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 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 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 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 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응송 | 시 2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서신 | 롬 8:12-17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 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 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 야 할 것이니라
복음 | 요 3:1-17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 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 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3:3, 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의 또 다른 표현을 어떻게 설명하시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② 롬 8:14-16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의 신분은 어떻게 변화되며, 그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③ 사 6:1-5을 묵상하십시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스랍 들의 합창소리를 들은 이사야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주이자 삼위일체주일이고, 요한 웨슬리 회심 286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주일은 교회력에 있어서 종합적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구원 역사의 세 차원으로 우리 모두를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역사의 세 차원이란 다름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차원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역하셨듯이 죽음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원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해왔는데, 그 중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라든지 '위르겐 몰트만'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헤겔의 삼위일체론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셋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고백은 인간 이성으로는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많은 논쟁과 이단 시비를 불러오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믿음의 고백과 영의 시선 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은총이 찬미되어 왔습니다. 헤겔의 삼위일체 하나님 고백에 따르면 성(聖) 삼위께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격(位格)과 인격성은 '홀로 그러나 함께' 즉 '하나 안에서 삼중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독립적인 주체이시지만, 그러나 다른 위격 안에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성이고, 그 인격성의 근저(根柢)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사랑이란 일반적으로 타자와 내가 통일되어 있다고 믿는 의식(意識)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나의 자의식이 오직 나의 독자성을 포기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와 타자, 타자와 나의 통일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둘 사이의 구별이며 구별된 둘이 서로에 대해 여전히 구별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나의 의식을 내 안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타자 안에서 갖는다. 반면 타자는 그의 자기의식을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 안에서만 갖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라는 고백과 같다.
이렇게 헤겔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인격적 관계는 사랑으로 표현되고, 사랑에 의해 세 인격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독립성과 동시에 자기 부정성을 낳는데, 그렇듯 삼위일체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은 통일과 협동을 낳습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의 상호성과 상호 종속성은 그들의 신성 수행을 통하여 드러난다.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는 창조 세계에서 형태를 가지며, 아들은 아버지의 사자로서 영화롭게 되며, 결과적으로 아버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렇게 사랑으로 연대하고 사역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차원에서 구원사역을 보지 않으면, 자칫 무한히 크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단편적으로 접하게 되어 그 본질적인 틀에서 벗어날 위험이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의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파스카(Pascha) 신비' 즉 '구원의 은총'은 이 구원 은총의 원초적 근원을 알 때만 비로소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구원 은총의 원초적 근원은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처음 창조로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과 생명의 순환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원천에서부터 출발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루신 파스카 은총'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원천에서 인류의 구원사건이 흘러내렸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바로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롬 8:12-14
이 말씀에는 바울의 인간론을 함축하는 영(靈), 육(肉), 몸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용어들은 바울 자신의 독자적 개념이 아니고, 플라톤을 비롯한 헬라철학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플라톤이 인간을 '영혼과 육체'라는 이원론으로 분석해서 영혼을 불멸하는 인간의 요소로, 육체를 죽음과 함께 소멸하는 요소로 본 것과 달리, 인간의 육체는 무가치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일치될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란 주기도문에 따르면 죄지은 자를 뜻하는데, 갚을 수 없던 우리의 큰 죄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탕감을 받았습니다. 사함 받을 수 없던 큰 죄를 탕감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때,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 인해 죽은 나를 살리는 사역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나섰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도 구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 중 어느 한 분만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도 그렇습니다.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 요 3:1, 2a
당시 산헤드린은 유대인의 최고 종교회의 기관으로 고위 종교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산헤드린의 고위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친히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이 밤이었다고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두 번 언급하는데(요 3:2, 19:39), 그가 굳이 밤에 예수님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로 상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룟 유다는 '밤에' 예수님을 떠남으로써 빛으로부터 사단에게로 함몰되어갔습니다. 반면 니고데모는 '밤에'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왔다는 측면에서 유다와 대비(對比)를 이룹니다. 물론 아직 그의 영적 상태는 어둠이 완전히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b) 라는 그의 인사말에서 당시 유대교인들의 내면을 지배하던 신앙관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표적(表蹟 Sign)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요 4:48; 고전 1:22). 그들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밤은 영혼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둠을 이기고 주님을 찾아나선 니고데모의 구도자적 자세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해주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
표적에 기댄 니고데모의 신앙관에 예수님은 '거듭남'을 화두(話頭)로 던져주십니다. 표적과 거듭남에는 매우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표적'이 사람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면 '거듭남'은 사람 안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표적'이 육신적 현상이라면 '거듭남'은 영적 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가져야 될 관심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입니다. 천지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었듯이, 거듭남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듭남을 말씀하시자 니고데모가 놀라서 이렇게 반응합니다.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요 3:4
니고데모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내면의 변화에 관심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라, 외적 조건에 반응하며 살아온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여정에서, 그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힘이 있는데, 내면의 두려움과 저항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들 즉 지금껏 쌓아온 지식이라든지 경험이라든지 사회적 지위나 감정의 세계 같은 그간 쌓아온 '아성(牙城)'의 저항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아성을 자기 실존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기제들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현실적인 힘인데, 이러한 힘은 때로는 자기 갈망으로 때로는 자기 강화에 대한 집착으로 표출됩니다. 사실 이 니고데모의 문제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 3:5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니고데모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해 주시는데, 그 새로운 차원의 핵심은 '물'과 '성령'입니다. 물에 대한 여러 가지 엇갈린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세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복음서에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 항상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26). 물은 항상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물세례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겉으로만 깨끗함을 받고 중심은 전혀 새로워지지 못한 그런 변화가 아닌 마음에 물을 뿌리고, 영이 새로워지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 요 3:6-8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따름입니다. 위로부터 바람이 불어와야 했습니다. '거듭난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ἄνωθεν)'의 문자적 의미는 '다시' 또는 '위로부터'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거듭남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물세례가 외형적이요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라면, 성령세례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구원 경험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와 사역을 봅니다. 이 구원의 사건은 '위로부터'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셨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표현해주신 것입니다.1738년 5월24일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그날 저녁에 있을 일을 암시하는 듯한 성경구절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날 저녁 웨슬리는 런던의 성 바울 교회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찬양대가 푸셀의 깊은 영감이 있는 찬양곡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찬양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이 교차하는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 웨슬리는 죄짓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여전히 죄를 섬기고 있었고, 계속되는 영적 싸움에서 패배해 죄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런 자신을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날 저녁 내키지는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8시45분경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설명했었는데, 그때 마음이 이상하게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다 거두어 가시고, 자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 세 요인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였지만, 웨슬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신비한 은총으로 드러낸 계시적 사건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변화가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 은총을 경험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자아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경험을 했던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에 압도되어 자기 의를 내려놓은 사람,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사 6:1-3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엄에 대한 문학적 묘사이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말 역시 하나님의 존엄이 성전에 가득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수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스랍들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에 따르면 이 때,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다고 합니다(사 6:4). 만약 우리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사 6:5
우리 모두는 이 경외감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경외감, 이 경외감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동안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던 '자기 아성'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참된 성전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그로 인한 행복도 얻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선 경외감과 행복, 그 감격스럽고 황홀한 은총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스스로 쌓아 온 지식과 경험들이 영적 성숙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②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나를 진정으로 엎드리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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