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2주 너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 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 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응송 | 시 139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서신 | 고전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 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 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 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 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라
복음 | 요 1:43-51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 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 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 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 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상 3:1-3을 묵상하십시오. 당시의 영적 상황을 알 수 있는 표현 을 세 가지만 찾아 자신의 영적 상태와 비교해 보십시오.
② 요 1:50-5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 서 보신 것보다 더 큰 일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6:19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너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고등학생 때 읽었던 안톤 슈낙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 아직도 제 뇌리와 가슴에 남아서 문득문득 되뇌어 보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 양광(陽光)이 비치고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중략)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 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대개 무언가를 잃었을 때, 우리 가슴에 배어드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 혹은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올 때의 절망이 감정을 자극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슬픔 중에는 우리 감정과 정서를 정화시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매우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슬픔도 있습니다. '필로칼리아'의 수덕-영성심리학에 의하면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기억할 때, 갖게 되는 세 차원의 마음의 슬픔(고통)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름답고 순수한 빛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신의 죄에 대한 참된 인식에 근거한 내적 슬픔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임하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슬픔의 차원이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자아 포기'를 수동적으로 맞아들이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슬픔은 무의미하거나 소모적인 슬픔이 아닙니다. 이 슬픔은 우리를 온전히 그리스도 안으로 이끄는 거룩한 슬픔이고, 우리를 재창조하는 슬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서 이 거룩한 슬픔을 통해 재창조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노력인지를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이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보면 사무엘서 저자가 "그때는 여호와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삼상 3:1 공동번역)"라며, 사사시대 말기, 선지자나 제사장의 영적 상태가 매우 어두웠었음을 시사(示唆)합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삼상 3:3a)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아직 실낱같은 희망도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희망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서 등불이 우리의 내면에서 꺼지지 않을 때, 희망은 거기에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고전 6:19)이라며,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당부합니다. 성령의 전으로서 살며, 성령의 불이 우리의 내면에서 꺼지지 않을 때,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나다나엘을 향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시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a)라고 나다나엘이 묻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b)라고 대답해주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서 거룩한 슬픔을 통해 재창조되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결국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내면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항상 영(靈)과 정신을 밝게 하는 것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보겠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삼상 3:1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여호와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예호와 우데바르(הוהי ¯ רבדו)'인데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이상(理想)'은 히브리어 '하존(ןוזח)'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당신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시기를 포기하고 침묵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뜻을 보여주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말씀을 하셔도 귀를 기울여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뜻을 보여주셔도 눈을 뜨고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사시대 말기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매우 두드러지게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에 대한 석연치 않은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 삼상 3:2
"눈이 어두워 가서(베예나우 헤헬루 케호트)"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 노쇠해서 잘 보지 못했다는 뜻도 있지만(창 27:1;왕상 14:4), 영적 무기력을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신 34:7;시 6:7;사 43:8;렘 5:21). 나이에 비례해 함께 노쇠해져 가고 있는 그의 영적 상태를 이 말씀은 고발합니다. 그는 지금,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제사장으로서의 일말의 슬픔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 채, 오로지 편하기 위해 자리에 누워있고, 모든 판단력을 잃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영적 어둠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삼상 3:3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등불(네르 엘로힘)'은 매일 저녁부터 아침까지 성소를 밝히는 일곱 등잔(출 27:21)을 가리키는데, 이 등불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은유하는 것이었습니다(욥 29:3;시 18:28;잠 6:23;사 42:3). 아침까지 계속 켜져 있는(출 30:8;레 24:2) 이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이 새벽녘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殿) 안에 누워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기 처소에 누워있는 반면(삼상 3:2),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고, 아직 하나님의 불이 꺼지지 않은 여호와의 전에(삼상 3:3) 누워있었다는 사무엘서 저자의 표현이 매우 의미 깊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희망도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우리 내면에서 꺼지지 않고,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고 있을 때, 희망은 거기에서부터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등불이 우리 내면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 살아있게 하는 재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깨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2024년 우리교회 표어대로 표현라면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신 4:30)입니다. 계속되는 말씀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 삼상 3:4, 5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나실인이고 레위지파의 헌신자인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시는 순간이고, 말씀이 희귀하여 소망이 없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지금 막 새로운 희망을 태동시키시는 순간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부르실 때 예민하게 듣고 일어났습니다. 아마 엘리가 언제 자기를 부를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 어두워지고 내면마저 어두워진 엘리는 세 번이나 거듭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무엘을 부르십니까?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의 죄로 인해 그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를 어린 사무엘에게 하시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장이 들어야 할 경고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하나님과 엘리 제사장 사이에 대화가 사라지고 하나님께선 이미 대화 상대를 옮기신 것입니다. 세 번 같은 부르심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엘리 제사장이 어린 사무엘을 불러 말합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 삼상 3:9
신 34:7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신명기 사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그토록 생의 마지막까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靈)과 정신이 살아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영과 정신을 게으르게 방치했기에 몸도 덩달아 노쇠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린 사무엘의 입을 빌어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노(老) 제사장의 마음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 따르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 요 1:43, 44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 요 1:47, 48
빌립을 먼저 만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자 빌립은 별 질문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요 1:43). 이어지는 말씀에서 요한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 1:44)고 한 것을 보면, 표면적으로 빌립은 같은 마을사람인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읽어보면 그가 별 질문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에는 보다 내밀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한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요 1:45
그는 구도자(求道者)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도의 방식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며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더 이상 어떤 질문조차 필요 없을 만큼 이미 마음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고 깊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깊이 읽고, 깊이 묵상해야 하는지 빌립이 우리에게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성경 읽기' 즉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단지 신문이나 잡지를 읽듯이 속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말씀을 읽고, 내면화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전체로 하나님과의 대화에 참여했습니다. 또 그들은 말씀을 아무 천천히 읽음으로써, 말씀을 음미하고 소화하는 것에 힘을 쏟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 안에 잠겨있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읽기의 진수입니다. 빌립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어떤 질문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뿐 아니라, "와서 보라" 라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빌립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소개하며,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며 매우 의심스럽다는 투로 빌립에게 반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사렛이란 마을 이름은 매우 경멸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바리새인은 니고데모와 논쟁할 때,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요 7:52)라며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다나엘의 질문이 바리새인과 같은 냉소에서 나온 것이 아닌 구도자적인 질문이었음을 이어지는 그의 태도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곧바로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로 가고, 그가 당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주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았노라'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에이든(εἶδόν)'입니다. 단순히 예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의 깊게 주목했다'라는 의지적인 측면도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주님은 그의 어떤 면을 그토록 주의 깊게 주목하신 것일까요?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는 모습은, 당시에 구도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신 것은 그의 '속사람'이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자신의 설교에서 '성인이란 속사람이 성화되고 정화된 사람이다' 라고 했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모든 모습은 나의 내면의 것들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 라고 했는데, 주님은 바로 그의 성화되고 정화된 속사람을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의 질문이 냉소에서 나온 것이 아닌 희망의 질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역시 나사렛에서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지요?" 하고 자신의 위로가 이루어진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말씀을 묵상하며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어떤 질문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 아래 앉아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이었기에, 그토록 반갑고 희망 섞인 화답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참'이라는 단어를 써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참'은 희랍어로 '알레도스(ἀληθϖς)'인데, '겉과 속이 일치된' 혹은 '진지한'이란 뜻입니다. 그의 내면은 참으로 진지했으며, 그의 진지한 내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외적인 자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내면의 진실한 갈망을 꿰뚫어 보아준 주님을 향해, 나다나엘이 경외감에 가득차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더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 요 1:50, 51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갈망했던 신앙의 차원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천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십니다. 열리기 이전의 하늘은 물리적 공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하늘이 열리는 날엔 '영적 공간'이 됩니다. 그 하늘은 영의 눈을 뜬 사람, 나이가 들어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하늘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그 시선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부터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막연한 갈망으로 가슴앓이 하는 구도의 차원을 넘어 천상의 신비를 보고 기쁨을 얻으라고 초대하십니다.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늘이 열린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도 하늘이 열린 사건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하늘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언제 하늘이 열릴까요?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말씀을 묵상할 때입니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될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서신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고전 6:19, 20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되어 성령의 불이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을 때, 여러분을 위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여러분에게 임하시며 여러분은 천상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면이 천상의 기쁨으로 가득 찬 성도는 그 기쁨이 얼굴 전체에 배어나올 것입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눈이 어둡듯 내면 또한 어둡다고 느끼십니까?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내면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면이 천상의 기쁨으로 채워질 때, 그 기쁨은 우리 얼굴 전체에 배어나올 것이며, 우리는 참된 내적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도, 이웃에게도 "당신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요. 당신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군요"라고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象)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아닌가?
② 말씀 묵상을 통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심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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