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5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서신 | 로마서 14:1-10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복음 |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묵 상 | meditatio
1. 롬 14:3을 묵상하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롬 14:6-8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이 강한 자나, 믿음이 약한 자나 우리가 살아가는 대 전제는 무엇입니까?
3. 마 18:33을 묵상하십시오. 성도가 성도를 불쌍히 여기는 것의 모본은 누구입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세계의 역사와 한국사를 통틀어서 문제가 없고 이슈가 없는 시대는 없었 습니다. 대개 가치관과 관련한 이슈가 많았었는데, 한 때 진리로 여겨진 것 들이 다르게 해석될 때 역사는 늘 '과도기'라는 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중 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의 과도기를 겪으면서'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선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4:26, 27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 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대개의 경우 한 가지 이슈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 갈등을 해결 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잃는 것이 '사람'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주장이 사람을 위한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면 어찌 그것이 죄라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거기에 무슨 진정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기독교가 진리 수호를 내세워 적개심과 증오를 뿜어댄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잃는 것입니다. 그 런데 우리가 복음을 잃을 때, 대개는 말씀도 함께 잃어버립니다. 자기정당화 를 위해 여기저기 성경구절을 끌어오는 것은 결국 말씀을 오용하거나 버리 는 결과로 치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벌어지는 모든 갈등을 해결하 는 과정에서, 첫째는 복음과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할 것이고, 둘째 는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 은 로마교회 안에서 '음식'이나 '날'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들 에 대한 바울의 견해입니다. 당시 로마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연약한 자 와 믿음이 강한 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첨예하게 맞섰던 것은 바로 '절기문제'(롬 14:5)와 '음식문제'(롬 14:6)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는 말씀과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 께 있음이라"(롬 14:4)는 말씀을 통해, 소위 믿음이 강한 형제들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대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받으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먼저 가질 것을 강조합니다.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롬 14:1, 2
여기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있었는데, 오랜 논란 끝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의견이 모 아졌습니다. 당시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교회가 새로운 질서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식'과 '날'에 대한 규정을 지키고 있었습 니다. 그리고 일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유대 절기를 따르는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로마교회 안에는 이 '절기문제와 '음식문제'로 인해 파열음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 롬 14:5
어떤 이들은 유대의 거룩한 절기를 지키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절기들과 상관없이 모든 날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자기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깨달은 대로 행했더라면 문제가 없 었을 것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자'라 고 판단하고 비난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은 신앙적 정결과 상관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고기를 먹으면서 음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이들은 소위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채소만 먹으면서 고기를 먹는 사 람들을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소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롬 14:3
서로 자기 판단을 절대화해서 함부로 타인의 신앙을 비판하거나 업신여 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는 자든 먹지 않는 자든 그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 람을 사람이 감히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와 믿음의 형태가 다른 형 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는 교만이고, 하나님은 그 교만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 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 롬 14:4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인'을 등장시킵니다. 설사 그가 주권자가 아닌 하 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기 하인이 아닌 다른 이의 하인이라면 그가 마치 자기 소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판단하는 건 명백한 월권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는 주제넘은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 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 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롬 14:10
여기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의 책망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둘 다 의문 문입니다. 소위 믿음이 강하다 하는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좀 더 강한 어조로 책망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 자기 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바울은 질문형식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형제를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하나님 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갈등 안에 담긴 본질적인 문제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새 언약공동체'의 연속성, 그리고 연속성의 관점에서 정의된 교회의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 관점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한 '새 이스라엘' 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그것이 '절기'의 문제이든지 '음식'의 문제이든지 유대 적 관습들을 무조건 수용하게 될 경우, 유대 주의자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 언약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에 있어서 는 거침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 언약공 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중요한 과도기에 교회가 유대 관습을 필요 이 상으로 거부할 경우, 자칫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취된 유대인과 이방인 의 화합이 깨어지고 새로운 분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정신을 제시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 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롬 14:6
여기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주를 위하여"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이 전제는 믿음의 강약을 불문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자들이 지녀야 할 ' 신앙생활의 대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위하여"와 함께 두 번 반복되는 말씀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람의 눈에 믿음이 약한 자가 되었든, 믿음이 강한 자가 되었든,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 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 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롬 14:7, 8
바울은 여기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태도를 소극적인 면과 적 극적인 면에서 제시해 줍니다. 성도가 살아가야 할 소극적인 신앙 태도 첫 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과는 정 반대의 삶입니다. 아담의 타 락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자기중심으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 된 것이고, 자 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살아가야 할 소극적인 신앙 태도 두 번째는 '성 도는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일관 된 것입니다. 빌 1:20, 21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 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고백하며 '주님의 것으로서' 살아간 것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님을 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 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롬 14:9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선을 나보다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두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사나 죽으나 그분 것으로 죽음과 부 활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믿음이 약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보다 더 강력합니다. 단지 믿음이 약한 형제가 아닌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입니다.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마 18:21
여기에서 베드로는 용서의 횟수에 대해 아주 넉넉하게 숫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암 1:3에 의하면 당시 랍비들은 죄를 범한 이웃을 세 번 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눅 17: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 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용서는 정말 관대한 수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의 기대와 달랐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라도 할지니라 | 마 18:22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용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너에게는 용서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는 누군가를 용서하려 할 때, 마치 그 관대함이 내 인격에서 나온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는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피해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화해되지 않은 용서는 자칫 자신의 분노를 더 깊숙이 몰고 가 오히려 병만 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를 묻는 제자 베드로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마 18:23-27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진 빚은 만 달란트였습니다. 당 시 헤롯 정권의 일 년 예산이 9백 달란트였고, 갈릴리와 뵈레아 지역의 세 금 총액도 2백 달란트에 불과했다는 걸 감안하면, 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가 그렇다는 것 입니다. 본문에서 '빚진 자'로 표기된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오페일레테스 (ὀφειλὲτης)'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페일레테스'가 주기도문에서도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죄지은 자'를 뜻하는 단어인 '오페일레마(ὀφεὶλημα)' 로 쓰였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 금이 어떻게 합니까? 그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 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 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 이너도네동료를불쌍히여김이마땅하지아니하냐하고 주인이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마 18:28-34
백 데나리온은 자기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6억 원 빚을 임금에게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만원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겁니다. 그 무정함은 곧바로 그에 대한 심 판으로 이어졌습니다. 34절에 보면 빚을 탕감해 주었던 어진 임금이 매우 화가 나서 그에게 다시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둬버리고 맙니다. 도대체 무엇이 연민으로 가득했던 임금의 마음을 다시 분노로 바꾸고 만 것일까요? 그것은 이 종이 자기가 임금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자기 친구에 게 무정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 달란트 빚과 백 데나리온 빚이 다르듯이,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와 내 형제가 내게 지은 죄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만났을 때, 재빨리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 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형제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베드로에게 해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용서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그가 유혹받고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자기 관용 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믿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먼저 '그가 받은 용서'부터 헤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용서를 기 억하는 사람만이 그 경외감과 믿음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 서 사도 바울도 타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을 비 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늘 기억하 고 그 경외감에 겨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형제를 대하는 태도가 겸손 해질 것입니다. 사람도 잃지 말고, 복음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도 하나 님 것이고, 복음도 하나님 것입니다. 자칫 우리 교만함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을 훼손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받은 바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며,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 언어 하나까지 하나님 의 것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나만의 기준으로 나와 다른 형제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2. 내가 비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으신 존재임을 아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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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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