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0주 경외감이 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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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작성일
2017-10-24 13:06
조회
1455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 약 | 출 33:18~23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응 송 | 시편 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서 신 | 살전1:5-8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복 음 | 마 22:15-22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묵 상 | meditatio
1.출 33:20-2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얼굴은 보이지 않으시고 등만 보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마 22:21을 묵상하십시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으십니까?
3.살전 1:5-7을 묵상하십시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자칭 율법 전문가이면서도 변질에 변질을 거듭한 끝에 섬뜩한 살의(殺意)를 속내에 품고 예수를 시험하기까지 이른 바리새인 들의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마 22:17, 18) 종교인의 허울을 쓰고 살면서, 그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상실하면 인간은 금방 금수와도 같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을 넘어서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길 로 삼았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행 동하며 살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왜 우리가 쉼 없이 기도를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연주에 앞서 악장의 리드에 따라 각자의 소리를 조 율합니다. 그래야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회나 교회의 풍경이 조화롭지 못한 것은 저마다 자기중심의 소리를 내기 때문입 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한 분야도 시끄럽지 않 은 데가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삶의 근본 문제 앞에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도화된 교회는 늘 특권층을 낳게 마련이고, 그 특권층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 의 벌건 욕망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체제와 치열하게 싸우신 것은 바 로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신성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변한 현 실을 보며 분노하셨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치부를 폭로하는 예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불편하 게 생각했던 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 된 삶을 산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던 이들인데, 예수님이 그들의 위선을 사 정없이 폭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먼 인도자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라 고도 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렸다"(마 23:23)고 꾸짖기도 하셨습 니다. 거짓된 종교야말로 가장 큰 위험임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에둘러 말하 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예 수를 올무에 몰아넣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평상시라면 경멸해 마지않았을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를 했습니다. 기득권에 위협이 되 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불의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자문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춥니다. 보냄을 받은 이들은 질문 에 앞서 예수를 한껏 추켜세웁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서막에 등장하는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기억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불안을 느낀 애굽 왕 바로는 산파 들을 불러서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엎어놓아 죽 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그들은죽음의문화가지배하는세상에서생명중심의사고를하는이 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출애굽의 보이지 않는 영웅은 이 산파들인지도 모르 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가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 앞에 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권력자들의 억압에 맞서 싸우던 신앙의 선배들이 마음을 담아 부르던 찬 송가들이 있습니다. 336장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 도는신앙지켰네/이신앙생각할때에기쁨이충만하도다/ 성도의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절의 가사는 더 비장합니다. "옥중에 매인 성도 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찬송가 586장도 그렇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뜨겁게 합니 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 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 익 잃어도 /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이 찬송을 부르며 권력자들과 맞서 싸운 사람들은 황제 에게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분명히 구별하며 살아간 신앙인들입니 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 는 것일까요? 우리도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으니 이 땅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때로는 타협도 하게 됩니다. 부득이 형제들과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빛을 선택하는 삶이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서 진리를 따라 사는 겁니다.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라는 인권 단체의 대표인 '게리 하우겐'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위험하지 않다면, 내가 따르는 분이 과연 예수님인지 멈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리 위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황제에게 절하며 사는 것이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은 아닌지요? 눈 덮인 산야 에 홀로 선 어린 소나무의 꿈은 봄이 아니라 끝까지 푸르른 것이라고 합니 다. 오늘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님 믿어 천국에만 가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 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한다"(살전 1:3)며 칭찬합니 다. 그들이 그렇게 칭찬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많은 환난 가운데서 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 다.(살전 1: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본받을 스승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을 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 는이땅에서모든믿는자의본이될것입니다.가을은깊고이제내일이 면 상강(霜降)입니다. 머잖아 닥쳐올 겨울의 의식하는 계절입니다. 가을걷이 할 곡식이 사방에 널려 있어 부지깽이도 덤비고, 대부인 마님도 나막신짝 들고나선다는이계절에우리는어떤절박함으로이계절을지날것입니 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입니다. 경외감을 상실한 신앙은 회 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종교인의 허울을 쓰고 살면서, 그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상실하면 인간은 금방 금수와도 같아집니다. 반대로 하나님 을 향한 경외감이 클수록 그 사람은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향한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고, '경건의 모양'을 넘어서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고, 성령의 은총과 말씀으로 주를 본받음으 로 누군가의 본받을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 가을은 열 매로 풍성할 것이고, 다가오는 우리들 인생의 겨울은 따뜻할 것입니다.
■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까닭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2.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 있는가?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 약 | 출 33:18~23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응 송 | 시편 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서 신 | 살전1:5-8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복 음 | 마 22:15-22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묵 상 | meditatio
1.출 33:20-2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얼굴은 보이지 않으시고 등만 보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마 22:21을 묵상하십시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으십니까?
3.살전 1:5-7을 묵상하십시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경외감이 있는 믿음
가을이 퍽 깊어서 어느덧 상강(霜降)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상강은 24 절기 가운데 열여덟째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동아일보 1961년 10월 24일자에서는 "누렇게 시든 가로수 잎들이 포도 위에 딩굴고, 온기 없는 석양이 삘딩 창문에 길게 비쳐지면 가을도 고비를 넘긴다"라며 상강이 겨울로 접어드는 절기임을 비치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에서는 "들에 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 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 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 는데,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또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쁜 절기임을 보여줍니다. 옛날의 중국사람들은 상강 으로부터 입동 사이의 기간을 5일씩 삼후(三候)로 세분해서, 초후(初候)에는 승냥이가 산 짐승을 잡고, 중후(中候)에는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며, 말후(末 候)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모두 땅에 숨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듯 24절 기 생태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창조 질서의 엄중함과 그것에 대한 경 외감입니다. 이 생태력의 공전에 순응해서 살아갈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우리는 그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새삼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온 마음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주의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 는데,모세를반석틈에두고당신께서다지나가실때까지친히당신손으 로 덮어주십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출 33:20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그토록 무례할 수 없고, 심지어 모세까지 나서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라"고 요구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을 향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않음'을 '존재하지 않음'으로 여기는 무지한 인 간을 향한 책망이 말씀 속에서 번득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어서 '보이 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오만방자함'은 훗날 성자 예수님을 향해서도 여전히 드러납니다.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자칭 율법 전문가이면서도 변질에 변질을 거듭한 끝에 섬뜩한 살의(殺意)를 속내에 품고 예수를 시험하기까지 이른 바리새인 들의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마 22:17, 18) 종교인의 허울을 쓰고 살면서, 그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상실하면 인간은 금방 금수와도 같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을 넘어서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길 로 삼았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행 동하며 살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왜 우리가 쉼 없이 기도를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연주에 앞서 악장의 리드에 따라 각자의 소리를 조 율합니다. 그래야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회나 교회의 풍경이 조화롭지 못한 것은 저마다 자기중심의 소리를 내기 때문입 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한 분야도 시끄럽지 않 은 데가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삶의 근본 문제 앞에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도화된 교회는 늘 특권층을 낳게 마련이고, 그 특권층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 의 벌건 욕망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체제와 치열하게 싸우신 것은 바 로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신성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변한 현 실을 보며 분노하셨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치부를 폭로하는 예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불편하 게 생각했던 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 된 삶을 산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던 이들인데, 예수님이 그들의 위선을 사 정없이 폭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먼 인도자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라 고도 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렸다"(마 23:23)고 꾸짖기도 하셨습 니다. 거짓된 종교야말로 가장 큰 위험임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에둘러 말하 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예 수를 올무에 몰아넣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평상시라면 경멸해 마지않았을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를 했습니다. 기득권에 위협이 되 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불의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자문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춥니다. 보냄을 받은 이들은 질문 에 앞서 예수를 한껏 추켜세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 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 다 | 마 22:16
도덕경 81장에 '신언불미 미언불신(信言不美 美言不信)' 즉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미덥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사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찾아온 바리새인들의 말에 는 진정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미끼 언어일 따름입니다. 이런 미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두려움만 가지고 있어도 이런 미끼언어로 사람을 낚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은 할라카(halakah)라는 전통을 반영하고 있습니 다. 유대인들은 현실에서 발생한 어떤 사안을 두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 갈릴 때면 율법의 권위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 내리는 판단을 권위 있게 받아들여 자기들의 행동에 반영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뿐 아니라 이슬람권에도 있는 전통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질문은 사실 심각합니다.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 마 22:17
이 질문은 양날의 칼입니다.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예수는 위험에 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의 조세 정 책에 저항하도록 군중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쓰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예수는 졸지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히게 될 상황이었 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함정 질문을 던져놓고 쾌재를 불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꾸짖으시면서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 22:20)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마 22:21) 로 마가세금징수를목적으로하여은으로주조한공식화폐인데나리온한면 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아우구 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디벨리우스 황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면에는 황태후인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하고 '최고 의 사제'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돈은 황제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제시됩니다.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마 22:21
얼핏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함정질문을 교묘하게 빠 져나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대답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 냐, 옳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구별해야 된다고 대답하십니 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황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 들은 로마를 통일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가장 귀한 호칭을 부여했습니 다.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 등등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들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른바 황제숭배 가시작된것입니다.황제가신이라는사실을부정하는것은그자체로반 역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황제는 신이 아니라 황제일 뿐' 이라고말씀하시는겁니다.한걸음더나가예수님의이대답에는바리새 인들을 향한 책망도 담겨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사 느냐?", "하나님께 바쳐야 할 충성마저 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데나리온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 의 이중적 처신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지배를 거절하는 척하면서 도 실상은 로마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겁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런모습은오늘우리와크게다르지않은모습입니다.성경은인간이하나 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사람됨은 자 기의 마음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 과 권력에 온통 우리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섬김의 대상이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 삶이 맥 빠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우리는 출애굽기의 서막에 등장하는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기억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불안을 느낀 애굽 왕 바로는 산파 들을 불러서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엎어놓아 죽 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그들은죽음의문화가지배하는세상에서생명중심의사고를하는이 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출애굽의 보이지 않는 영웅은 이 산파들인지도 모르 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가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 앞에 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권력자들의 억압에 맞서 싸우던 신앙의 선배들이 마음을 담아 부르던 찬 송가들이 있습니다. 336장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 도는신앙지켰네/이신앙생각할때에기쁨이충만하도다/ 성도의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절의 가사는 더 비장합니다. "옥중에 매인 성도 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찬송가 586장도 그렇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뜨겁게 합니 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 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 익 잃어도 /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이 찬송을 부르며 권력자들과 맞서 싸운 사람들은 황제 에게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분명히 구별하며 살아간 신앙인들입니 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 는 것일까요? 우리도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으니 이 땅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때로는 타협도 하게 됩니다. 부득이 형제들과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빛을 선택하는 삶이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서 진리를 따라 사는 겁니다.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라는 인권 단체의 대표인 '게리 하우겐'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위험하지 않다면, 내가 따르는 분이 과연 예수님인지 멈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리 위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황제에게 절하며 사는 것이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은 아닌지요? 눈 덮인 산야 에 홀로 선 어린 소나무의 꿈은 봄이 아니라 끝까지 푸르른 것이라고 합니 다. 오늘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님 믿어 천국에만 가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 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한다"(살전 1:3)며 칭찬합니 다. 그들이 그렇게 칭찬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많은 환난 가운데서 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 다.(살전 1: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 라 | 살전 1:7
본받을 스승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을 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 는이땅에서모든믿는자의본이될것입니다.가을은깊고이제내일이 면 상강(霜降)입니다. 머잖아 닥쳐올 겨울의 의식하는 계절입니다. 가을걷이 할 곡식이 사방에 널려 있어 부지깽이도 덤비고, 대부인 마님도 나막신짝 들고나선다는이계절에우리는어떤절박함으로이계절을지날것입니 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입니다. 경외감을 상실한 신앙은 회 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종교인의 허울을 쓰고 살면서, 그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상실하면 인간은 금방 금수와도 같아집니다. 반대로 하나님 을 향한 경외감이 클수록 그 사람은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향한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고, '경건의 모양'을 넘어서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고, 성령의 은총과 말씀으로 주를 본받음으 로 누군가의 본받을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 가을은 열 매로 풍성할 것이고, 다가오는 우리들 인생의 겨울은 따뜻할 것입니다.
■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까닭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2.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 있는가?
첨부파일 : 성령강림-후-제20주-경외감이-있는-믿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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