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왕상 8:22-30
2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2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24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26 그런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 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 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응송 | 시 8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서신 | 엡 6:10-20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 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 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 요 6:56-69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 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 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엡 6:14-17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영으로 듣고 살아가는 성도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합니까?
② 요 6:68-69을 묵상하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어렵다며 떠나갈 때, 베드로가 주님께 남긴 고백은 무엇입니까?
③ 왕상 8:25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당부하신 말씀 중 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제 2의 본성을 쇄신하라
아비투스(habitus)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제2의 본성'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개인의 사고방식, 행동 방식,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내재화 된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철학자들이 주로 덕목과 습관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다가 20세기 들어서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의해 '사회적 환경에 따른 개인의 삶의 방식'이란 맥락에서 재해석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보았던 말씀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여성으로 의인화 된 지혜가 집을 짓고 상을 차린 후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초대와(잠 9:1-6), 속이 비어 어리석은 여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선을 떨며 사람을 불러 모으는 초대를(잠 9:13-17) 구약성경에서 보았습니다. 두 여인 모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먹고 마시는 은유를 사용했지만(잠 9:5, 17), 그러나 두 메시지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성 지혜는 자신이 직접 음식을 요리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이 초대는 생명과 명철에의 초대였습니다(잠 9:6). 하지만 어리석은 여인은 훔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준비해 놓고 불의한 음식이 주는 달콤함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불로소득과 은밀성의 쾌감을 무기로, 악한 일에 자신과 하나가 되기를 유도했던 그녀의 초대는 죽음과 저승 골짜기에의 초대였습니다(잠 9:18). 따라서 그 순간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분별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라 하습니다.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이 생명과 명철에의 길인지, 아니면 죽음과 저승 골짜기에의 길인지를 분별해서 '아비투스' 즉 나의 '제2의 본성'을 쇄신시키고,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쇄신해서, 삶속에 그리스도인다운 덕목을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그중에서 서신서의 말씀인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의 말씀이 '끝으로'(엡 6:10)라는 부사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엡 6:10-11
바울은 이 말씀이 시작되기 전인 에베소서 1장-3장까지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4장-6장까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새 사람의 삶을 살 것'에 대해 권면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베소서 전체의 결론을 말하려는 시점에 '끝으로'라는 다소 비장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소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새 사람이 되어야 할 성도들에게 '끝으로' 당부할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부의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도대체 우리의 전투의 대상이 누구이기에 바울이 이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고, 그 싸움의 대상은 악마의 간계(奸計)입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간계를 씁니다. 악마의 간계란 '간사한 유혹(메도데이아스 μεθοδείας)'을 의미하는데, 마치 잠언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여인이 훔친 물과 몰래 먹는 떡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과 같습니다. 악마는 영리하게도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선의 사자(使者)로 보도록 설득하려 애를 씁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벗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새 사람의 삶을 살려 할 때' 필연적으로 악마의 간계에 맞서 싸우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싸움은 전사(戰士)가 전투를 치르는 것과도 같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마지막 당부는 마치 전쟁을 앞둔 군인들을 향한 장수의 격문(檄文)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전투의 대상에 대해 다소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 엡 6:12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표현은 오직 바울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어둠'이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옛 사람'의 상태이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입니다. 마귀의 간계는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유혹해서 옛 사람의 구습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애타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당부합니다. 전신 갑주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πανοπλίας(파노플리아)'로 '완전한 갑옷'입니다. '완전무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이 완전무장을 문학적으로 묘사했습니다.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엡 6:14-17
먼저 바울은 '서서' 즉 '서있는 상태'를 강조합니다. 헬라어로 '서다(ϊστημι 히스테미)'라는 동사는 전투를 앞둔 군인의 부동자세를 암시하고, 전투력을 모으는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군인이 갖추어야 할 무장(武裝)으로 설명되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 등등은 그리스도인들이 악마의 간계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갖출 완전무장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무장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제시한 무장은 모두 방어를 위한 것이지 공격을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공격 무기로 여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검'인데, 바울에 따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전투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공격무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고, '말씀'에 의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지어져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에 불어넣으신 '말씀'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성육신하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만 우리의 육체적인 삶,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 삶이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보다는 세속의 문화 안에서 '아비투스' 즉 '제 2의 본성'을 형성해 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군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며 반감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이 반감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한 가지씩 말씀 하실 때마다 그들 반응은 한결같이 냉소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다보면 그런 반응이 심지어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 6:58a)이라시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b)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여럿'의 반응이 이랬습니다.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요 6:60
물론 여기 등장하는 제자는 12 제자보다 더 확대된 그룹의 제자들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눅 10:1에 보면 칠십 인의 제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제자 중 여럿'이란 바로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은 왜 주님의 말씀을 어렵게 느꼈을까요?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전달하실 때, 때로는 건조하게 '문장'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고, 때로는 '수사'를 동원해 설득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修辭學, Rhetorike)'에 대해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특정한 분야의 주제를 다룰 때, 수사학이나 변증술(dialektike 혹은 대화술)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이전인 기원전 1세기경에 활동했던 로마의 정치인인 키케로가 수사학이 가진 실용적 미덕을 예찬하며 '정신과 귀에 이해하기 쉬운 효과적인 표현' 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주님의 수사는 제자들의 귀에 이해하기 쉽도록 하시려고 주님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거북스러워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여기서 '어렵다'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로 '딱딱하다', '거칠다', '접촉하기 어렵다'라는 뜻인데, '이해하기 어렵다' 라기보다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이는 마음 밭에 따라 딱딱하고 거친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70인역(LXX)에 의하면 창 21:11에서 하갈을 내쫓으라는 사라의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이 단어 '스클레로스'를 사용했고, 마 25:24에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할 때, 그리고 행 26:14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사울의 마음을 표현할 때, '스클레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딱딱하고, 거칠게 들려와서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한 사람들, 그들은 유대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요 6:61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 말씀을 원문대로 해석하면 "이것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란 의미입니다. 참 슬픈 질문입니다. 진리가 이렇게 인간 이성에 거칠게 느껴지고, 그래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면 결코 진리가 '걸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는 항상 육의 것들이 걸림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와 죄성(罪性)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이해하기엔 인간의 마음에 죄와 불의가 너무 가득합니다. 불의는 정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죄는 거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의와 죄에 묻혀 사는 사람에게 정의와 거룩을 요구하면 사람들은 그만 걸려 넘어지거나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은 유대인과 제자들이 보인 이 '걸림 현상'에 대해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을 자신들에게 연관 지어, 그들 자신도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단의 요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단지 그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바로 그 눈'을 뜨고, 말씀을 믿을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요 6:62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마음이 참 섬세하고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주님은 강압적으로 제자들을 믿게 하려고 애쓰시지 않고, 제자들이 영적 통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시선에 호소하십니다. "만약 너희가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본다면 그래도 여전히 내 말에 걸려 넘어지고, 지금처럼 분을 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가장 핵심적인 이 메시아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하고 싶으신 겁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가십니다.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요 6:63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이 '육(肉)적인 언어'가 아니기 때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당신의 말씀이 그들에게 익숙한 '육의 말'이 아니고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는 절대로 당신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육신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과 본능으로 영의 말씀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교리들을 머리로, 이성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재하셔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깨달아질 때, 우리는 깊은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깊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깊은 믿음을 소유하면 깊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이들은 지금껏 '표면적 제자'로 산 것입니다. 저들의 내면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육으로 영을 보려니 보이지 않았고, 육으로 영을 따르자니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들은 믿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에 따르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요 6:64) 그리고 계속되는 상황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요 6:66
교회에 나왔다고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언젠가 주님 곁을 떠날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 왕상 8:25
솔로몬의 이 기도는 왕상 2:4에서 자기의 아버지 다윗이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유언은, 삼하 7:8-16에서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핵심은 '너 자신의 길'을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삼가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르' 즉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걷는 길을 면밀히 주의해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삼가 주의해서 '너 자신의 길'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내 마음이 원하는 삶'을 살고, '내 판단이 시키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의의 흉패를 붙이고, 허리에는 진리로 띠를 띠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쥐고, 하나님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사이다와 같은 청량한 한 마디를 남깁니다.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을 때"(요 6:66),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대답이 이것입니다.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 요 6:68
이보다 멋진 명언이 있을까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오직 주께만 있는 영생의 말씀으로 우리 제2의 본성이 쇄신되어,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을 신고,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기쁨과 찬미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악마의 간계에 자신의 지혜와 의지로 맞서려 하지 않는가?
②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계에 맞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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