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읽 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4:34-38, 42-49, 58-67
34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38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42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43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44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도 길으리 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46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47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 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58 리브가를불러그에게이르되네가이사람과함께가려느냐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 들을 보내며 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 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 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 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 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응송 | 시 72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서신 | 롬 7:15-25a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 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내가한법을깨달았노니곧선을행하기원하는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지체속에서한다른법이내마음의법과싸워내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복음 | 마 11:16-19, 25-30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묵 상 | meditatio
1. 롬 7:21-23을 묵상하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바울에게 함께 있던 것은 무엇이며, 바울은 그 정체를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2. 롬 7:25을 묵상하십시오. 죄의 법에 사로잡혀 힘겨워하던 바울이 감 사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로 말미암음입니까?
3. 마 11:28을 묵상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에게 로 초청하시며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Oratio |5-10분
■ 묵상나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느덧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휴가의 도시 해운대에도 서서히 쉼을 찾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파 라솔 아래 몸을 누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쉼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메튜 에들런드가 쓴 휴식'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이 런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나 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쉬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이 늘 피곤한 이유는 휴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휴식의 '방법'이 틀려 서이다. 진정한 휴식은 회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회복을 도와주는 좋은 방법의 쉼이란 뭘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시며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한편 서신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해 힘겨워하는 사도 바울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결국 메튜 에들 런드의 말대로라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힘겨워하는 이유는 쉼을 얻는 방 법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건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바울의 심정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서신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 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롬 7:15
지금 바울이 호소하고 있는 힘겨움의 정체는 자기 안에 발생한 내적 분열입니다. 사실 바울처럼 경건한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 이러한 내적 분 열 가운데 있다는 것이 어느 면에서 이해가 안가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정 직하게 우리 내면을 돌아보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 음과 삶의 불일치' 이것이 우리 삶을 곤고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말 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내적 분열이라는 자기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그런 역설적인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그 는 지금 자신이 죄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독교 전통이 원죄라는 말로 지칭하는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 이 '자기중심성' 말입니다. 물론 우리 속에는 또 다른 지향이 있습니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 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하고 맙니다. 그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성찰에 직면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 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 게있으나선을행하는것은없노라내가원하는바선은행하지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롬 7:16-20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라는 책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 실, 내게는 명령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 하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계속해서 나의 최선의 의도를 좌초시키고 있다면, 분명 내게는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는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뜻을 품을 수는 있으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로 결심하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나 는 결심하지만, 결심만 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내면 깊은 곳 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배하고 맙니다."만일 자기가 율법으로 인해 의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로서 율법이 선 한 것임을 시인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번번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 의 한계를 절감하며 바울에게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성 어 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우리가 왜 악(惡) 앞에서 무능한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肉慾, libido)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다." 공감이 가십니까? 의지의 왜곡에서 육욕으로, 육욕에서 버릇으로, 버릇에 서 필연으로, 그리고 필연에서 노예 상태로까지 이어지는 이 악순환을 어 떻게해야끊을수있을까요?이것을끊지못하면우리는여전히죄의종 이되어살수밖에없습니다.굳게결심을해보아도우리는마치자석에 끌리는쇠붙이같이자신도모르는사이에육욕에이끌려가곤합니다.우 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 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습니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성 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 니다. 절망스럽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한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 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 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롬 7:21-23
바울의 이 고백 안에는 그가 목격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목격한 인간 실존이 어땠습니까? 마치 프로이드가 의식과 무의식을 이야기 한 것과 비슷합니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발견입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초자아(super-ego)와 자아 (ego), 그리고 본능(Id)으로 구분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초자아는 양심의 소리이고, 이성의 소리이고,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이고 도덕적 규 범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본능인 이드(Id)는 타락한 본능 즉 야수적 성향입 니다. 그리고 자아(ego)는 초자아와 본능을 오가는 인간의 외면(外面)입니 다. 만약에 자아가 초자아의 지배를 받지 않고 본능의 지배를 받으면 짐승 적인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자아가 초자아의 통제를 받을 때는 본 능을 극복하고 양심과 이성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목격 한 인간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자기 안에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죄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도 내 안 에 있습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다른 본성 이 독버섯처럼 나를 장악합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이 엄청난 전쟁이 하 루도 거르지 않고 내 존재 안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을 것 이냐 짓지 않을 것이냐? 선을 행할 것이냐 행하지 않을 것이냐? 사람을 의 식할 것이냐 하나님을 의식할 것이냐? 마침내 바울은 이렇게 절규합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24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죄의 본성,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 고싶지만그러지못하는동안그가얼마나심하게내적통증을느꼈는지, 이절규를통해알수있습니다.그런데그가정말힘겨워하는또하나의 이유가있습니다.선을행할수도있고악을행할수도있는그열쇠를자 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악을 행하면 속편하게 저지르고 핑계라도 대볼 수 있겠는데, 율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도,본능을따라악을행하는것도순전히자기의지로결정하고그책 임또한자기가져야한다고하니바울은그게너무고통스러운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의 이 곤고함과 탄식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현실적인 사안입니다. 여러분은 이 내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계십니까? 아 니면 아직도 전투 중에 계십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패하고 계십니까? 그 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가다 보면 돌연 사도 바울의 어조가 바뀝니다. 자기 의 내적 한계를 부여안고 힘겨워하던 바울이 돌연 어조를 바꾸어 주님은 찬미하기 시작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롬 7:25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바울의 이 고백은 사실은 거저 나온 것이 아 닙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율법적 인 노력에서 연속적인 좌절을 맛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라며 뼈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부짖음을 토해냈던 바울이 그러나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 안에 있던 내적 싸움을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 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롬 8:2에서도 바울은 죄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죄 와 사망의 법에서 인간을 해방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 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의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에 대해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좋은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율법으 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혈통과 율법의 해박함과 열정은 그의 지성을 한껏 빛내주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신의 혈통도, 그리고 자신을 그토록 빛내주었던 율법도, 자기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 하도록 하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돌려세우셨을 때, 그는 비로소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고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 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마 11:25, 26
'환희의 찬가'라고 불리는 이 구절에서 주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를 향해 감사하고 계십니다. 그 감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의 신비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 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금 바울을 떠올리게 됩니다. 과거에 그가 자랑했던 혈통과 지성을 만약 그가 끝까지 고집했더라면 그의 존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바울이 끝까지 자신 의 지혜를 고집하고, 그 지혜를 통해 획득한 율법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끝내감사의고백을할수없었을것입니다.하지만그는자신이과거에 자랑했던 것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모두 버렸습니다.(빌 3:8)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했습니다.(빌 3:8b-9) 이것은 작은 결정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자기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혈통과 학벌입니다. 바울은 그걸 다 포기한 것입니다.다른사람과자신을차별화시킬수있는세속적 으로 가장 결정적인 수단을 그가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 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혈통으로 인해 감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 성으로 인해 감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유진 피터슨 목사는 앞에서 말씀드 린 '메시지'라는 책에서 바울의 이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선 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의지가 굳건하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인식이 올바르냐 그르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그 리스도를 신뢰하느냐 아니면 불신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 는 삶"일 때, 비로소 우리는 갈등과 힘겨운 투쟁을 넘어 바울과 같은 감사 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 는 악한 본능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 믿 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그럼에 도 우리의 결론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초청합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마 11:28-30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교리적인 수락이 아닙니다. 지난한 내적싸움의고단함에서벗어나그리스도안에서진정한쉼을얻을수있 는 것은,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 마음이 겸손하신 예수님과 하나의 멍에 를멜때,그리고성령의도우심안에서주님께배우기를멈추지않을때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끊임없는 정진 즉 꾸준한 영성생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치 율법조항처럼 복음을 목에 달고 다니고 말면 우리는 여전히 맛을 잃은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는 곤고함과 별반 다를바없는지극히종교적인갈등에서벗어날수없습니다.바람같으신 성령께서임재하셔서내영혼이그분숨결로가득차고,그런중에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에서 배우고,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멍에를 함께 지 고,주님의참된제자가되어같은길을갈때,비로소우리는예수님안 에있던그쉼과감사를회복할수있게됩니다.오늘말씀이머리에 수긍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머리에 방치하지 말고 가슴으로 끌어 내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현존 가운데 우리가 심장이 뜨겁도록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들일 때, 그 때 우 리는 교리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과 일치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쉼이 여러분 내면에 찾아오고 참된 감사가 가슴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관 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 천 | Praxio
1. 죄의 법에 사로잡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2.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함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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