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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1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7-10-31 19:19
조회
2133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35:1-7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 묵 상 | meditatio
1.창 35: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무엇을 하라고 명하십니까?
2.창 35:2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한 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창 35:3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 나님이며, 야곱은 그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후줄 근한 옷차림의 중년남자가 밑으로 물이 흐르는 철교의 선로 위에 올라가서 벌겋게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마주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절규하듯 외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리고 잠시의 암전 후 기차 는 앞으로 달리지 않고 뒤로 달리면서 그 남자의 과거 속으로 돌아갑니다. 워낙 유명한 장면입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그는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것일까요? 얼마 전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까지 당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던 돈마저 주식으로 날렸습니다. 영화는 더 먼 과거로 돌아가면서 그의 인격과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단서를 추적해 들어갑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는 한 때 형사였는데, 그의 내면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리고 기차는 더 과거에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들은 왜 그가 그 렇게 분노로 가득 찬 인간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자기 생을 후회하 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는 1980년 5 월 군복무 중이던 어느 날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광주로 투입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한 여고생을 죽이게 됩니다. 그 뜻하지 않은 사고는 그의 영혼의 상처가 되어 평생 자기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남 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피폐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또 한 차례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그야말로 풋풋하고 순수한 청년 자체였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만난 첫 사랑 순임이 건네준 박하사탕을 받아먹으며 세상에 서 최고로 맛있다고 수줍게 웃는 오염되지 않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지점은, 자기 안의 순수가 오염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던 '박하사탕'으로 상징되는 바로 그 시절이었던 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 다시 돌아갈래!"라며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관객들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순수를 상실한 채 세상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 다. 또 하나의 다른 종교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순수했던 그 때로 돌아가 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개혁자들의 외침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슈브 (Sub)'는 '돌아간다'는 뜻인데, 이 '돌아감'은 구약성경의 대표적 키워드입니 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 임없이 '슈브'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습 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에 뿌리를 둔 단어인데, 뜻을 살려서 풀이하면 '다시 돌아가 묶는다' 혹은 '다시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느슨하게 풀린 끈을 다시 조여 묶는 것' 그것이 '종교(宗敎)'라는 단어의 본뜻인 겁니다. '느슨해 진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께 다시 단단히 묶는 것' 그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돌아감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 그 또한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 다.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실 그는 '세겜'이 아닌 '벧엘'에 마음을 두고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하나님과 그렇게 약 속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이 집 을 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러 가는 도중 날이 저물어 노숙할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면 다시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겠노라고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하나님의 집 '벧엘'이 아닌, 이방 도시 '세겜'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 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창 34: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실 천 | Praxio
1.첫 신앙의 순수함을 잃은 채 자기 우상에 빠져 있지 않은가?
2.다시 벧엘로 돌아가 말씀과 예배와 순종을 회복하고 있는가?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35:1-7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 묵 상 | meditatio
1.창 35: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무엇을 하라고 명하십니까?
2.창 35:2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한 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창 35:3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 나님이며, 야곱은 그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종교개혁 500주년이 가을과 함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우 리교회 표어가 담긴 현수막을 볼 때마다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조급함을 느 낍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선교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교 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묵은 땅'이 되어버리고, 온갖 잡풀이 자라는 현실 을 안타까워하면서 "종교개혁의 원음(原音)을 찾아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는 표어를 기치로 걸고 한 해를 시작했고, 그렇게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묵은 땅을 기경해 좋은 땅으로 만들려는, '내면의 개혁' 이자 '믿음의 개혁'을 향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마저 깊어, 계절의 겨울이 다가오는데, 우리들 마음을 들여다보 면 여전히 속사람이 기경되지 못한 채 단단한 땅 그대로이고 잡풀마저 어지 럽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후줄 근한 옷차림의 중년남자가 밑으로 물이 흐르는 철교의 선로 위에 올라가서 벌겋게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마주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절규하듯 외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리고 잠시의 암전 후 기차 는 앞으로 달리지 않고 뒤로 달리면서 그 남자의 과거 속으로 돌아갑니다. 워낙 유명한 장면입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그는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것일까요? 얼마 전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까지 당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던 돈마저 주식으로 날렸습니다. 영화는 더 먼 과거로 돌아가면서 그의 인격과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단서를 추적해 들어갑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는 한 때 형사였는데, 그의 내면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리고 기차는 더 과거에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들은 왜 그가 그 렇게 분노로 가득 찬 인간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자기 생을 후회하 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는 1980년 5 월 군복무 중이던 어느 날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광주로 투입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한 여고생을 죽이게 됩니다. 그 뜻하지 않은 사고는 그의 영혼의 상처가 되어 평생 자기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남 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피폐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또 한 차례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그야말로 풋풋하고 순수한 청년 자체였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만난 첫 사랑 순임이 건네준 박하사탕을 받아먹으며 세상에 서 최고로 맛있다고 수줍게 웃는 오염되지 않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지점은, 자기 안의 순수가 오염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던 '박하사탕'으로 상징되는 바로 그 시절이었던 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 다시 돌아갈래!"라며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관객들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순수를 상실한 채 세상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 다. 또 하나의 다른 종교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순수했던 그 때로 돌아가 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개혁자들의 외침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슈브 (Sub)'는 '돌아간다'는 뜻인데, 이 '돌아감'은 구약성경의 대표적 키워드입니 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 임없이 '슈브'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습 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에 뿌리를 둔 단어인데, 뜻을 살려서 풀이하면 '다시 돌아가 묶는다' 혹은 '다시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느슨하게 풀린 끈을 다시 조여 묶는 것' 그것이 '종교(宗敎)'라는 단어의 본뜻인 겁니다. '느슨해 진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께 다시 단단히 묶는 것' 그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돌아감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 그 또한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 다.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실 그는 '세겜'이 아닌 '벧엘'에 마음을 두고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하나님과 그렇게 약 속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이 집 을 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러 가는 도중 날이 저물어 노숙할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면 다시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겠노라고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하나님의 집 '벧엘'이 아닌, 이방 도시 '세겜'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 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창 34: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구경나갔더라 | 창 34:1
구경거리가 많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등진 이방인 도시 세 겜은 세속적으로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구경 나갔다는 것은 세겜이 유희와 쾌락이 넘치는 도시였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 모라가 그러했듯이 세겜 또한 세속적인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래 서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는 중에 그만 이곳에 멈추어 안주한 것입니다. 그 에게 있어 쾌락은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어디 있 을까요? 사실 우리 해운대가 그런 곳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 깨어있어 야만 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세겜에 머무는 동안 그의 영성은 점점 흐트 러졌고, 하나님과 맺은 약속 역시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허약한 신앙으로 전락되어심지어그의가정혹은주변 사람 중에는 '이방신상'을 섬기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 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 어 입으라 | 창 35:2
그러니까 세겜 사건의 원인은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은 것 외에도 야곱의 가족이 하나님과 이방신을 겸하여 섬긴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 일가의 우상숭배는 두 경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받단아람을 통한 경로입니다. 라헬이 훔쳐서 가지고 온 드라빔(창 31:19, 34)이 그것입 니다. 야곱의 아내들과 종들은 밧단아람에 체류할 때, 그곳의 토종 신들을 섬긴 것 같습니다. 둘째는,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우상 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우상숭배는 이방신상이나 귀고리(4절) 등등을 섬기는 것인데, 당시 고대근동 지방에 퍼져 있던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결한 신앙의 전통을 지닌 야곱 일가에 이런 미신숭배가 생 겨난 것은 인간의 부패한 본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런데 야곱은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영적 태만 속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환난이 들이닥칩니다. 어느 날 하 나 밖에 없는 외동딸 디나가 그 지방 군주인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에 게 겁탈을 당합니다.(창 34:2)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 니다. 화가 난 저들은 아버지 야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마을을 급습 하여 처절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그러나 외지인인 야곱 일가가 어찌 토박이 들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야곱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온 겁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와 말씀하십니다.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 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 창 35:1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야곱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라 고..." 그런 면에서 야곱에게 닥쳐온 환난은 어쩌면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합 니다. 만약 야곱에게 그런 환난이 닥쳐오지 않았다면 그는 끝내 벧엘로 돌 아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자녀가 당신을 잊고 살 때,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게 은혜 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로 하여금 신앙을 회복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딸이 겁탈을 당하는 건 뼈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그 영 이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위기에 처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를 명 령하십니다. "일어나라!", "올라가라!", "제단을 쌓으라!" 이 일련의 동사들은 지금 야곱의 영적 상태와 신앙의 자리를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왜 "일어 나라"고 하십니까? 그가 지금 나태함 가운데 주저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올라가라"고 하십니까? 그가 지금 세속을 탐하며 땅의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까? 그가 지금 예배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주저 앉아있고, 땅에 머물러 있고, 참 예배를 상실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신앙 의 처음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참다운 지혜가 무 엇입니까? 형통의 날에 환난의 날을 생각하는 것이고, 기쁨의 날에 슬픔의 날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7년의 풍년 동안, 7년의 흉년을 대비했습 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야곱이 세상의 달콤함과 현실에 안주해서 신앙의 허 약함에 빠져들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의 자리에 환난을 주셔서 그가 잊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일깨우십니다. 마침내 야곱은 자기 현실을 직시하 고 벧엘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잊고 살았는지, 얼마나 하나 님을 멀리했는지, 얼마나 그분께 신실치 못했는지를 깨닫고 벧엘을 향하기 로 마음을 먹습니다. 야곱은 온 가족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합니다.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 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 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 으려 하노라 | 창 35:2-3
야곱은 안주했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잊고 살았던 벧엘로 올라 갑니다. 돌아보면 자기 일생에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본 적도 없었습 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었기에 가장 진실했고, 철저히 고독했기에 가장 순수했던 곳이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베 고 자던 돌베개를 제단삼아 예배드릴 만큼 간절한 심정을 가졌던 곳이 벧엘 이었습니다. 지금 못지않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했던 그 자리 로, '환난 날에 응답하시던 하나님'을 경험했던 그곳으로 마침내 야곱은 주 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갑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한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묵은 땅인 지금,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돌아가야 할 그곳은 우리에게 어디이겠습니까? 종교 개혁 500주년을 지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중한 문음입니다. 루 터는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권력으로 변한 종교, 본질을 잃어버린 당시의 가 톨릭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역사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맛 잃은 소금은 땅 에 버려져 짓밟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종교처럼 추한 게 없습니다. 타락한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을 얽어매는 오랏줄입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 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은, 잘못 상상된 하나님의 힘과 감화에서 나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잘못 상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만들어낸교설에마음빼앗길게아니라,주어진하나님말씀에귀 를 갖다 대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뜻을 일깨워주실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본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갖다 대 고, 성령의 은총 안에서 말씀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중심적 광신에서 벗 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신앙은 냉정하게 말하면 신 앙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 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롬 6:16
사도 바울에 따르면 죄의 종도 있고 순종의 종도 있습니다. 그러면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롬 6:19에서 "지체를 부정과 불 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죄의 종노릇 하는 사람은 선물로 받은 고귀한 삶을 더럽고 추한 일에 바친다는 겁니다. 돈과 명예 그 리고 권세를 얻기 위해 불법의 종이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빼앗긴 채 얻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처럼 공허한 것이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앙의 양심을 파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타락이고 전락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자신의 몸을 불의의 종으로 바치고 말았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꾸짖지 않습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기 위해 나팔을 불지도 않았고, 오히려 권력자들 편에 가담해 특권을 누렸습니다. 강자들의 편의에 복무하는 교회는 참 그리 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껏 그것이 한국 주류교회의 참담한 현 실이었습니다.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절실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하며 울어야 합니다. 개혁자들은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습 니다. "믿음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은총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습 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실하게 만나고,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의 삶은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체를 의 의 종으로 바칩니다. 그래서 거룩함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롬 6:19b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린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란 책이 있습니다. 기독 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 소설에서 포르 투갈 출신의 신실한 선교사 로드리고가 일본 관리들에게 붙잡혀서 회유를 당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나무판인 '후미에(踏繪)'를 밟으라는 겁니 다.그는그럴수없었고,그럴생각도없었습니다.한 평생 그얼굴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어려움이 닥쳐왔다고 어떻게 그분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관원들은 그가 후미에를 밟으면 잡혀온 기독교인들을 살려주겠지만, 거절하면 그들을 모두 처형하겠다고 말합니다. 로드리고는 고심을 거듭하다 가 결국 후미에를 밟기로 합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그것을 발로 밟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런데 그때 목판 속의 그분이 로드리고에게 말합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 가를 짊어졌다" 우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어준다는 건 그런 것이겠습니다. 로드리고는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 예수님의 심정과 깊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 주님의 심정과 일치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이제라도 돌이켜서 우리의 벧엘인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리,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의의 지체로 드 려 주님의 심정과 일치를 이루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실 천 | Praxio
1.첫 신앙의 순수함을 잃은 채 자기 우상에 빠져 있지 않은가?
2.다시 벧엘로 돌아가 말씀과 예배와 순종을 회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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