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3주 하나님의 참된 가족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8:4-20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 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 서 달릴 것이며 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 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 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 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 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응송 | 시 138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서신 | 고후 4:13-5:1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 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 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 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 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복음 | 막 3:20-35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 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 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 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 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 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3:35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 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② 삼상 8:5, 20절 묵상하십시오. 이들은 자신들이 변화되고 싶은 모 범으로 누구를 세우고 있습니까?
③ 고후 4:13, 14절 묵상하십시오. '믿음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 나님과 뜻을 같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의 '참된' 가족
오늘은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이면서, 한국 교회가 제정하고 41년째 함께 지켜오고 있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고 폭설, 폭염, 해수면 상승 등 이상기후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교회 역시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환경선교를 요구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2021년 '기독교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출범시키고, '한국교회 탄소중립 2050'을 선언한 바 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시 이듬해인 2022년 '기후위기 특별위원회'를 신설하고 '탄소중립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탄소 중립(carbon neutrality)이란 탄소 배출량과 감소량이 균형을 이루어서, 탄소의 실질 배출량이 '0(zero)'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은 주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데서 기인하는데, 화석연료란 오래 전 지구에서 살았던 식물과 동물 등 유기체가 땅속에 남아 생성된 에너지 자원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입니다. 석탄은 식물이 탄화되어서 생성된 것이고, 석유는 바다의 미생물, 동물의 사체 등이 탄화되어 생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화석연료는 이미 산업혁명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19세기 들어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내연기관이 발달하면서 사용량이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화학 산업의 발달도 사용량을 급증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화석연료가 전 세계의 에너지원으로서 인류에게 가져다준 혜택이 작지 않지만, 그 결과로 지구를 위기로 몰아넣는 기후변화의 주범이고 보면 지속할 수 있는 지구를 위해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탄소중립 운동입니다. 탄소배출은 비단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탄소를 배출하며 살아갑니다. 식생활이나, 냉난방, 여행, 출퇴근 등 일상생활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탄소발자국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그리스도인 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우리 그리스도교는 두 가지 큰 신앙적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녹색 은총에 근거한 창조신앙이고, 하나는 적색 은총에 근거한 구원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갈보리 언덕을 적신 '적색은총'에 지금껏 반응하며 신앙생활 해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근 기후위기 속에서 회자되는 '녹색은총'이란 표현이 어쩌면 낯설게 들리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적색은총'과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녹색은총' 사이의 균형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절박한 소명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적색은총이 기록된 성경이 '읽는 말씀', '듣는 말씀'이라면, 녹색은총이 담긴 창조세계는 '보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위기를 맞이한 '보는 말씀'인 창조세계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지난 3일, 98세 일기로 별세한 '위르겐 몰트만(Jϋrgen Moltmann)' 교수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 중 한 분이었고, 2차 세계대전 동안 '희망의 신학'을 주창함으로서 '희망의 신학자'로 불렸던 거장이었습니다. 그분이 생태학적 창조론에 대해 말하면서 '주체와 객체'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분'이 창조론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인식이 생태학적 창조론의 중심이다. 라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창조세계가 있기에 우리에게 창조세계는 녹색은총이 표현된 '보는 말씀'인 것이고, 따라서 창조세계에 담긴 녹색은총을 찬미하고, 지켜내야 하는 소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도 그 소명에 부응해서 2024년의 모든 연회를 '녹색연회'로 개최했고, 다가오는 총회 또한 '녹색총회'로 개최해서 생태목회, 녹색교회로 선교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가족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 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창조세계가 있듯이, 하나님 '안에' 당신이 계시고, 당신 '안에' 하나님 계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가족으로 존재하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서는 바로 그 점을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열두 제자를 세우는 이야기(막 3:13-19)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려주시는 이야기(막 4:1-12) 사이에 위치하면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막 3:33)라는 물음을 통한 '예수님의 참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전개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은 기존의 가치관을 고집하며 옛 세계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막 3:35)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도 하였다. | 막 3:20-22 표준 새 번역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돌볼 책임이 있던 당시 유대 문화에서 장남인 예수님의 행동은 다소 무책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마저 흉흉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으로 인해 어머니와 동생들의 시름은 깊어갔을 것입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은 세인들에 의한 것이었고,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는 소문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적대자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흉흉한 소문과 비방이 나도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 거기에는 군중과 예수님 일행이 뒤섞여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오는 장면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에 대한 함의(含意)가 예고된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 여겨집니다.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 막 3:31-33 표준 새 번역
우리는 예수님의 이 대답에 함의 된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혈연(血緣)으로 맺어진 형제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혈연으로 묶여있는 가족이라도 때로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同志)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이 '담론(談論'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 마디로 '관계없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들려줍니다.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 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입장의 동일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입장의 동일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 막 3:34, 35 표준 새 번역
주님은 이 말씀으로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가족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혈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 말로 참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주님의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 우리는 지금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입장의 일치입니다.성부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다면, 성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창조언어를 가장 잘 이해한 분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을 창조하셨다면, 성자 예수님은 갈릴리 자연을 걸어 다니시며 그 안의 들꽃과 새들을 관상하며 하나님 창조의 세심함을 읽어내셨습니다. 주님이 순일한 시선으로 바라보신 자연 안에 하나님의 돌봄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들의 꽃과 공중의 새를 바라보라며 권하기도 하셨습니다(마 6:26-30). 그런 입장의 동일함과 사랑의 연대(連帶)로 인해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참 가족이십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인간의 오만함이 하나님의 돌봄을 위협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가하는 폭력이며, 동시에 그분의 창조물인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동식물들에 대한 폭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폭력의 근저(根底)에는 인간중심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보존되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인간이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신 자연이고(창 1:1-25),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존재방식이 사랑이듯이, 그분들의 창조질서 안에 함께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들의 존재방식도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인간에게 피해로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그분들이 좋아하시고 사랑하신 자연이기에 우리 또한 사랑하고 좋아하며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들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존재의 완성'입니다. 존재의 완성이 어느 때 가능해집니까? 하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될 때입니다.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그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버리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읽으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의 수군거림은 주님 말씀이 걸림이 되기 때문(요 6:61)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내 뜻과 주님의 뜻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참된 가족은 내 뜻이 주님 뜻과 동일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뜻이 자기들 뜻과 다를 때, 자기들의 뜻을 우선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 삼상 8:4-5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 삼상 8:20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전환되어 가던 시기의 한 장면입니다. 사사시대를 일컬어 '12지파 종족 동맹체'라고도 했습니다. 12지파가 동맹하여 종족을 이끌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는 아직 이스라엘이 국가의 형태를 이루기 전이었습니다. 그들을 이끌던 지도자를 '사사(士師)'라고 불렀는데, 70인역(LXX) 성서는 사사를 '크리타이(χριταί)' 즉 '재판관'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원문에는 '샤파트(טפשׁ)'라고 되어 있어서 '재판관'이란 뜻뿐 아니라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삿 12:11절에 보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사들이 한때 이스라엘을 다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죽은 때(삿 1:1)를 기점으로 블레셋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던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올바른 판단력과 정직한 마음으로(시 72:1) 주의 백성과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재판했을 뿐 아니라(시 72:2) 곤고한 자들의 해방을 위한 다스림을 펼쳤습니다(신 10:16-18).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전제군주 체제에서 히브리들이 겪었던 억압을 고려해서 사사들에게 왕권과 같은 권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직능 범위는 군사와 재판 등에 한정되어 있었고, 주변 나라들이 침입해 오면 동맹 평의회 안에서 협의해 전쟁을 치르고, 다시 농부로 돌아가 평등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구성체와 사사들에 의한 분권(分權) 체제가 백성들이 체감하기에는 '다른 나라들' 즉 '강력한 왕권으로 이끌어가는 나라들'에 비해 발전이 더딘 요인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실제 지파 동맹체로서의 이스라엘이 아직 청동기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변 나라들은 이미 청동기시대를 끝내고 구(舊) 철기시대를 막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을 위시한 고대근동의 나라들은 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가나안 옛 지배자들은 철 병거 구백 대를 동원해 이스라엘을 이십 년 동안 억압하고 있었습니다(삿 4:3). 훗날 바울과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에 참패를 당해 전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청동무기가 철 무기를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구하는데(삼상 8:4, 5), 점점 이 요구가 백성 전체의 요구로 확대되는 양상으로 치닫습니다(삼상 8:7, 10, 19, 21, 22). 하지만 이때 이스라엘의 장로와 백성들이 요구한 왕은 사사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왕의 기준은 오로지 '다른 나라의 왕과 같은 왕'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느새 주변 강대국을 동경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나라가 아닌 강력한 왕권으로 이루어지는 부자나라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를 바꾸어서 보면 이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고 지키며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도"(삼상 8:5) 혹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삼상 8:20) 라며 하나님을 배제한 발전을 꿈꾸고 있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파괴되는 건 안타깝지만 발전과 편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다른 나라처럼' 혹은 '다른 사람처럼' 살아버리려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아버지와 한 가족이라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은 우리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전반에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고 또 요구되고 있지만, 환경주일을 맞아 생각해 보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고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습니다. 에너지 고갈과 기후붕괴,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 사막화와 종(種)의 멸종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위협받는 것을 하나님 자녀로서 안타까워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삶의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당부하실까요? 실천 가능한 것부터 헤아려봐야 하겠습니다.
1. 버스, 지하철 등 공공교통 혹은 자전거 이용하기.
2.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오래 사용하기
3. 적정한 냉난방 유지해서 탄소 배출 줄이기
4. 옷 생산, 유통, 소비, 폐기 과정에서 상당량의 탄소가 발생함으로
안 입는 옷은 바꿔 입고 수선과 리폼 생활화하기.
5. 일회용품 최소화하고 다회용품 사용하기(개인 컵, 포장음식 그릇 등).
6. 교회 부서별로 녹색교회 상상하고 실천계획 세우기.
7. 전기 절약해서 이산화탄소 저감시키기 - 하루 1시간 동안 6개의 형광등을 소등하면 연간 15kg의 이산화탄소 저감효과가 있습니다.
8. 흐르는 물 사용할 때 수도꼭지 수압 조절하고 물은 반드시 받 아서 사용하고 재활용하기.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고후 4:14, 15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주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질서 있게 보호되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면, 하나님과 입장의 동일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입장을 같이 하는 하나님의 참 가족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함께 사랑하고 돌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하나님과 다른 생각과 뜻을 고집하고 있지 않는가?
② 하나님과 뜻을 함께 하는 하나님의 참된 가족인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