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0주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7-09-17 12:07
조회
1318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엡 2:14~18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기 도 |Oratio |5-10분
■ 묵상 나눔
결국 율법이나 죄의 공통점은 모두가 평화를 깨는 장벽이라는 것입니 다. "율법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쁜 것인데, 왜 똑같이 평화를 막는 장벽 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나 오는 율법을 보면 율법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 가르침대로 살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 이게 바로 구약의 중심 역사관인 신명기사관 입니다. 그러나 죄는 어떻습니까? 죄는 인간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하나 님을 거역하고 이웃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율법은 선이고 죄는 악입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의 로마서에 따르면 율법이 유 대인들에 의해서 오히려 죄인을 양산하는 쪽으로 악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롬 7:8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의 참정신을망각한채타인에게강요하는행동이나,그율법을지키지못 함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나,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원죄인 자기중 심성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의한 자만심도, 죄 로 인한 열등감도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니 율법으로 인한 우월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 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지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송나라(960-1279) 때 한 여인은 남편의 사랑이 점점 소멸되는 것을 느 끼며, 남편에게 이런 시(詩)를 지어서 바쳤습니다. "한 덩이 진흙으로 / 당 신의 입상(立像) 만들고 / 나의 입상도 만들고 / 당신의 입상, 나의 입상 / 으깨어 합쳐 / 다른 진흙덩이 만들고 / 이 흙덩이로 다시 / 당신 입상 만들고 / 나의 입상 만들어요 / 이제야 / 당신이 내 안에 / 내가 당신 안 에" 느낌이 절절하지 않습니까? 으깨어 합쳐져 다시 한 덩이가 되고, 다시 빚어지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저의설교가많은분들마음에그리달갑지않을수도있다는생각을 합니다. 여전이 이념적으로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고, 전쟁 때 주고받은 상처들이현존하고있는데,으깨어합쳐져다시한덩이가되자는게속 모르는 이상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들으실 필요 가 없습니다. 단지 성경 말씀에만 마음을 여시면 됩니다. "그는 우리의 화 평이신지라둘로하나를만드사원수된것곧중간에막힌담을자기육 체로 허시고"(엡 2:14)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 노력을 우리 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념적으로는 불가 능하지만 우리가 죽도록 사랑하는 주님께서 평화 하라시니, 우리도 한 번 절절한 마음이 되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 작가로 잘 알려진 노희경의 책 중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 두 유죄'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녀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나?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 세상의 외로 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나?"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를 줍니다. 그녀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 이 빠져 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 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 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 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 자르듯 끝을 맺었고,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한 여자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음엔 자 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정신을 주 었습니다. 그녀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 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주고도 그녀는 쓰 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는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 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노희 경 작가의 말처럼, 예수를 죽도록 까지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손 해 보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께 나와 타인을 완전히 맡기지 못하고, 영리한 척 나를 지키겠다며 실제로는 평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72년이 흘렀는데도 남과 북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서 한민족이 유일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민족입니다. 저는 분단의 책임이 누군지, 지금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정치인들이 자기의 입장에서 주장할 문제입니다. 저 는 오늘 바울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예수 정신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로만 본다면 정말 허황된 꿈같 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이루시는 그 평화를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삼천리반도 이 땅에 진정 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어느 순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이미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수 같 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나를 버 리니, 그가 오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에 목숨을 걸고 나를 버 리면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으로 내게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 두에게 평화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나를 버려 주님을 얻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대로 평화를 일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주관적인 이념과 증오로 인해 평화를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2. 평화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실천하고 있는가?
■ 읽기|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엡 2:14~18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기 도 |Oratio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0주이자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 니다. 살아온 삶의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품 넓으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습니다. 예배는 영혼의 심호흡이라는데, 이 짧은 시간, 영과 진리 로 예배하며 하나님의 숨결로 우리 몸과 영혼을 채우고, 새로운 존재로 소생할수있기를바랍니다.그러면우리도품넓으신하나님처럼혹은알거 나 혹은 모르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정진규 시인 의 시집 '몸詩 14'에 보면 자기 알몸을 열어 보이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던 시인이 어느 순간 진달래꽃의 심정에 동화되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우리의 삶은 이처럼 누군가를 향한 초대여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요즘 우 리의 삶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자꾸 옹색해져 가는 느낌입니다. 너무 분주 해서, 혹은 자기 생각이 깊어서 다른 이를 생각할 마음의 여백이 없습니 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환대하며 살기보다는 겹겹이 담을 쌓으며 살아 가는 모습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엡 2:14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 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구절이 마치 빛바랜 사랑처럼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 른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 다. 현대사회는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 하면서도 정작 속으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평화가 아닌 경쟁과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 다. 그러다보니 평화는 그저 관념에 머무를 뿐이고, 영리하게 자기를 지키 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다 보면 바울은 우리와 많이 달랐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는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큰둥한 가치가 아니 라,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 신앙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해야만 했고, 이 신앙 고백을 통해 자신을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초대 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원수', '중간에 막힌 담'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 그대로 정말 초기 기독교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처럼 지냈고, 그들 사이 에는 담이 높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시기 위해서 이방인을 만들었다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서 이방인은 척결해야 할 원수이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었 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이방인들에 대해서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유는 많습니다. 마치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우린 한민족이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없는 것처럼, 주변의 이방 제국들에게 식민 지 배를 받은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품을 수가 없었습 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상처와 상관없이 그들의 배타주 의가 그저 거슬리기만 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 니스의 상인'에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유대 인이었습니다. 중세기까지도 이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 사람들의 증오가 어 땠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구체적인 이유 없이 유대인들을 증 오하는 반유대주의는 현대 세계사를 엄청난 비극으로 몰고 갔습니다. 히틀 러가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상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유럽 사람들의 이런 반유대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 방인 사이의 이러한 반목과 대립과 증오의 역사는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심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 을 제외하고는 성전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왕래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초기 기 독교 시대부터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대 인과 이방인이 각기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직접 다툴 일들이 별로 없었지만 초기 기독교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사정이 완전히 달 라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신앙생활 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차에 아무리 조심해도 곳곳에서 불편한 일들이 벌 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간단히 해결되 는 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갈등이 초 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 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행 6:1-7
표면적으로 이 기사를 보면 예루살렘 공동체가 사도들의 업무 분담을 위해 일곱 명의 집사를 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건은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열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 다.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유대가 아닌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로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출생한 사람들로 히브리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들은 항상 정통성을 주장하는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번번이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구제에서도 헬라파 과부들은 항상 배제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갈등은 초대교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따르면 그 여파가 안디옥 교회에까지 미쳤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의 대표였 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기독교인들이 먼저 그들에게 시 비를 걸었습니다.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 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 행 15:1
"너희도 구원을 받고 싶으면 우리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결국 이들의 말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방인 기독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소하게는 과부들 의 구제에 관한 문제로부터 중요하게는 구원론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 요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할례가 신앙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태어나서부 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좋게는 학습효과이고, 나쁘게는 세뇌를 당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종교 형식이나 정치 이념에서 한 번 어느 한쪽으로 굳어지면, 그 때부터는 여간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한 번 생각이 보수적으로 굳어진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을 철없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게 되고, 진보적으로 그 사고가 굳어진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을 상대하기 싫은 고집불통으로 생각합니다. 유대인과 이방 인 사이에 바로 그런 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과 할례로 인해 오히려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옳은 것이라도 그것이 강요가 될 때는 듣는 사람이 질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담은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 에도 높은 담이 있습니다. 그 담은 바로 우리의 죄가 쌓은 것입니다.결국 율법이나 죄의 공통점은 모두가 평화를 깨는 장벽이라는 것입니 다. "율법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쁜 것인데, 왜 똑같이 평화를 막는 장벽 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나 오는 율법을 보면 율법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 가르침대로 살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 이게 바로 구약의 중심 역사관인 신명기사관 입니다. 그러나 죄는 어떻습니까? 죄는 인간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하나 님을 거역하고 이웃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율법은 선이고 죄는 악입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의 로마서에 따르면 율법이 유 대인들에 의해서 오히려 죄인을 양산하는 쪽으로 악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롬 7:8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의 참정신을망각한채타인에게강요하는행동이나,그율법을지키지못 함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나,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원죄인 자기중 심성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의한 자만심도, 죄 로 인한 열등감도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니 율법으로 인한 우월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 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지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엡 2:14, 15
여기서 주님은 담을 허무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 의 행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경계선 가로지르기'라고 말합니다. 남성 과 여성,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주님은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 며 소통의 공간을 만드십니다. 주님은 온몸으로 사람들 사이에 틈을 만들 고, 그 사이에 평화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 되게 하시 는 분'이십니다. 거기에 주님 사역의 본질과 진실이 있습니다. 죄는 나누 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증오는 파괴하지만 사랑은 세워줍니다. 세상 은 갈기갈기 찢겨 있습니다. 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 한반도가 있습니다. 최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 한이 더는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화염 과 분노'에 휩싸일 거라고 말하자, 북한은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4발 을 동시 발사해서 괌을 포위사격 하겠다고 맞섰습니다. 북미간 한치의 양 보 없는 기싸움 속에서 몇몇 언론들은 '8월 위기설'과 '한반도 전쟁설'을 조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 4:23-24)라고 자랑했던 라 멕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그런 미움과 증오의 시대를 사랑과 신뢰로서 극복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송나라(960-1279) 때 한 여인은 남편의 사랑이 점점 소멸되는 것을 느 끼며, 남편에게 이런 시(詩)를 지어서 바쳤습니다. "한 덩이 진흙으로 / 당 신의 입상(立像) 만들고 / 나의 입상도 만들고 / 당신의 입상, 나의 입상 / 으깨어 합쳐 / 다른 진흙덩이 만들고 / 이 흙덩이로 다시 / 당신 입상 만들고 / 나의 입상 만들어요 / 이제야 / 당신이 내 안에 / 내가 당신 안 에" 느낌이 절절하지 않습니까? 으깨어 합쳐져 다시 한 덩이가 되고, 다시 빚어지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저의설교가많은분들마음에그리달갑지않을수도있다는생각을 합니다. 여전이 이념적으로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고, 전쟁 때 주고받은 상처들이현존하고있는데,으깨어합쳐져다시한덩이가되자는게속 모르는 이상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제 말을 들으실 필요 가 없습니다. 단지 성경 말씀에만 마음을 여시면 됩니다. "그는 우리의 화 평이신지라둘로하나를만드사원수된것곧중간에막힌담을자기육 체로 허시고"(엡 2:14)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 노력을 우리 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념적으로는 불가 능하지만 우리가 죽도록 사랑하는 주님께서 평화 하라시니, 우리도 한 번 절절한 마음이 되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 작가로 잘 알려진 노희경의 책 중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 두 유죄'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녀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나?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 세상의 외로 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나?"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를 줍니다. 그녀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 이 빠져 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 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 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 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 자르듯 끝을 맺었고,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한 여자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음엔 자 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정신을 주 었습니다. 그녀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 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주고도 그녀는 쓰 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는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 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노희 경 작가의 말처럼, 예수를 죽도록 까지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손 해 보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께 나와 타인을 완전히 맡기지 못하고, 영리한 척 나를 지키겠다며 실제로는 평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72년이 흘렀는데도 남과 북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서 한민족이 유일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민족입니다. 저는 분단의 책임이 누군지, 지금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정치인들이 자기의 입장에서 주장할 문제입니다. 저 는 오늘 바울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예수 정신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로만 본다면 정말 허황된 꿈같 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이루시는 그 평화를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삼천리반도 이 땅에 진정 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어느 순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이미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수 같 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나를 버 리니, 그가 오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에 목숨을 걸고 나를 버 리면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으로 내게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 두에게 평화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나를 버려 주님을 얻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대로 평화를 일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주관적인 이념과 증오로 인해 평화를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2. 평화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실천하고 있는가?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