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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3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1-20 21:34
조회
372
주현 후 제3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 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 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 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 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② 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 였을 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③ 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 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복음을 소홀히 여기거나 축소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 주제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인간의 철저한 타락,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인간의 회개,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시작 등을 들 수 있는데, 복음 설교자인 폴 워셔(Paul Washer)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축소하면서 많은 폐해가 발생했습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입으로는 알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셋째, 인간의 힘으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넷째, 그로 인해 교회가 순결함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은 비(非)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습니다(롬 2:24). 복음이 소홀히 여겨지고 축소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사람에 의해 축소되고, 그 자리를 인간이 만든 종교문화가 채우면서 구원의 길이 왜곡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건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폴 워셔의 지적대로 많은 폐해가 발생한 것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당신이 하실 일은 남김없이 다 하셨습니다. 만약 아직도 못 다하신 일이 남아있다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사역을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셨기에, 이제 파멸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오로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에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할 수도 있고, 그릇되게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설정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회개(悔改)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소홀히 여기거나 축소한다는 건, 바로 이 회개를 소홀히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복음의 은총에 가장 성경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존 웨슬리에 따르면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생활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43),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이렇게 회개는 믿음보다도 앞서 요청될 뿐 아니라, 세례와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영적 생활의 최우선 덕목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좀 더 깊게 묵상해 보면 그러한 측면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선포한 메시지는 네 개의 단언(斷言)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단언들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골자가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단언은 '때가 찼다'입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다급하고 절박하게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시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때'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를 향해 가는 물리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χαιρὸς)'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시간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완료 수동형입니다. '때'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때가 차게' 함으로서 목적하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약의 때가 차고 신약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고, 요한의 때가 차고 예수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고, 흑암의 때가 차고 구원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구원의 때가 지금 막 찬 것입니다(단 7:22, 겔 7:12). 여기에서 우리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영적 시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란 저절로 흘러 어느 때에 도달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 구원을 실현시켜주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시간들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연속성이 있어서 하나님은 시간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온 세대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온 세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구원은 단순히 그 점진적인 단계를 지속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 앞서 진행되어온 구원의 단계들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을 우리는 연대기적 시간(χρόνος)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시간(χαιρὸς)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그 때를 일컬어 '때가 찼다'(막 1:15)고 선언한 것입니다. 달이 차듯 구원의 때가 찼음을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두 번째 단언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해왔습니다(사 6:1-3;43:15;시 46;92, 95-98 등). 그래서 포로생활 이후에 다윗의 왕권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희미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시온에 당신의 나라를 일으키시고, 당신의 왕권을 온 세상에 펼쳐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습니다(미 2:13;4:7;습 3:15;렘 3:17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라시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요 18:36절에서 그 나라를 '내 나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내 나라'라고 하심으로서 당신이 그 나라의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이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주제였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는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언을 주시는데, 그것은 각각 '회개하고'와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변화에의 절박성을 우리에게 더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 대개 윤리적 문제를 먼저 떠 올립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로,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는 '존재론적 자기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단절에 대한 통회의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단호히 돌아서게 되고, 그 순간이 바로 본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이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당신께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당부합니다.
사 55: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회개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회개의 목적은 죄를 버리는 것 자체만이 아닙니다. 회개의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돌이키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은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속성상 서로를 배척합니다.
살전 1:9, 10절에서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죄로부터 돌이키는 목적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도 다시금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마가는 주님의 부르심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주께로 돌아서는 자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정말 인상적인 것은 부름이나 응답이 똑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오늘 말씀에서 '곧'이라는 부사를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이고(막 1:20), 한 번은 제자들의 응답에서입니다(막 1:18). 주님께서 '곧' 부르시니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부르심 앞에서 제자들은 '곧' 자기 일을 떠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심의 참된 자세를 봅니다. 참된 회심의 증거는 열매를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게 살려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삶으로 결실되어야만 회심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삶의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회심은, 그것이 감정의 표출에 지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즉각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할 것과 부정한 방법으로 착복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삭개오가 시간을 두고 고민했더라면 그는 결코 회심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은 회심을 통해 지난날의 잘못된 열심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성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회심(悔心)을 강조했습니다.
고든 스미스는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이란 책에서 훌륭한 회심의 7가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첫째, 믿음 즉 지적 요소의 회심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고의 변화를 통해 믿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 즉 진정한 참회입니다. 죄로부터 분명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넷째,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에너지가 어디로 투입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다섯째, 물세례입니다. 이것은 성례전적 요소입니다. 여섯째,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적인 요소입니다. 일곱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요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회심이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거쳐 거듭거듭 일어나는 영속적인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념(Belief)에 변화가 찾아오고, 소속(Belonging)에 변화가 찾아오고, 행동(Behavior)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교리에 동의하면 회심한 것으로 여겨주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의 회심이란 것이 지금은 얼마나 피상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회심이란 '삶의 방식의 재구성이고, 가치체계의 재구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회심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심이 그래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요나 선지자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a)고 경고합니다. 40일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긴급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때의 임박성' 만큼이나 긴급하게 행동합니다.
'때'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구원한 것을 봅니다. 이러한 시간적 절박성의 이야기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도 민감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는 말씀은 "종말의 시간이 임박했으니"라는 의미입니다. 얼핏 보면 임박한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지금 바울은 종말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종말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고린도 사람들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을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 없는 자처럼 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독신으로 살라거나 금욕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아내를 맞이하여 살되 '그 때'를 염두에 두고 그 관계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혼 서약이나 부부의 관계는 소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와 비교하면 한시적인 서약이라는 것입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감정을 누르고 살아가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느끼는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감정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역시 '그 때'를 염두에 두고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런 까닭에 종말론적 '그 때'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한시적인 '이 때'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회개한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서 있지는 않는가?
② 회개 이후로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 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 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 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 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② 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 였을 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③ 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 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복음을 소홀히 여기거나 축소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 주제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인간의 철저한 타락,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인간의 회개,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시작 등을 들 수 있는데, 복음 설교자인 폴 워셔(Paul Washer)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축소하면서 많은 폐해가 발생했습니다. 첫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입으로는 알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셋째, 인간의 힘으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넷째, 그로 인해 교회가 순결함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은 비(非)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습니다(롬 2:24). 복음이 소홀히 여겨지고 축소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사람에 의해 축소되고, 그 자리를 인간이 만든 종교문화가 채우면서 구원의 길이 왜곡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건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폴 워셔의 지적대로 많은 폐해가 발생한 것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당신이 하실 일은 남김없이 다 하셨습니다. 만약 아직도 못 다하신 일이 남아있다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사역을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셨기에, 이제 파멸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오로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에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할 수도 있고, 그릇되게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설정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회개(悔改)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소홀히 여기거나 축소한다는 건, 바로 이 회개를 소홀히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복음의 은총에 가장 성경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존 웨슬리에 따르면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생활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43),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이렇게 회개는 믿음보다도 앞서 요청될 뿐 아니라, 세례와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영적 생활의 최우선 덕목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좀 더 깊게 묵상해 보면 그러한 측면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막 1:15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선포한 메시지는 네 개의 단언(斷言)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단언들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골자가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단언은 '때가 찼다'입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다급하고 절박하게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시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때'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를 향해 가는 물리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χαιρὸς)'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시간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완료 수동형입니다. '때'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때가 차게' 함으로서 목적하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약의 때가 차고 신약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고, 요한의 때가 차고 예수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고, 흑암의 때가 차고 구원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구원의 때가 지금 막 찬 것입니다(단 7:22, 겔 7:12). 여기에서 우리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영적 시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란 저절로 흘러 어느 때에 도달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 구원을 실현시켜주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시간들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연속성이 있어서 하나님은 시간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온 세대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온 세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구원은 단순히 그 점진적인 단계를 지속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 앞서 진행되어온 구원의 단계들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을 우리는 연대기적 시간(χρόνος)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시간(χαιρὸς)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그 때를 일컬어 '때가 찼다'(막 1:15)고 선언한 것입니다. 달이 차듯 구원의 때가 찼음을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두 번째 단언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해왔습니다(사 6:1-3;43:15;시 46;92, 95-98 등). 그래서 포로생활 이후에 다윗의 왕권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희미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시온에 당신의 나라를 일으키시고, 당신의 왕권을 온 세상에 펼쳐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습니다(미 2:13;4:7;습 3:15;렘 3:17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라시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요 18:36절에서 그 나라를 '내 나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내 나라'라고 하심으로서 당신이 그 나라의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이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주제였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는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언을 주시는데, 그것은 각각 '회개하고'와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변화에의 절박성을 우리에게 더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 대개 윤리적 문제를 먼저 떠 올립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로,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는 '존재론적 자기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단절에 대한 통회의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단호히 돌아서게 되고, 그 순간이 바로 본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이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당신께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당부합니다.
사 55: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회개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회개의 목적은 죄를 버리는 것 자체만이 아닙니다. 회개의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돌이키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은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속성상 서로를 배척합니다.
살전 1:9, 10절에서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죄로부터 돌이키는 목적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도 다시금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마가는 주님의 부르심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주께로 돌아서는 자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막 1:16-20
이 장면에서 정말 인상적인 것은 부름이나 응답이 똑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오늘 말씀에서 '곧'이라는 부사를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이고(막 1:20), 한 번은 제자들의 응답에서입니다(막 1:18). 주님께서 '곧' 부르시니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부르심 앞에서 제자들은 '곧' 자기 일을 떠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심의 참된 자세를 봅니다. 참된 회심의 증거는 열매를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게 살려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삶으로 결실되어야만 회심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삶의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회심은, 그것이 감정의 표출에 지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즉각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할 것과 부정한 방법으로 착복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삭개오가 시간을 두고 고민했더라면 그는 결코 회심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은 회심을 통해 지난날의 잘못된 열심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성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회심(悔心)을 강조했습니다.
고든 스미스는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이란 책에서 훌륭한 회심의 7가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첫째, 믿음 즉 지적 요소의 회심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고의 변화를 통해 믿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 즉 진정한 참회입니다. 죄로부터 분명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넷째,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에너지가 어디로 투입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다섯째, 물세례입니다. 이것은 성례전적 요소입니다. 여섯째,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적인 요소입니다. 일곱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요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회심이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거쳐 거듭거듭 일어나는 영속적인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념(Belief)에 변화가 찾아오고, 소속(Belonging)에 변화가 찾아오고, 행동(Behavior)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교리에 동의하면 회심한 것으로 여겨주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의 회심이란 것이 지금은 얼마나 피상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회심이란 '삶의 방식의 재구성이고, 가치체계의 재구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회심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심이 그래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요나 선지자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a)고 경고합니다. 40일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긴급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때의 임박성' 만큼이나 긴급하게 행동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 욘 3:4b
'때'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구원한 것을 봅니다. 이러한 시간적 절박성의 이야기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도 민감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 고전 7:29-31
여기서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는 말씀은 "종말의 시간이 임박했으니"라는 의미입니다. 얼핏 보면 임박한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지금 바울은 종말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종말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고린도 사람들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을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 없는 자처럼 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독신으로 살라거나 금욕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아내를 맞이하여 살되 '그 때'를 염두에 두고 그 관계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혼 서약이나 부부의 관계는 소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와 비교하면 한시적인 서약이라는 것입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감정을 누르고 살아가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느끼는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감정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역시 '그 때'를 염두에 두고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런 까닭에 종말론적 '그 때'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한시적인 '이 때'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회개한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서 있지는 않는가?
② 회개 이후로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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