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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9-14 18:53
조회
121
성령강림 후 제17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잠 1:20-33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 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 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 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 하리라
응송 | 시 19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서신 | 약 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 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 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 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 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 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복음 | 막 8:27-38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 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 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 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 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 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8:33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말 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잠 1:23-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대한 사람들 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③ 약 3:1-2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선생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구약성경에서 잠언 기자는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4-26) 라고 경고합니다. '들음'으로부터 '돌이킴'이 가능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교훈을 듣기 싫어한 이들은 듣기 싫어하는 그 '마음' 때문에 돌이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라며, 말의 원천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그에 따라 '말'도 바뀌어야 할 것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 채워지지도 않고, 따라서 그 '말'이 쓴 물과 같은 말이 되었을 때, 그의 말은 '불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그의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맙니다(약 3:6).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8:33) 라며 꾸중을 듣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은, 필경 평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의 혀는 불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은 공생애 초기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말을 닮아버리고 맙니다.
결국 오늘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주는 공통된 교훈은 우리 언어생활이 성경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쓰는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도구로 당신의 마음과 뜻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언어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러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라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마가는 그 이후의 예수님의 칭찬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모진 꾸중을 듣습니다.
베드로의 이 태도는 분명 공생애 초기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역할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때 사탄은 예수님을 안이한 메시아의 길로 이끌어 들이려고 유혹했었습니다. 40일을 금식하며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길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배불리는 쉬운 길을 권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의 길 보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심으로 영웅이 되어 사는 길을 권했습니다.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무명으로 살기보다는 단 한 번 사탄에게 절하는 조건으로 도시를 점령해 사는 길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항변 속에 그런 사탄의 유혹이 음흉하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며 나무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성서 속에서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기록된 그 정신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에서는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도 오히려 영혼의 이익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자의 이름도, 문학적인 가치도 문제 삼지 말고, 다만 진리에 대한 사랑에 움직여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그것을 썼는가를 문제 삼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마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그토록 분명한 신앙고백을 주님께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채 주님의 칭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기의 신앙고백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자기는 자기였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롬 1:28).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이 있기 전에 그 원천으로서의 '마음'이 먼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그 '말'의 원천으로서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집니다. 그의 말, 그의 글, 그의 작품, 그의 세계 전체가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경청하게 됩니다.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듣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이 지켜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언어가 예수님 같아지는 것입니다. 컵에 담긴 물과 그 물을 담고 있는 컵이 비록 하나는 아니지만, 그러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머금은 우리 마음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러나고, 그 향기를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우리의 언어생활은 내 생각에서 비롯되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말이 시작되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잠 1:20-33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 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 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 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 하리라
응송 | 시 19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서신 | 약 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 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 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 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 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 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복음 | 막 8:27-38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 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 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 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 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 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8:33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말 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잠 1:23-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대한 사람들 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③ 약 3:1-2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선생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자왈(子曰) 중인이상 가이어상야(中人以上 可以語上也) 중인이하 불가이어상야(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중간 이상 수준의 사람에게는 심오한 것을 말해줄 수 있으나, 중간 이하 수준의 사람에게는 심오한 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남에게 전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따라서 '말'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통해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전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귀한 말일수록 상대를 가려서 하라는 것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심오한 수준의 말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모든 언어생활에는 가치와 품격이 존재하는데,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 말에서 가치와 품격이 우러나야 할 것이고,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치와 품격이 담긴 말을 가려들을 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바로 그 '말'과 '들을 귀'에 관한 말씀들입니다.구약성경에서 잠언 기자는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4-26) 라고 경고합니다. '들음'으로부터 '돌이킴'이 가능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교훈을 듣기 싫어한 이들은 듣기 싫어하는 그 '마음' 때문에 돌이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라며, 말의 원천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그에 따라 '말'도 바뀌어야 할 것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 채워지지도 않고, 따라서 그 '말'이 쓴 물과 같은 말이 되었을 때, 그의 말은 '불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그의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맙니다(약 3:6).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8:33) 라며 꾸중을 듣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은, 필경 평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의 혀는 불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은 공생애 초기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말을 닮아버리고 맙니다.
결국 오늘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주는 공통된 교훈은 우리 언어생활이 성경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쓰는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도구로 당신의 마음과 뜻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언어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러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라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마가는 그 이후의 예수님의 칭찬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모진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막 8:33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 하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께 '사람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 때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굉장히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 막 8:32
마가는 우선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붙들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슬라보메로스(προσλαβόμενος)'인데, 이 말의 뜻은 개인적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예수를 '자기 곁으로 당겨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어떤 중재역할을 하려는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그리고 '항변했다'는 것은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 즉 '책망하고, 꾸짖으며,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겨서 책망하고, 꾸짖고, 비난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자기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한 겁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고 번역했고, 같은 상황을 기록한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세속적인 메시아사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메시아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그의 생각 속에 자리 잡은 메시아사상으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찔림과 상함'(사 53:5)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관이 다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란 어떤 겁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이 '전능하신 분'이신 까닭에 우리 역시 고난이라든지, 수치심, 실패 등등을 잘 인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전능성이 훼손을 당하면 그분께 의탁된 나의 삶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거친 행동과 실언(失言)은 바로 그런 초조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베드로의 이 태도는 분명 공생애 초기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역할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때 사탄은 예수님을 안이한 메시아의 길로 이끌어 들이려고 유혹했었습니다. 40일을 금식하며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길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배불리는 쉬운 길을 권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의 길 보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심으로 영웅이 되어 사는 길을 권했습니다.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무명으로 살기보다는 단 한 번 사탄에게 절하는 조건으로 도시를 점령해 사는 길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항변 속에 그런 사탄의 유혹이 음흉하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며 나무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막 8:34-36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 몰아세우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한다고 꾸짖으신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앞세워 십자가를 부인하고 스스로 목숨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목숨을 잃는 길이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목숨' 즉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잉태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세계-나-존재'라는 특성을 지녔는데,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피조성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근거가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즉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즉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겨워 십자가를 부인하고 그 길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그런 유혹에 자기의 행동과 언어를 내어주게 되었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구약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 잠 1:23-26
시간과 공간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처한 영적 상황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처한 영적 상황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주고,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잠언 기자는 29절과 30절에서도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고 속상해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 잠 1:31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지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식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내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내 꾀에 배부른 삶을 살아가는 걸까요?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à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우리는 성서 속에서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기록된 그 정신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에서는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도 오히려 영혼의 이익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자의 이름도, 문학적인 가치도 문제 삼지 말고, 다만 진리에 대한 사랑에 움직여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그것을 썼는가를 문제 삼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마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그토록 분명한 신앙고백을 주님께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채 주님의 칭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기의 신앙고백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자기는 자기였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롬 1:28).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이 있기 전에 그 원천으로서의 '마음'이 먼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그 '말'의 원천으로서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약 3:9-12
찬송과 저주, 단 물과 쓴 물, 감람 열매와 무화과 열매, 짠 물과 단 물의 공통점은 '원천(源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천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마음'에서 찬송도 저주도 나오는 걸 보면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며 절규합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는 겁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인데, 베드로는 조금 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까지 했다가, 바로 이어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십자가의 길을 막아섭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말의 원천인 마음을 말씀으로서 지켜내지 못하고, 살그머니 다가온 사탄에게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 '마음'을 중시해서, 살그머니 스며든 상념을 주의하라 한 것이고, 잠언 기자도 줄기차게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잠 3:1),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잠 4:4),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잠 4:21),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당부하는 겁니다. 내 말의 원천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 그 원천으로부터 우러난 내 말이 주님께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3장에서 "불현가욕(不見可欲) 하여 사심불란(使心不亂) 하라" 했습니다. 욕심낼 만한 것을 내보여서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욕심을 겉에서 누르려 하지 말고, 아예 속에서 부터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셨을 때, 성령의 은총 안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 속사람 즉 마음부터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2:5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당부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롭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은혜롭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온유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겸손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의 원천인 마음이 예수님 같아지면 우리의 언어도 예수님 같아지는 겁니다.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집니다. 그의 말, 그의 글, 그의 작품, 그의 세계 전체가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경청하게 됩니다.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듣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이 지켜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언어가 예수님 같아지는 것입니다. 컵에 담긴 물과 그 물을 담고 있는 컵이 비록 하나는 아니지만, 그러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머금은 우리 마음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러나고, 그 향기를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우리의 언어생활은 내 생각에서 비롯되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말이 시작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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