에서 우상을 섬기던 역사와, 하나님께서 아 브라함을 그곳으로부터 불러내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신 믿음의 역 사입니다. 두 역사를 뿌리로 하고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두 역사 중 어 느 한 쪽의 역사를 계승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 저편의 역사 즉 우상숭배의 역사를 계승해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반대 로 우상숭배를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된 가나안에서의 아브라함의 역사를 계 승해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도 있었습니다. 이 두 선택의 사이에서 여호수아는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 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수 24:15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와 죽음 의 역사와 예수로부터 시작된 구속과 생명의 역사, 우리 역시 이 두 역사 중에서 어느 한 쪽의 역사를 계승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 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 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살전 4:13, 14
이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성도들은 소망 없는 다른 이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 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살지 말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담의 역사를 따라 본능대로 살지 말고, 예수의 역사를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오래 된 호마이카상 하나 앞에 놓고도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 서워졌다.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라며 시인은 그렇 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기 우유부단함을 불편해 하는데, 심지어 우 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내 중심을 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전혀 불편함 을 못 느끼는 것 아닙니까? 시인과 같은 맑은 영적 감수성, 시인과 같은 깨어있는 감수성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 세상 사 이에서 우유부단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불편해하고 무서워하면서, 죽도 밥 도 아닌 세월이 아니라 '깨어있음으로' 내면과 삶이 아름다운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내면의 우유부단함을 외형적인 종교생활로 감추고 있지 않은가?
2. 내면의 초라함을 불편해하고 무서워하며 변화를 위해 힘쓰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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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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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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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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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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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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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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