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주 평신도, 하나님의 자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신 5:12-15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 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 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응송 | 시 81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서신 | 고후 4:5-12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 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 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 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 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복음 | 막 2:23-3:6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 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 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 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 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 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 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 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 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신 5:13-15을 묵상하십시오.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남종과 여종과 가축과 객까지 쉬게 하라는 하나님 뜻은 무엇입니까?
② 막 2:27을 묵상하십시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 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③ 고후 4:6, 7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간직한 '질그롯'으로서 시대 속에서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평신도, 하나님의 자녀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이자 1979년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제정한 평신도주일입니다. 과거 교회사 안에서 평신도들이 지니고 있는 위치와 책임에 대한 문헌들이 가끔 발표되기는 했지만, 신학적 중요성이나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게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가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바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은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그렇고, 다음은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기 위해 그렇습니다. 평신도를 의미하는 단어 레이(lay)는 그리스어 '라이코스(λαϊκός)'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변한 것이 '라이쿠스(laicus)'인데, 신구약 성경에서 공히 언급하는 '라오스(laos)' 즉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평신도란 단지 목회자와 구분하기 위한 상대적인 호칭이 아니라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위해 선택을 받은 것일까요? 우선은 영적 성숙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함이고, 다음은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교사로서 평신도 운동에 삶을 바쳤던 핸드릭 크레머 박사는 '평신도 신학'에서 평신도들이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후 가져야 할 사명으로 가장 먼저 선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는 선교이다(the church is mission)'라며 교회로서의 평신도 존재 이유를 선교에서 찾았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교회는 교직이다(the church is ministry)'라며 교회로서의 평신도 존재 이유를 '그리스도 증거'에서 찾았고, 그 다음으로는 '교회는 봉사이다(the church is diakonia)'라며 교회로서의 평신도 존재 이유를 '봉사'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교회로서의 평신도들이 실천해야 할 선교와 교직과 봉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평신도는 선교와 교직과 봉사에 나서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들은 각 시대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세인의 공감을 얻어내는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교우들과 이웃에게 스트레스를 끼치는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 대표적인 예가 율법입니다. 본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그 율법을 자기 권력유지의 도구로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힘이 없는 사람들은 율법에 의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성서일과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시대정신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현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은 율법이 본래의 법정신을 상실하고 말았을 때, 그것이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는 표현과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담아주신 진리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 신 5:12-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는 장면인데, 이 율법 안에는 계약법전과 신명기법전, 정결법전, 제사법전 등이 담겨있었고, 이 모든 율법의 종지(宗旨) 즉 율법의 근본정신으로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십계명의 버전이 출 34:17-26; 신 27:15-26; 레 19:1-4절 등 많지만, 그 중에서 출 20:1-17절과 오늘 구약의 말씀이 담긴 신 5:1-21절이 십계명의 전승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두 기록은 거의 동일한데 딱 한 군데가 다릅니다. 바로 제4 계명인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이렇게 정리되어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이 말씀 안에는 안식일의 제의적인 의미가 보다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오늘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 신 5:15
이 말씀에는 안식일의 제의적인 의미보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너희를 위해 만든 날이니, 안식일에는 마음 놓고 쉬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 직후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해석과, 출애굽한 지 40년이 지난 후 십계명의 해석이 다소간 달라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일정량 재해석이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본디 재해석이라는 것은, 그 율법이 선포되던 당시 율법의 본래 법정신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이해하고, 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종교지도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들은 율법의 본래 정신을 훼손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견고하게 다져가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 폐해가 어느 한 시대를 거치며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오늘 복음서의 장면입니다.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막 2:23-28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2장 전체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2장을 관통하는 주제는 '예수님과 율법과의 충돌'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반발하면서(막 2:1-12) 점화된 갈등이, 레위라고 불리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일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4-16) 라며 트집을 잡으면서 점차 가열되다가,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라시며 반박하시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이어서 '금식'을 주제로 한 논쟁이 있은 후에(막 2:18-22), 오늘 복음서의 사건이 연달아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 준수'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을 빚어가던 예민한 시기에 하필이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 2:24) 라며 바리새인들의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시며 인간의 존엄성이 법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주님은 다윗이, 도망 중에 굶주렸을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던 일(삼상 21:1-6, 막 2:25, 26)을 예로 드시면서, 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법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이 안식일 논쟁을 더 확대해 나갑니다.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 막 3:1-6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이 사건이 2장의 안식일 논쟁과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직 안식일이 지나지 않은 시간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한쪽 손이 말라 오그라 들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방금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임에도' 그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불편보다, 예수의 허물을 입증해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섬뜩한 시선을 모르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기꺼이 들어가신 겁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 주님은 법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셔서 그것이 함정임에도 불구하고 고쳐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런 예수님과, 이미 옳고 그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에만 온통 마음이 몰두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며 '참된 율법이란 무엇인가?' 묻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해보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선입견에 보다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대해 '아무 것도 안 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行)'하는 '일'과 악을 행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안식일은 일 안 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관념에 대해, 오히려 안식일은 '일하는 날'임을 역설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율법의 관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입니다. '일 안 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식'이 아니라, '일 함으로써 얻는 안식'이 보다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라는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안식일 준수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근원적인 물음, 즉 '그 일이 어떤 일이냐'는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의 말씀은 만약 그 일이 악한 일이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건 안식일이 아니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이 선한 일이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비록 안식일이라 해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평온한 얼굴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막 3:5)고 마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마음이 악했다는 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고의로 외면했기 때문입니다.도덕경 12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색(色)으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음(音)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된다." 우리가 감각적이요 외면적인 가치에 탐닉해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입맛마저 고약해지면, 이런 현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도(道)'에서 우리의 관심을 멀게 하는 족쇄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감각적이요 외면적인 가치에 탐닉해 눈멀고, 귀먹고, 입맛마저 고약해져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더 완악해져갈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에 일어서게(막 3:3) 하신 후 "네 손을 내밀라"(막 3:5)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당신께서 하신 물음에 대해 주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심으로서 스스로 대답을 주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고후 4:6, 7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 그 빛으로 혼돈과 공허를 물리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 빛'을 '질그릇' 즉 '나의 마음에 담은'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똑같이 마음에 담긴 것으로 어떤 사람은 세상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에 고통과 스트레스를 줍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 말씀은 한 시대 속에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분노를 사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칭찬을 사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연민을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과연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일까요?■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이기적인 의도에 따라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대로 시대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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