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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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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4-10-26 17:59
조회
168
성령강림 후 제23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42:1-6, 10-17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 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 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 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8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 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 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 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 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 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산티아고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라'에서 저자인 '조이스 럽'은 부르고 라네로의 대피소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소개해줍니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되는 여정'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보면 그 말이 딱 맞는 것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예수님은 공생애 이후 줄곧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랑을 하셨습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시작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대략 150킬로미터의 거리가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기보다는 '길'(요 14:6)로서의 당신의 소명(召命)을 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것을 존 오도나휴는 '마음에 지도를 갖지 않고 위대한 순례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길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서를 보면 지금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 길은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인데, 예수님은 이 길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는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길을 걸으면서도 그러나 정작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걷고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욕망이라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제자들은 길이신 예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자신들의 내적 무지와 생각의 어두움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 무지함과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그는 길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의 처음 모습은 막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그 분의 오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막연함과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시각은 가장 고귀한 감각이었습니다. 플라톤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열광했으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론'을 의미하는 '떼오리(theory)'라는 단어가 '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떼오로(theoro)'에서 유래한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 즉 '생각, 관념'도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이데인(idei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보는 것'이 우선하고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도 각각 다르거니와 거기에 욕망까지 더해지면 사람이란 이내 견해와 시각 속에 갇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눈의 표면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을 갖추기를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과정을 보면 바로 그런 시선의 진보가 보입니다. 그는 육(肉)의 눈을 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는 영(靈)의 눈을 함께 떴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상을 즐기려 달려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보존하기도 어렵습니다. 빛은 주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내면이 어두우면 이 빛을 볼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눈을 뜨고 있다 해도 우리는 어두움에 지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의 눈을 뜨기 이전에 먼저 '내면의 눈', '영의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 두 가지 명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주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둘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속해있으며, 동시에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 외의 그 어느 것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내 안에 모신 밝음으로 자연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개혁' 즉 '시선의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사람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했던 그의 현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에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의 삶이 어느 날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예기치 않은 때, 예기치 않은 불행이 그를 덮쳤습니다. 처음 사탄이 그의 소유물을 쳤을 때,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리고도(욥 1:13-22)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사탄이 두 번째 그를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고(욥 2:7).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퍼부었을 때도 그는 그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토론을 벌이면서부터 욥은 조금씩 마음과 입의 평정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가 하면(욥 3:1), 젖을 빨고 살아남은 어린 날마저 후회했습니다(욥 3:11, 12). 훗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마 26:24)고 하셨던 말씀을 그만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내뱉고 만 것입니다. 그는 어느 지점부터 서서히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보는 시선도 어두워집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선하심 또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어두움 속에서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욥 23:2) 라며, '계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욥 23:8)을 향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라시며 폭풍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지한 말로서 '에차(הצע)' 즉 (나의) '계획/뜻'을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는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세계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다양한 차원의 '계획'을 어둡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셨고, 창조세계와 관련한 70여개 항이 넘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성찰하면서 욥은 점차 자기존재가 하나님의 정교하신 '에차' 안에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갑니다. 그리고 그 '에차'와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으면서, 그가 비탄에 잠겨 있는 이 순간을 함께 견디고 계심을 욥이 비로소 알아갑니다. 마침내 욥이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길었던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본 것, 지금까지 말한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됩니다. 즉 그에게서 '시선의 회개'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42:1-6, 10-17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 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 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 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8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 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 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 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 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 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누구니이까
'산티아고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라'에서 저자인 '조이스 럽'은 부르고 라네로의 대피소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소개해줍니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뜻입니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되는 여정'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보면 그 말이 딱 맞는 것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예수님은 공생애 이후 줄곧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랑을 하셨습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시작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대략 150킬로미터의 거리가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셨다기보다는 '길'(요 14:6)로서의 당신의 소명(召命)을 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것을 존 오도나휴는 '마음에 지도를 갖지 않고 위대한 순례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길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서를 보면 지금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 길은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인데, 예수님은 이 길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는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길을 걸으면서도 그러나 정작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걷고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욕망이라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제자들은 길이신 예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자신들의 내적 무지와 생각의 어두움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 무지함과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그는 길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의 처음 모습은 막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그 분의 오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막연함과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막 10:47
잠잠하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막 10:48). 병자가 이토록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다윗의 자손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님께 부르짖은 것에는 그만한 전승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솔로몬 전승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는 메시아가 지혜와 가르치는 권위 뿐 아니라 귀신들에 대한 지배권도 갖추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솔로몬의 유훈서 20장 1절에는 한 남자가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솔로몬 왕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한 여인이 하닷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바디매오는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출신지를 따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에 비해(막 10:47),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구약성경의 예언을 따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호칭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런 예수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정확한 태도를 맹인인 그가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막 10:49).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막 10:50). 그리고 그와 예수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이어집니다.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막 10:51, 52
그리고 주님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a) 그리고 마가는 이후의 상황을 담담하게 소개합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b) 이 사건은 맹인에게 세 가지의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가로 눈을 뜨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따름으로 인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섭니다. 본회퍼 목사에 따르면 신앙이란, 나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눈을 뜨는 과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자기의 영적 실존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원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바디매오의 내면이 믿음에 의해 밝아졌을 때, 그 내적 밝음으로 인해 외적 밝음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는 것'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표준 새 번역). 눈의 표면적 한계를 비판한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그 시선(視線)은 내면이 밝아야만 비로소 뜨이는 시선입니다. 사람은 대개 '보는 것'을 통해 인식합니다. 따라서 인식의 전제조건인 '보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도 문명도 불가능할 것입니다.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시각은 가장 고귀한 감각이었습니다. 플라톤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열광했으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론'을 의미하는 '떼오리(theory)'라는 단어가 '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떼오로(theoro)'에서 유래한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 즉 '생각, 관념'도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이데인(idei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보는 것'이 우선하고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도 각각 다르거니와 거기에 욕망까지 더해지면 사람이란 이내 견해와 시각 속에 갇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눈의 표면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을 갖추기를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과정을 보면 바로 그런 시선의 진보가 보입니다. 그는 육(肉)의 눈을 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는 영(靈)의 눈을 함께 떴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상을 즐기려 달려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보존하기도 어렵습니다. 빛은 주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내면이 어두우면 이 빛을 볼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눈을 뜨고 있다 해도 우리는 어두움에 지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의 눈을 뜨기 이전에 먼저 '내면의 눈', '영의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 두 가지 명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주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둘째,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속해있으며, 동시에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 외의 그 어느 것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내 안에 모신 밝음으로 자연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개혁' 즉 '시선의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사람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했던 그의 현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에 방해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의 삶이 어느 날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예기치 않은 때, 예기치 않은 불행이 그를 덮쳤습니다. 처음 사탄이 그의 소유물을 쳤을 때,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리고도(욥 1:13-22)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사탄이 두 번째 그를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고(욥 2:7).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퍼부었을 때도 그는 그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토론을 벌이면서부터 욥은 조금씩 마음과 입의 평정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가 하면(욥 3:1), 젖을 빨고 살아남은 어린 날마저 후회했습니다(욥 3:11, 12). 훗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마 26:24)고 하셨던 말씀을 그만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내뱉고 만 것입니다. 그는 어느 지점부터 서서히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보는 시선도 어두워집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선하심 또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어두움 속에서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욥 23:2) 라며, '계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욥 23:8)을 향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라시며 폭풍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지한 말로서 '에차(הצע)' 즉 (나의) '계획/뜻'을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는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세계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다양한 차원의 '계획'을 어둡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셨고, 창조세계와 관련한 70여개 항이 넘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성찰하면서 욥은 점차 자기존재가 하나님의 정교하신 '에차' 안에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갑니다. 그리고 그 '에차'와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으면서, 그가 비탄에 잠겨 있는 이 순간을 함께 견디고 계심을 욥이 비로소 알아갑니다. 마침내 욥이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길었던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본 것, 지금까지 말한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됩니다. 즉 그에게서 '시선의 회개'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욥 42:3a
사실 이건 질문이 아닙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신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자기고백 즉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지금껏 자신에 취해 살아온 욥입니다. 그는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흠이 없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누리는 풍성한 재산들과 종들과 자녀들은 그 흠 없는 정직과 신앙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해 내심 이해도 동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의외로 어둡고 무지한 자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무지했고, 하나님의 정교한 '에차' 즉 '계획/뜻'을 모르는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욥 42:3b
자기는 확신 속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속에서 자기가 했던 그 많은 말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한 상태에서 한 말들임을 비로소 압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욥 42:5, 6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욥이, 새로운 무엇에 눈을 떴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그에게 막연한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에게 더 이상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있다'고 말합니다. 표면의 어둠에 갇혀 있던 시선이 마침내 내면의 눈으로 빛을 보는 시선으로 바뀐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진정으로 보는 자가 되었듯이, 그 역시 진정으로 보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성공회의 젊은 신부였던 존 웨슬리가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소에서 비로소 이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지만,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하나님을 사랑한 그 시선으로 형제들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보고 믿는 사람만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자기개혁입니다.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히 7:23-25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 세상에는 이 주님을 귀로 들은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눈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며,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삶의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욥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자기와 논쟁을 벌이며 마음을 괴롭게 했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욥 42:10).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웃들과 오랜만에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욥 42:11). 지금 주님을 참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렇게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에도 너그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디매오처럼, 욥처럼 듣기만 했던 신앙에서 이제부터는 '참된 시선으로 보는' 신앙이 되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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