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4주 내면의 성숙과 변화에 대하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15:34-16:13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 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 니라 하시는지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 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 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 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 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응송 | 시 20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서신 | 고후 5:6-10 (11-13) 14-17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 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 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 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복음 | 막 4:26-34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 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 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 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4:27, 28을 묵상하십시오. 씨앗을 심은 후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동안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② 고후 5:7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삶과 사역에서 가장 우선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삼상 16:7을 묵상하십시오. 용모와 키를 중시 여기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면의 성숙과 변화에 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이 우리 머리와 가슴을 변화시켜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도의 영(靈)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끌어 갈 때,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타인의 선망(羨望)을 받고, 우리의 행동과 말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영적 삶을 살기 시작한 후에도 그러한 바람이 우리의 사고와 말과 행동을 지배할 동안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고 소명과 시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 그 성과 속, 소명과 시험 사이의 긴장관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의 영적 성숙이 필요한 이유인데, 그 영적 성숙 즉 '변화(transformation)'는 훈련을 통해 점차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지금껏 내 몸에 익숙해진 관습 혹은 악습을 끊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4세기의 수도자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인간의 '세 영역'의 '아홉 가지 악습'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세 영역이란 탐욕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정신적인 영역인데, 이 '세 영역' 안에 각각 '세 가지 열정'이 있다는 것이 에바그리우스의 성찰입니다. 예컨대 '탐욕적인 영역' 안에는 탐식, 섹스, 소유에의 열정이 있고, '감정적인 영역' 안에는 슬픔과 화 그리고 아케디아(akedia) 즉 영적태만에의 열정이 있고, '정신적인 영역' 안에는 명예욕과 질투심, 그리고 오만함에의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영역 안에 있는 각각의 세 가지 열정은 처음에는 인간을 얽매지 않지만,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 방치하면 결국에는 악습(惡習)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의 이 성찰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내면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외모보다 감추어진 나의 내면이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일제히 말하려는 것 또한 바로 그 부분입니다. 구역성경에서 하나님은 용모와 키를 기준으로 새 왕을 찾으려는 사무엘에게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시며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심'이란 '마음(heat)' 즉 '인간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한때 왕이었던 사울이나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다윗의 형들은 겉으로 보이는 용모나 키의 준수함과 달리 그 내면은 하나님 종으로서의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반면에 다윗은 '내면에 하나님이 계신 자'로서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고후 5:7 표준 새 번역) 라며 그리스도인이란 '내면을 가꾸며 사는 사람' 임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표면적 세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진리에 시선을 두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것'은 '육의 눈'에 '영의 눈'이 가려 이익이나 탐(貪)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가지 않고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마치 곡식이 익어가는 단계와 같다고 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도를 이루는 과정 즉 사람이 훈련을 통해 자라고 익어가는 과정은 처음에는 싹이다가, 그 다음에는 이삭이다가, 종내는 튼실한 곡식의 과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 우리는 마치 '겨자씨 한 알'(막 4:31) 같은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이 영적 훈련을 지속해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당신숨결인 성령으로 채우셔서, 마침내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아름드리나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막 4:32). 주님은 진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를 종종 사용하셨는데, 그 중 제법 많은 비중은 농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가 들어있는 마가복음 4장에도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막 4:1-9절로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비유'이고, 둘째는 26-29절로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비유이고, 셋째는 30-32절로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이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 막 4:26
평범한 농사일에 하나님 나라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 평범한 일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 숨어있다는 것에 우리는 내심 감탄하게 됩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만이 하는 고유한 행동입니다. 고대 조상들이 씨앗에서 미래의 생명을 보아낸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비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농부의 씨 뿌리는 행동 이면에서 포착된 아주 신비한 힘에 대해 소개해 주십니다. 씨앗 하나가 농부의 손에 의해 땅에 뿌려졌습니다. 처음에는 뿌려진 그대로 씨앗이었겠지만 어느 순간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피부가 썩기 시작하다가 몸체도 썩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죽어서 썩은 그 몸에 여린 싹이 돋아나더니 자기를 뒤덮은 두터운 흙을 밀어 올리고 땅 위를 향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땅 위로 오르자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비가 시원하게 내리면서 온몸이 해갈을 경험합니다. 자기가 자라려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하루하루 쑥쑥 자라갑니다. 이 신비를 예수님은 이렇게 묘사해 주십니다.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 막 4:27, 28
자기가 땅에 뿌린 씨가 썩고, 거기서 싹이 나와 자라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보는 과정을 농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난 다음에야 보이지 감추어진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가가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농부가 아무 일도 안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씨를 가려 보관하고, 밭을 부드럽게 하려고 쟁기질도 하고, 적당한 퇴비도 뿌려주었을 것입니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이후에 한 일은 오로지 '자고'와 '깨고'를 반복한 것뿐입니다. 며칠 뒤에 밭으로 나갔더니 아주 작은 떡잎이 보입니다. 얼마 후에는 부쩍 자란 이삭이 보이더니 어느 날 이삭마다에 열매가 달렸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다 압니다.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자이지 자라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씨앗이 뿌려진 땅의 중요성입니다. 씨앗 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있고,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다 할지라도 그러나 땅이 그 씨앗을 거부한다거나 땅이 햇빛과 비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땅은 아무 열매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땅은 곧 사람의 내면입니다. 사람의 내면이 하나님께서 주신 씨앗을 기뻐하고, 그 씨앗을 품고 가꾸어 열매를 맺으려는 열망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씨앗과 땅을 통해 열매가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혹은 '모든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주기를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삼상 8:9)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때 사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외모로만 판단했을 때 그는 한 나라의 왕이 되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 곳 흠 잡을 데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이 된 후의 그의 행동을 보면서 내면이 갖추어지지 않은 외모의 출중함이 얼마나 자신에게 비극인지도 보게 됩니다. 왕이 된 이후로 사울은 번번이 사무엘과 충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마침내 사무엘이 그를 찾아가서 책망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얼마나 무서운 책망인지 모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는 사무엘의 책망에서 당시 사울 왕의 내면이 어떠한 상태였는지가 드러납니다. 가뭄에 강바닥이 드러나듯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의미는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책망에 그의 혐의가 담겨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시사(時事)인데, 사무엘은 그가 말씀을 외면하고 순종치 않은 것에 대해 '점치는 죄'(삼상 15:23a)와 같다고 경고하고, 그의 완고함에 대해서는 '우상에게 절하는 죄'(삼상 15:23a)와 같다고 경고합니다. 그 결과는 버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삼상 15:23) 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을 거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이어지는데 여기 아주 가슴 아픈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삼상 15:34, 35
이 말씀은 사무엘과 사울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 삼상 16:1
사울의 폐위(廢位) 소식에 슬픔에 잠겨있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새 왕을 세우시겠다며,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가라 하십니다. 사무엘이 찾아갔을 때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첫째인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삼상 16:6)라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보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라아'가 1절과 6절과 7절에서 다섯 번 등장합니다. 그만큼 '보는 것'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들려온 하나님 말씀이 사무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십니다.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 16:7
하나님께서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겉모습보다 '내면'을 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내면을 사막의 교부들은 '우리 존재의 형이상학적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내면은 깊고 초자연적이며 각 사람 인격의 중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영을 보내어 아빠 아버지'(갈 4:6)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 마카리오스에 의하면 밀실과도 같은 내면은 진실로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심연(深淵)이며,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내면의 자리를 내어드린다면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의 옥좌(玉座)가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옥좌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좌정(坐定)하신다면 그래서 우리의 온 영혼이 눈을 활짝 뜬다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얼마나 달라질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신과 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새의 일곱 아들은 뛰어난 외모를 가졌음에도 사무엘은 그들 중에서 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왕이 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또 없느냐"(삼상 16:10) 라고 묻자 이새는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삼상 16:11a)라고 대답합니다. 형들이 왕이 되기 위해 사무엘 앞에 있을 때, 묵묵히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사람 다윗,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내면을 보아두신 이스라엘의 새 왕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삼상 16:13
마치 농부가 씨앗을 뿌리듯 사무엘은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靈)이 다윗을 크게 감동시키셨습니다. 사람이 씨앗을 뿌리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듯,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와서 이 말씀을 좀 더 심층 깊게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이 씨앗을 뿌린 후에,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자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테우데(katheude)'는 '죽음'을 의미하고, '깨다'라고 번역된 '에게이라타이(egeiretai)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비유를 단순히 파종에서 수확에까지 이르는 '한 계절'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음과 부활까지 포함한 '인생 전체'를 전제하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 전체를 통해 자라가야 하고 변화되어 가야합니다. 그 자람과 변화를 위해 우리는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훈련은 시공간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훈련'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훈련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성경의 훈련입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는데, 이 형성의 요건은 말씀을 씹고 소화시켜서 참된 양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성에서 소화되어 참된 양식이 된 말씀은 내면으로 내려와 거하며 행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둘째는 마음의 훈련 즉 기도의 훈련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내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이 단비가 내리듯 우리 안에 임재 하셔서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롬 8:15; 갈 4:6)라고 부를 수 있는 내적 힘을 갖게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 고후 5:7 표준 새 번역
그리스도인이란 존재의 바탕이 믿음인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내면을 가꾸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가꾸는 만큼 자라고 변화하는 만큼 아름다워집니다. 그 감격스러운 '자람'과 '변화'를 주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막 4:30-32
작고 작은 씨앗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의 내면에 이 씨앗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육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면을 방치해두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내면은 말씀의 씨와 성령의 은총으로 자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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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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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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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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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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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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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