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사도행전 | 행 4:5-12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 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 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서신 | 요일 3:16-24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 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 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 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 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복음 | 요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 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11-15절을 묵상하십시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② 행 4:8-10절 묵상하십시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③ 요일 3:16-17, 23-24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양으로 사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구약시대의 한 목자가 풀밭에서 양떼를 돌보던 중에 믿음의 눈이 열려서, 영적 세계의 목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양인 자신을 보며 감격에 겨워 쓴 시가 시편 23편입니다. 그 목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시편 23편을 읽다 보면, 양의 습성을 잘 파악해 돌보아 주는 목자의 사랑이 행간마다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봅니다. 반면에 도시의 인위적인 환경에서 사는 우리는 땅과 농작물, 그리고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과 친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전해주는 진리의 많은 부분을 표면적으로 건조하게 인식하고 신앙에 적용할 때가 많습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랫동안 양떼를 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필립 켈러(Phillip Keller)의 '양과 목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중동 지역의 목자들과 비슷한 관습을 지닌 동아프리카의 소박한 목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직접 양을 치는 일로 손이 거칠어졌고, 목자의 낭만과 비애를 잘 알뿐 아니라, 자신도 다윗처럼 영적세계의 목자와 양떼에 대한 찬미와 애정이 담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부르기로 하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양과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데, 두려움과 소심함도 비슷하지만, 완고함과 어리석음도 비슷하고, 군중심리와 비뚤어진 습관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좋지 않은 특성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피와 목숨이라는 엄청난 값을 치르고 자기를 사셨고, 당신 소유로 삼으셨기에 주님은 자신의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를 돌보기를 기뻐하시고, 자기생명을 주장할 권리까지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그는 매일 감동한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선언하십니다.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 10:11
'선한목자 강화(the Good Shepherd Discourse)'라고 불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시며, '삯꾼'과 당신을 극단적으로 비교하십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선한 목자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으로 묘사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심판에 처해질 악한 목자와 대조되어 묘사되었었고(렘 23:1-4;3:15;슥 11:4-17 등), 다윗도 자주 선한 목자로 불려는가 하면(삼하 5:2;시 78:70-72;겔 37:24;미 5:4 등), 모세도 양무리의 목자로 묘사되곤 했었습니다(사 63:11;출 3:1). 그런데 주님 말씀에 의하면 선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실제 다윗은 목자이던 소년시절 자기가 치는 양을 위해 목숨을 걸었었고(삼상 17:34-37). 메시아의 자기희생이 암시된 사 53:12; 슥 12:10절 등의 예언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메시아 사역이 양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선한 목자로서의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요 10:1-21은 선한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긴 담화의 결론으로 요한의 신학사상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데, 선한 목자를 설명하는 길지 않은 구절 안에서 주님은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심으로 당신 죽음의 성격에 대해 암시해 주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요강(Compendium Theologiae)'에서 "왜 그리스도는 죽기를 원했는가"라고 물은 후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목적 때문에, 즉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겪기를 원했다. 그는 원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했던 일들을 우리를 위해 겪으셨다. 그것들 중에 중요한 것은 죽음인데, 죄의 대가는 죽음이었기에(롬 6:23) 그리스도는 죽음을 겪기를 원하셨다. 이는 그 자신이 우리에게 마땅한 벌을 '죄악 없이' 수용함으로써 우리를 죽음이라는 처형 상태로부터 해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하신 주님 말씀은 더 감동적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랑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극단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죽어서 살리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양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양을 살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님 죽음의 이유를 또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 단지 우리에게 대속의 치유가 될 뿐 아니라 구원의 성사(salutis sacramentum)가 되기 위해 죽기를 원했다. 그의 죽음과 비슷하게 우리도 육신의 삶에서 죽고 영적인 삶으로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벧전 3:18절 공동번역)"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소멸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손상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육신을 죽음에 넘겨주심으로써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완전한 애덕의 모범이 되기 위해 죽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손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오늘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당부와 잘 연결됩니다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 요 10:18
여기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어떤 계명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계명'을 헬라어로 '엔톨레(ἐντολή)'라고 하는데 대개 '책무' 혹은 '의무'라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어떤 책무를 받으셨는데, 그것은 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책무를 주시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요 13:34).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주님이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책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 책무를 아버지에게서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0:18). 즉 주님의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인 동시에 당신의 양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다름이나 모름이 조금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인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성부와 성자처럼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상관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는 정말 안 변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보다 자기감정이나 욕망에 더 충실하고, 주님의 마음을 닮기보다 제 기질대로 살아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죽음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교회는 사람이 변화되는 곳입니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듯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어, 기질과 가치관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내가 안 변하고 있다면 이유는 한 가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 10:14, 15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필립 켈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양의 특징인 두려움과 소심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고함과 어리석음에서도 양을 닮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돌봄을 거절하고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을 마치 폭군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삯꾼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삯꾼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 요 10:12
삯꾼은 선한 목자와는 대조되게 이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양떼를 버리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교 문헌에는 하나님께서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지도자들, 그래서 양들이 공격에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책망이 많이 나타납니다. 렘 10:21절에서는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라고 책망하시고, 슥 10:2-3절에서는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역경에서 자기 양을 버리는 삯꾼의 모습은 예수님 시대에도 흔했습니다. 필립 켈러는 '양과 목자'에서 자신은 삯을 받고 일하는 목자가 돌보던 목장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서 그의 양떼는 항상 뼈만 앙상하고 쇠약했으며, 질병이나 기생충의 감염으로 만신창이인채로 거듭 울타리로 와서 철조망 사이로 자기의 양떼가 즐기는 푸른 풀밭을 바라보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만일 그 양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오, 제발 이 지독한 주인에게서 해방되었으면!"하고 말했을 것이라며, "그 양들의 모습이 바로 선한 목자에게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죄와 사탄 아래 고통 받는 온 세상 사람들의 가련한 모습이다"라고 했습니다. 크레이그 키너에 따르면,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얼마나 자기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느냐의 차이였으며, 요한복음 11장과 12장으로 연결되는 고리로 미루어 삯꾼은 추정컨대, 예수님과(요 11:46-53)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까지(요 12:10-11) 죽이려고 모의한 유대 엘리트들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리와 아예 결탁한 삯꾼이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운명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분이 세상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입니다. 거짓된 신앙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주님을 닮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선한 목자의 희생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며, 그것보다 더 선한 목자를 보람 있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욕망들을 그리스도 안에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우리 모두의 죽음도 주님처럼 아버지 뜻에 순종(順從)하는 죽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삶을 진지하게 하나님께 드리다가 마침내 내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죽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냥 생명의 기운이 다해서 죽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영원을 맡기는 순종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살기 위해 죽고,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그런 죽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 목숨으로 사랑하실 대상을 더 확대하십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요 10:16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양 우리'의 문을 열어서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받아들이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양 우리 안에 들지 못하고 들녘을 방황하는 양무리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향해 주님의 말씀을 들려준다면, 주님의 죽으심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의 양이 되어 구원의 '우리 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오늘 사도행전에서 심지어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게까지 간곡하게 외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행 4:10-12
지금 베드로는 병자를 낫게 해 주고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행 4:2)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했다는 이유로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공회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통스러운 장소에서조차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증언을 통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 안으로 심지어 예수를 죽인 사람들마저 초청합니다. 이렇듯 선한 목자의 죽음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바로 그 죽음의 이유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 요일 3:16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요일 3:23, 24
요한이 비로소 사랑이란 걸 알게 되고, 따라서 자신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 버리신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한도 가지고 계셨지만(요 10:18), 당신의 의지로서 죽음을 감당하심으로서 양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절 넷째 주일인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면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이 정확하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4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조차도 영원한 하나님과의 기쁨의 세계를 향해 가는 잠시 잠깐의 음침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라면 그 골짜기는 두려워하며 피해야 할 골짜기가 아니라, 보다 완전한 생명을 향해 찬송하며 걸어야 할 '대로(大路)'입니다. 필립 켈러는 아내의 죽음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내의 손을 쥐고 침대 머리맡에 앉았고, 조용히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났다'며, 우리 둘은 고요한 중에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두려움은 없었으며, 아내는 목자와 함께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뿐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목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아는 '아심'은 이렇듯 음침한 골짜기의 두려움이 클수록 더 섬세하며 애틋한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추상으로도, 관념으로도, 이론으로도 말고, 신학으로도, 교리로서도, 습관으로도 말고, 지금, 여기에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매일매일 푸른 풀밭에서 싱싱한 꼴을 뜯으며, 쉴만한 물가에서 영혼의 쉼을 얻을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찬송하며 걸어가고, 그 황홀한 여정에 이웃과 형제도 초청해서 함께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두려워하고 소심하며, 어리석은 양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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