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1주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61:10-62:3
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 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 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 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 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 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서신 | 갈 4:4-7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 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 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복음 | 눅 2:22-40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 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도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 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 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 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 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 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 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 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의 위에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2:25-32절 묵상하십시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에게서 본 것은 무엇입니까?
② 사 61:10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입혀주실 구원의 옷, 공의의 겉옷은 우리의 무엇을 가려주는 것입니까?
③ 갈 4:4, 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 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어느새 한 해의 시간이 흘러서 송구영신의 시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성탄 후 제1주로서 아직 우리의 시간은 성탄이 주는 위로와 감격 속에 머물러 있는 중이고, 따라서 오늘 성경말씀들도 모두 성탄이 주는 위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찬양'에서, 700년 후 이루어질 성탄과 메시아 사역을 예견하며, 그 메시아를 보내실 여호와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은 마치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뿌려진 씨앗을 움돋게 하듯(사 61:11) 새롭고 싱그러울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5)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아들이 땅이 싹을 내게 하며, 동산이 뿌려진 씨앗을 움돋게 할 그 구원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므온이란 노인은 평생 동안 바로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였습니다. 그런 시므온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품에 받아 안고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 2:29-30 표준 새 번역) 라고 찬송을 하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성경말씀들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갈망하며 기다려왔다는 것은 성경 안의 사람들이 동시대 속에서 위로 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었고, 시므온 노인이 살던 시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 갈라디아의 영적 현실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갈 2:4)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집요하게 할례를 강요하며 혼란을 주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까지 모든 분야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약성경과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 한분에게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위로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모든 성경이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로라는 것이 다분히 관념의 영역에서만 고백되고, 정작 현실은 여전히 절망적일 때가 많습니다. 부산진교회를 담임하셨던 박성원 목사님께서 '잔해 속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the Rubble)'라는 제목의 글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지인들이 서로 페이스북이나 카톡으로 성탄축하의 말을 전할 때, 목사님은 도저히 거기에 성탄 인사를 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 이스라엘 언론에 공개되는 증언들을 볼 때, 현재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공격은 단순히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복수가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가자지구 말살계획의 실행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두 달간 가자지구에 퍼부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은 '인공지능(AI)에 의한 컴퓨터 시스템'으로 실행되고 있는데, 그 시스템의 이름이 '가스펠(Gospel)'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이름으로 어린이, 여성, 임산부를 가리지 않고, 팔레스타인 인종청소가 잔인하게 자행되는 것을 보면서, 성경을 믿고 복음의 가치를 고백하는 자신으로서 성경과 신앙이 조롱당하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박성원 목사님의 베들레헴 출신 친구인 미트리 라헵은 2023년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의 성탄절은, 2,000년 전 아기 예수가 오셨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면서, 로마제국과 헤롯의 아기학살, 아기 예수의 이집트 피난 등의 장면이 2,000년이 지난 지금 베들레헴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통한 심정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얻는 위로에 회의적인 심정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서일과는 공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위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란 어떤 것인지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시므온이라는 노인과 안나라는 여선지자입니다. 누가는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로, 안나를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눅 2:37)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눅 2:30)고 고백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나 선지자 역시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던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눅 2:38). 이 지점에서 우리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희망과 위로를 말하기 어려운 그 어둡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고백한 이 두 인물은 평소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이들은 어떤 구도의 과정을 통해 아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위로요 구원으로 고백하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우리도 이 두 사람이 공히 소개하는 바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구도의 시선을 돌려야 하겠는지 입니다. 이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눅 2:25
당시 유다에서 시므온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흔한 시므온 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며 칭찬할 뿐 아니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소개해 줍니다. 부연(敷衍)하면 누가가 본 시므온은 '영적인 사람'이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던 유다의 '남은 자(the believing remnent)'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기다리는 자'는 비단 시므온만은 아니었습니다. 마가는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 15:43) 라고 소개한 바 있고, 요 1:47절에서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시사적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구도자적 삶은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나 필요한 영적 자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임재연습'에서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이렇게 가르쳐줍니다.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늘 친밀하게 임재하고 계심을 깨달아 삶의 순간순간 그분과 대화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온갖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들을 행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그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무사히 마친 뒤에는 잘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누가가 보았던 시므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과 경건함은, 바로 이런 영적 자세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 있었을 때, 성령이 그 위에 임재해서 함께 계셨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위로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누가는 그 사실을 감동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 눅 2:26-28 표준 새 번역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예수의 부모가 율법 예식을 행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의 성육신을 기다려왔던 그는,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단번에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두 팔로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가를 올려드립니다.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 눅 2:29-32 표준 새 번역
시므온의 찬미를 새겨보십시오. 그는 이미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팔로 아기 예수님을 안고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고 감격 속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므온은 지금 자기 팔에 안겨 있는 그리스도 한 분 말고는 사람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킬 분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야 이 종을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뵙고 두 팔로 영접하기 전에는 제 몸을 묶은 육신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시므온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가 시므온처럼 경건함 속에서 영적 위로를 기다릴 때, 우리도 시므온처럼 육신의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아기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부활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이 아기에게서 주의 구원을 보았다며 찬미합니다. 아기 예수 안에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런 영적 자세는 시므온의 시대만이 아니라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모든 시대에 필요했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있어야 할 자세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 사 61:10
이 고백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찬양'이라는 주석가들이 붙여놓은 소제목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지금 그는 메시아의 도래와 그분의 사역을 내다보며 그 메시아를 보내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공의의 겉옷을 더해주셨다"며 즐거워합니다. 이 구원과 공의의 겉옷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가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찬미가에서는 그의 즐거움이 신랑과 신부의 화려한 의상을 넘어, 봄철에 새싹이 움돋는 아름다움으로까지 표현됩니다.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 사 61:11
봄철에 새싹이 두터운 땅을 밀고 움돋아 오르듯이 죄악과 사망의 두터운 땅을 밀쳐 올리면서 힘차게 약동할 구원과 생명에 대한 찬양입니다. '땅이 싹을 낸다'는 표현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여러 번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사 45:8에 보면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사 55:10, 11에서도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의 이런 표현들은 깊은 신앙적 성찰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진 비와 눈을 받아 생명을 싹틔우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총이 싹틔워줄 생명을 바라보며 그 은총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은총에 오늘 우리 모두가 받을 위로 또한 함께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700년 전에 이 땅을 살다 죽은 한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을, 700년이 지난 후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리고 혹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이나 바뀐 700년 후에 이미 화석이나 마찬가지인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희망을 두고 살아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수천 년 지난 화석과 같은 말씀에서 오늘의 희망을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남긴, 그 말씀을 정말 붙들고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복음서의 시므온입니다. 그가 노래한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가리킵니다. 즉 훗날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성취되는 종말론적 구원을 이스라엘의 위로라 보았기 때문에 후대의 랍비들은 오실 메시아를 '위로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 중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때, 그 때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놀라운 일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의롭고 경건하다고 평가해 주시고, 성령은 바로 그런 사람 위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막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역사 가운데 마침내 이루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갈 4:4, 5
하나님께서는 1세기 팔레스티나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결정적 행동을 바울은 오늘 서신서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증언하고,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신 것은 율법의 지배아래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주시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얻게 되었을 때, 그때 일어나는 일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갈 4:6, 7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자녀 됨의 행복, 시므온은 바로 이 위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오로지 이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따라, 혹은 경제적 야심과 거기서 성취되는 것들을 좇아 때로 신앙의 언어를 도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위로받기 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좌절하거나 신앙생활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시므온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義)에 희망을 두고 그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나라의 의를 기다리는 사람일까요? 주님을 마음 모아 바라봄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진정한 통합을 이루고, 그럼으로써 이웃이나, 창조질서와도 통합을 이루고, 자기 자신과도 갈등 없이 통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시므온처럼,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찬미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오늘 응송의 시인 역시 하나님의 위로에 눈을 뜬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자며 목소리를 높입니다.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 시 148:13, 14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를 드높여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은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은총을 마음을 다하여 찬미하며, 위로와 감격 속에 새해를 맞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행복과 위로를 성서적 가치 밖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이며 본질적인 위로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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