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5주 소명召命, 깨어있음의 열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삿 4:1-7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 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 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 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 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응송 | 시 123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서신 | 살전 5:1-11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 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 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 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 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복음 | 마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 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 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 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 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 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 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 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25:21, 23을 묵상하십시오. 적은 일에 충성한 자들에게 주인이 내 린 두 가지 보상은 무엇입니까?
② 삿 4:1을 묵상하십시오. 신앙적 긴박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에훗이 죽은 후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③ 살전 5:5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자지 말고 오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소명召命, 깨어있음의 열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스물다섯 째 주일이자 한국교회가 함께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굳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농사야말로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생계수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농촌과 농업이 소외당하다 보니 전업으로 농사짓는 분들이 점차 사라지지만 그러나 농부가 없다면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산업이 발전하고 수출이 잘 되어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만, 농산물도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삶을 단지 경제 논리로만 생각하면 생명의 깊이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대개 도시에 사는 우리는 쌀을 시장에 가서 돈 주고 사 오면 되는 상품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사고하며 산다면, 그것은 자신과 사회를 '상품'을 매개로 바라보는 지극히 속물스러운 태도라 하겠습니다. 자칫 그런 사고가 굳어지면 우리는 모든 사물을 돈으로 교환되는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고, 심지어 사람마저 상품으로 인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쌀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느끼고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벼농사 안에 깃든 생명의 차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의 한 해의 벼농사에서 펼쳐지는 온갖 조화로운 생명현상은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빛과 빗물이 어우러지고, 농부들의 정직한 땀까지 버무려지며,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열매 맺는 생명의 신비가 배여 있습니다. 농부의 벼농사에 깃든 이 황홀한 생명을 관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창조영성에 눈을 뜬 참 신앙인이 분명합니다. 참되고 진정한 추수감사는 이러한 창조영성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대하는 이러한 영적 태도는 비단 농사만이 아닌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사려 깊게 살도록 이끌어갑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도 그 중 하나이겠습니다. 마태가 전해주는 오늘 비유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사람의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그 서문을 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마 25:14, 15
마가 역시 이 비유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다만 마가는 이 비유를 소개하며 '깨어있음' 자체의 중요성에 무게를 둔 반면(막 13:34), 마태는 오늘 말씀에서 '종말론적 깨어있음'을 강조하면서도, 그 깨어있음의 기준을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마태를 통해 이 비유를 읽는 독자들은 자기 내면의 깨어있음의 증거로서 일상에서의 자기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며,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하나의 장면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종들을 향한 주인의 신뢰와 사랑입니다. 만약 종들이 주인의 이런 마음을 속 깊게 헤아릴 수 있었더라면, 주인이 맡겨준 소유를 단지 돈이나 재산이 아닌 소명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창조영성에 눈 뜬 농부가 농사일을 그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일이고, 생명을 가꾸고 결실하는 사역으로 여겨 소명감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소명이 있을 때만 농부는 자신이 흘린 땀과 추수한 곡식에 보람 있어 하며 햇빛과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렇듯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들이, 그것을 단지 돈이나 재산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느냐 아니면 소명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다름을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배우게 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마 25:15)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고, 노동자의 20년 수입임을 가정해 볼 때,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참으로 높이 평가해준 것입니다. 그렇듯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 형상을 따라 지어져 우리들 각자 안에 내재된 재능을 드높이 평가해 주시고, 각각의 고유한 재능에 맞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는데, 그 재능이란 우리의 지적, 감성적, 의지적 재능들이고, 더 나아가 영성적 재능들입니다. 우리는 이 재능들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고, 재능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주인이 떠난 후 종들의 각각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소개합니다.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마 25:16-18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바로 가서'(마 25:16) 자기 재능을 발휘해 장사를 합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같은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맡김'과 '소명' 사이에 어떤 부조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주인과 종들의 태도가 닮았습니다. 주인도 종들도 서로 간에 신뢰로 가득 찬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바로 사도 바울에게서 봅니다. 그가 고전 15:10절에서 하는 고백은 감동적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기 바울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떤 간극을 보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하나님을 다른 객체로 보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이고 자기 재능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면서도 그 수고를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수고마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현존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제자들 가운데 강림하신 것은 함께 거하시고, 이전에 행하신 것보다 더 완전하게 행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님을 맞아들임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완벽한 일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서 마태가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런 신실함입니다. 마침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결산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마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돌아온 주인에게 칭찬 듣는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해 줍니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마 25-19-23
우리 같으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무슨 일을 해서 그런 결과를 내었는지 궁금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이 주인이 고마워하는 건 단 한 가지 그들이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적은 일'이란 게 뭘까요? 자기 재능을 믿고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인의 마음과 함께하려 한 진실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이 남긴 달란트는 모두 그 진실함이 맺은 열매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주인이 그들을 칭찬하며 남긴 말입니다.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마 25:21, 23
바로 여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성'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테오파네스 수도사 역시 크리소스톰의 설명을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나무가 과실의 완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취입니다. 과실은 나무에서 완전히 발육됩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인도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발육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에 오직 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은 작은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발육되어가노라면, 과실이 나무에서 발육되어 나무에 걸맞게 완성되듯, 우리도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이루고, 그 하나 됨으로 인하여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곳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다소 극단적인 격언은, 교회 밖에는 이 '주인의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유의 조명은 한 달란트 받은 자를 비춥니다. 그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 마 25:24, 25
앞의 두 사람과 이 사람이 현저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이 마치 나무에서 발육되는 과실처럼, 주인의 마음에 접(椄) 붙여져, 주인이 원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이미 마음부터 주인과 분열된 까닭에, 삶의 결실도 주인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동떨어진 방향으로 치닫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굳은 사람'이라는 어원은 '박정하고 포악하고 거칠다'란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주인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멸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주인의 마음에 배타적인 사람이었고, 주인의 달란트를 맡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릇된 관계는 그릇된 편견을 만들어냅니다. 그릇된 편견은 그릇된 두려움을 양산합니다. 그 편견과 두려움이 주인의 사랑을 배척하고 맡겨준 소명마저 땅에 묻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행복하다면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쩌면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적 게으름 속에서 삶의 수위(首位)에 돈을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주인은 화를 내고 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단정합니다(마 25:26). 그리고 이 종이 가지고 온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고 맙니다(마 25:28). 주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 마 25:29
여기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차이'였고 '깨어있음'의 차이였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본 미련한 다섯 처녀나, 오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소명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소명을 상실하고 잠들어버렸듯이,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소명을 상실하고 주인의 것을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주인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차라리 주인이 오지 않기를 바랐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 마 25:19
주님의 다시 오심은 더뎌지고 있을 뿐이지 안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우리는 신앙의 긴박감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벌인 사사시대에 일어난 참상을 목격하게 됩니다.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 삿 4:1-3
이 말씀의 원문을 번역하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그 악(惡) 행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에훗이 죽었다"입니다. 이 어순대로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영적 지도자인 에훗이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우상숭배에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훗이 죽고 난 후에도 그들은 그 악을 떠나지 않고 계속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당시에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진 야빈에게 이십 년 동안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 여호와께 부르짖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부르짖음은 회개가 아닌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학대의 이유를 자신들이 저질러온 악행에서 찾지 않고 힘이나 무기가 없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야빈에게 받는 압제를 하나님이 이십 년씩이나 방치하셨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어둠속에서 나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심판을 당해도 심판인지 모르고, 그러기에 일상에서의 삶도 게으름과 핑계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영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부름 받은 소명을 다하며 행복해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살전 5:1-3)에 대해 경고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 살전 5:4
이 말씀의 뜻은 간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에 있지 않고 깨어 있으면, 항상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의 날이 다가와도 그 날이 은밀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비록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고 있다 할지라도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매우 복음적인 사실로 접근합니다.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 살전 5:5
성경에서 '빛(포스 φῶς)'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빛의 아들'이란 단순히 밝음 속에 있는 것, 그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이미 존재가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둠속에 잠들어 있거나, 어둠에 속해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응송인 시편에서 하늘에 계시는 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을 부끄럽게 합니다.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처럼 깨어있는 시선으로 순일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면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가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입니까? 내게 주신 달란트를 헤아리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미 있는 소명을 보아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입니까?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불평할 것 천지인데, 빛의 자녀로 깨어있는 까닭에, 범사가 감사로 채워지고 하루하루가 감사뿐인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감사함의 이유를 묵상하는 이 계절에, 우리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나를 신뢰해서 맡기신 일들이 마지막 날 당신의 즐거움에 참여시키려는 은총임을 깨달아서 주님을 향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고, 각각의 삶의 자리를 소명으로 받아들여 힘써 달란트를 남기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직업을 단지 돈벌이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재능과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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