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9주 하나님과 홀로 있음의 영성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32:22-31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응송 | 시편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서신 | 로마서 9:1-3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복음 | 마 14:13-14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1. 창 32:24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시작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2. 마 14: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를 향 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3. 롬 9: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누구 때 문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9:4, 32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과 홀로 있음'의 영성
베네딕도의 수도자인 '존 메인'이 쓰고 분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침묵으 로 이끄는 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존 메인이 이런 말을 합니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열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만남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는 개 인적으로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내적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도 끝없이 불화합니다. 우리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 해 거짓 자아의 집요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경 우리는 내 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또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모른 채, 속수무 책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 다는 사실을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바빠서 혹은 귀찮아서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휩쓸려온 시 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아 름답게 말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디딤돌을 놓 듯이,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욕망의 분주함에 밀려서 자신을 올바로 대면하지도 되찾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때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독의 상황에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몇 주째 보고 있는 야곱입니다.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 창 32:24
창세기 저자는 이 하나의 표현으로 야곱이 처해진 상황을 설명해 줍니 다. 사실 야곱이 이렇게 홀로 처해진 상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 는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창 28:10)도 해 저문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야곱은 극도의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고, 2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에도 극도 의 고독에 시달리다가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고독의 순간은 '자기 홀로' 있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홀로' 있는 순간입니다. 지난 20년 동 안 야곱은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도 이루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한 여인에게 집착해서 14년을 희생했고, 후 에는 재산을 모으느라 7년을 더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흘려보내고 바라본 자신은 안타깝게도 행복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20년 전 형 에 서와 빚은 불화도 아직 해결되지 못했는데, 다시 하란 땅에서 외삼촌과 사 촌들과 불화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평안함이라고는 없는 자신을 느낀 순간 야곱은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형의 속마음이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사자들을 형에게로 보냅니다.(창 32:3-5) 그러나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비관적이었습니다. 형이 4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온다는 겁니다. 야곱이 그 상황을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 두려움 속에서 야곱은 요단강의 지류인 얍복 시내에 도 착했습니다. 그곳만 건너면 고향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길이 떨 어지지가 않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먼저 선물을 보내 봅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그러고 나서 종들과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다 얍복 시내를 건너게 한 후 마침내 야곱은 혼자 남아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입 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 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창 32:22-24
사실 지금은 그렇게 한가하게 씨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얍복시내를건너야할것인지,말것인지,형을만나면목숨을부지할수 는있는것인지,이절체절명의시간에낯선사람과씨름을한다는건자 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씨름이 아니라는 건 이야기의 진 행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자기가야곱을이기지못함을보고그가야곱의허벅지관절을치매야곱 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 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 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 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 루어 이겼음이니라 | 창 32:25-28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뭔가 어색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 무리 야곱이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천사를 완력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여호와 신앙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이야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자기들 나라의 정체성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하 나님과 겨루어 이긴 민족이라는 자부심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 나님이 져주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야곱과의 씨름에서 져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대개 아버지들이 어린 아들과 씨름을 하다가 일부러 져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감과 자존감 을 높여주기 위한 거 아닙니까? 그렇듯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져주심 으로서야곱뿐아니라그후손들이민족적인자신감을갖기를원하신것 입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에 올 때도 하나님의 '찾아오심' 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도 야곱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경 험했고, 2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에도 극도의 불안에 시 달리다가 천사를 만났습니다. 야곱에 관한 대서사는 이 두 전승을 기둥으 로 세워진 건축물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야 곱과함께하신하나님께서자신들과도함께하신다는믿음을가질수있 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 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 창 32:29
천사는 야곱에게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대신 그를 위해 축 복(祝福)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삶의 질의 향상이었을 까요? 그보다 본질적인 것입니다. 참된 축복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즉 하 나님 경험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했습니다.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창 32:30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 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입니까? 물론 여기에서 야곱이 완전하게 변화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기운 건 사실입니다. 20년 전하란을향해가다가낯선땅에서하나님을뵈었을때,그때야곱이지 명 이름을 뭐라고 지었었습니까?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로 지 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지어주신 이름 '이스라엘', 야곱이 하나님을 경 험할 때마다 지은 지명 '벧엘'과 '브니엘'에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엘' 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점차 하나님은 야곱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체 험되었습니다. 때때로는 이런 형식의 성경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비현실적으 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분주함으로 지나가는 게 우리 일상 인데, 언제 야곱처럼 낯선 곳을 찾아가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있습니까? 지난주에 영화 '카핑 베토벤'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베토벤의 악보를 대 필해주는 안나 홀츠라는 여학생에게 베토벤은 "내 머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면서 "신은 나를 음악으로 채웠고 그리고 귀머거리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안나 홀츠는 음악의 형식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음악에서 중요한 건 올바른 형식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베토벤이 이렇게 말합니 다."내면에속삭이는소리를들어야지.나는귀먹기전까지는듣지못 했네.침묵이바로열쇠야.음과음 사이의침묵. 침묵이 자넬 감싸면 자네 영혼은 노래할 수 있게돼."내인생의가장결정적이고궁극적인 것은 내가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찾아와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 고하나님의은총입니다.다만내삶의시간과시간사이,그마디와마 디를 침묵으로 비워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 14:9절 을 보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그리하면 족하겠다고 부탁하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네가나를알지못하느냐나를본자는아버지를보았거늘어찌하 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브니엘' 즉 우리 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한 무리의 고독한 사람들이등장합니다.그들은요한의죽음이후로마음둘곳없어하다 가 갈릴리의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입니다.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 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 마 14:13
마치 야곱이 두려움과 고독 가운데 얍복 시내에 홀로 있었듯이, 이들 역시 영적 고독을 가득 안고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을 바라 보시는 예수님의 연민(憐憫)이 복음서에 가득 묻어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 쳐 주시니라 | 마 14:14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의 영 적고독을보신것입니다.둘곳없는마음을보신것입니다.여러분의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독을 예수님께 보여드 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채우시고 여러분의 브니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큰 근 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1b)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롬 9:4)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롬 9:32)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 시선이라면, 행위는 자기를 향한 육 신적 시선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 을채우실수없습니다."너희는가만히있어내가하나님됨을알지어다 "(시 46:10)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참 안 변 하는 게 사람입니다. 야곱도 지독하게 안 변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무지합니까? 그럼에도 평생 자기 성찰은 하지 못하고 남의이야기만입에올리다가죽습니다.우리중몇명이나용기있게자 신을 들여다보겠습니까?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가장 큰 저주는 자기기만입니다. 우리가 끝내 자신을 보기를 거부 한다면 주님은 우리 교만에 상처를 주실 것이고, 우리의 부적절한 애착을 드러내셔서 어느 날 처절한 자기 한계에 직면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앞에 홀로 있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서있어 봐야 합니다. 홀로 있다는 말의 궁극적 의미는 지극히 영적(靈的)인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 고독이 야곱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독은 그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늘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 는 유일한 비결은, 우리 성품의 못나고 연약한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만지 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매우 상징적으 로 보여줍니다.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 창 32:31
다리를 절며 얍복 시내를 떠나는 야곱의 모습은 처절하다기 보다는 장 엄한 느낌을 줍니다. 지금까지의 야곱의 모습이 스스로 이룬 모습이라면, 새로운 야곱의 모습엔 하나님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지금 절고 있는 그의 다리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 들어갔다는 흔적(痕迹) 즉 스티그마 (stigma)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직면한 그의 모습에서 궁극적인 생명의 깊이가 체감됩니다. 여러분의 얍복 나루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홀로 앉 아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홀로 앉아 기도에 젖어드는, 거기가 우리의 얍복 나루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나를 보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셔서 매일매일이 브니엘 의 아침인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일상의 분주함에 끌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2. '하나님과 홀로'의 시간을 애써 갖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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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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