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6주 영을 따라 사는 삶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5: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 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 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응송 | 시 119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서신 | 롬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 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복음 | 마 13:1-9, 18-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흙이얕은돌밭에떨어지매흙이깊지아니하므로곧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좋은땅에떨어지매어떤것은백배,어떤것은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천국말씀을듣고깨닫지못할때는악한자가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땅에뿌려졌다는것은말씀을듣고깨닫는자니결실하여어 떤것은백배,어떤것은육십배,어떤것은삼십배가되느니라 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1. 롬 8:1, 2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창 25:32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에서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으십니까?
3. 마 13:22을 묵상하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가로막은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 나눔
영을 따라 사는 삶
중세 영어에 'uncann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un+canny'가 조합된 단 어로 '앎의 밖에' 혹은 '인식의 밖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익숙한 지식이 나 인식의 밖에 있으니, 으스스하거나 기괴한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정 신분석학에선 '기이한 느낌'이나 '으스스한 느낌'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1919년에 쓴 '언캐니 현상'이란 책에서 이 단어를 발전시켰는데, 그는 이 '언캐니 현상'을 '묘하게 낯설게 느껴 지는 오랜 익숙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묘하게 낯설게 느껴지는 오랜 익 숙함' 어쩌면 우리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매일매일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호흡하며, 매일매일 회심해야 하는 존재가 우리이고 보면, 그렇지 못하고 오랜 익숙함에 길들여져서 오히려 매일매일 완고하게 굳어져만 가고, 이기적인 냉소와 질투와 탐욕 그리고 세속의 정신으로 오염시켜버린 우리 모습은 묘하게 낯설게 느껴지고 기이 한 느낌입니다. 인간은 매일매일 회심하며 내면을 변화시키는 대신, 철학 과이성에바탕을둔세계를구축하고과학과예술을꽃피우는것을즐겼 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과학과 예술과 철학과 이성은 인간의 명석함을 매 력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재하신 인간의 명석함은 오 히려 허무와 불안의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로 엄습해 오기도 했습니다.'uncanny'에서 발전한 단어가 'uncanny valley'라고 합니다. '섬뜩한 계곡' 혹은 '으스스한 골짜기'라고 번역할 수 있겠는데, 대개 사람이 로봇 이나 애니메이션에게 가지는 느낌이 그렇다고 합니다. 처음에 로봇을 만들 때는호감을느끼지만,그것이선을넘어너무사람과흡사하면오히려두 려움을 느끼는 것을 'uncanny valley'라고 합니다. 사람이라고 인식할 만 큼 인간과 닮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아닌 존재에게 느끼는 두려움인데, 어 쩌면 우리 현대 신앙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인식할 만큼 외형은 갖추었지만,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아닌 상태 말입니다. 사실 이건 어제 오늘의 모습만은 아닙니 다. 창조 이래로 지난하게 인간들은 이 애매한 상태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율법을 받 은 사람들은 한때, 이집트나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들 틈새에서 그들의 화 려한 겉치장에 위축되지 않고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가는 품격'을 당당 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 국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할 만큼 작지만 당당하고 알토랑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안의 두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속사람 역시 율법을 즐거워했지만, 그러나 그들 안에는 죄의 법을 즐거워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매일매일 그들의 타락한 본능을 부추 겼습니다. 엄청난 전쟁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났습니 다.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도 거기에서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 서 심하게 내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바울의 모습 아니었습니까?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라며, 그 율법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러나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린 자신'(롬 7:14),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 워하는 것을 행하는 자신'(롬 7:15)을 보며 그는 자기 경건의 한계를 절감 하고 동시에 율법의 한계마저 절감한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라며 영적 공황상 태를 호소하던 바울은 마침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바울의이시선전환은사실당연한것은아니었습니다.그의존재근거는 철저하게 율법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존재의 기반인 율법이 아 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박제화 시켜버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방 법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교리적 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믿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하고 있습니 다. 그럼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아직 석연치 않은 문제가 남 아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내면에 똬 리를 틀고 있는 악한 본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 바로 그 점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고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 신의 상태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악한 본능이 섬뜩하게 살아있고, 자기 안 에서 고개를 드는 죄의 유혹으로 인해 오히려 율법의 정죄만 더욱 심화되 고 있었습니다. 이 현실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에 대해서 재고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이 죄의 문제 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는가?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 리 선언이 그 위대한 십자가 사건이 갖는 의미의 전부인가? 만일 그렇다 면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그 물 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 를 해방하였음이라 | 롬 8:1, 2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8장 안에서만 '성령' 또는 '영'이라는 단어를 무려 21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계명', ' 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성령'이나 '영'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려주는 영'(고전 15:45)으로 오셨습니다. 장래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나도 '살려주시는 영'으로 오신 것입니 다. 바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성령께서는 성도의 영성생활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라는 표현과, 2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 씀이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다른 사본들에는 '그리 스도예수안에있는자'라는말씀다음에'육신을따르지않고영을따라 행하는 자'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Textus Receptus)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의 뜻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측면에서 질문 해 보겠습니다. 자신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습관적 으로 교회에 출석은 하고 있지만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따르고 있 지 않다면, 그래도 과연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 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다른 표현으로 육신이 아닌 '영(靈)을 따라 행 하는 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다르게 질문해 보겠습니 다. 지난주에는 어떠한 삶의 열매를 맺어오셨습니까? 육신을 따라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어오셨습니까? 영을 따라 생명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오 셨습니까? 혹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씀 의미를 왜곡하고 있 거나 모독하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요? 우리는 값싼 믿음의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를 싸구려로 만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훨 씬 영적인 사건이 매일매일 내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러면 그 영적인 사건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삶의 '지향'과 관 련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투쟁도 삶의 지향과 관련 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을 통해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의 전형을 볼 수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 도 볼 수 있습니다.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 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 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 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 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 창 25:29-34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봅니다. 형 에서가 가지 고 있는 육적인 인간상과 동생 야곱에게서 보이는 영적 기질입니다. 사실 형에서와동생야곱을비교해보면인간적으로는형이훨씬매력있어보 입니다. 장자의 명분에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고, 자기를 피해 하란 에가서20년간살던야곱이돌아올때,동생을혈육의정으로맞이하는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삼촌 라반의 재산을 교묘한 방식으로 가 로채는것하나만봐도그의인간성이어떤지가드러납니다.만약제가친 구를 삼는다면 당연히 에서 같은 사람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야곱이 보여준 단 한 번의 영적인 선택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에서가 팥죽이라는 물질적 가치에 먼저 반응할 때, 야곱은 장자라는 영적 가치에 먼저 반응했습니다. 장자는 고대사회의 가족관계에서 굉장히 중요 한 위치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장자의 명문은 하나님의 복과 바로 연 관됩니다. 장자의 명분을 유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 는 없습니다. 에서가 부도덕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인간성에 문제가 있 었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 즉 영적 지향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 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저자의 판단입니다.대수롭지않아보이지만그가했던한마디말은그의영적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 순간의 배고픔 앞에서 그는 너무 쉽게 영적 가치를 내던져버리고 맙니다. 영적인 문제는 나중 이야기고 지금 당 장은 먹고 사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에서의 입장도 나름으로 일 리가 있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존재로서 인간은 최소한 먹고 마 시며 배설하고 노동하며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건강하 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일 방적으로 떨어진 삶의 태도입니다. 허기를 채우려는 '육신의 본능'에만 정 신이 팔렸기 때문에 에서는 그보다 중한 '영을 따르는 삶'이 있다는 걸 생 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론자이고, 극단적인 실용주의 자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그런가 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형과의 거래에서 그가 얻은 게 무엇 입니까? 그 거래를 통해 당장 손에 쥔 것도 없었지만 훗날의 이익이 보장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 가치' 즉 장자의 명 분을 소중하게 사들입니다. 바로 그 가치관이 형 에서와 많이 달랐다는 이 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장 현실로 내 손에 쥐어지는 이익이 없어도 영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실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위해 보이는 이익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와 여러분의 영성생활 이 진정한 회심에서 출발해서 점점 아름다운 삶의 지향으로 발전할 수 있 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육신이 아닌 영을 따라 행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삶의 자리'에서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우리를해방시킬것입니다.오늘복음서에보면서로다른네종류의 밭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 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 시가자라서기운을막았고더러는좋은땅에떨어지매어떤것은백배, 어 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마 13:3-8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네 종류 밭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풀어주셨습니다.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 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듣고즉시기쁨으로받되그속에뿌리가없어잠시견디다가말씀 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 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 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 마 13:19-23
여러분은 이 비유와 해석을 들으시면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마음을 가꾸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악에게 내어주는 길 가의 땅처럼 단단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 해 허약한 마음이다가 환난이나 시험이 왔을 때 이내 넘어져버리는 돌밭 과 같은 마음으로 놓아두지도 말고, 세속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그런 마음이 되지도 말고, 어떤 씨앗이 떨어져 도 충분히 결실할 수 있을 만큼 말씀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갖추라는 것입 니다. 영적 생활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삶이란 바로 이런 영적 삶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영성'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인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신 보다도 자기에 가깝게 자기 안에 침투하여 충만해 있는 사랑의 따뜻한 힘 으로서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진정시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서 하나님 과의 친교를 심화해 가는 것"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삶의 의지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롬 8:3, 4)고, 그리고 그 결과는 생 명과 평안(롬 8:6)이라고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이 아니 라 영적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훨씬 영적인 사건이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살려주는 영'(고전 15:45)이신 성령께서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 실 것입니다.■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육신을 따르며 육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2. 영(靈)을 따르며 영적 결실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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