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4주 그런즉 깨어있으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수 24:1-5, 14-25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 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 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 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 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 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 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 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 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 이다 하는지라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 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 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응송 | 시 70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서신 | 살전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 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복음 |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 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 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 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25:13을 묵상하십시오. 성도가 '일상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 는 무엇입니까?
② 수 24:14을 묵상하십시오. '깨어있는 자'를 여호수아의 표현대로 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③ 살전 4:14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신자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예비 된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런즉 깨어있으라
입동이 닷새나 지난 이때, 영적 시간인 교회력 역시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늦가을에서 이른 겨울로 들어선 지금 세상 사물은 덧없음을 보이고 있지만, 영적 시간인 교회력은 신자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맞으러 서서히 가고 있는 우리 신앙의 발걸음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합니다(마 22:11-14 참고).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 져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2:13). 이 때문에 교회력의 마지막 세 주간은 연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깨어 기다릴 것'을 권고합니다. 사실 이건 새로운 권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끊임없이 권고하고 있는 복음 메시지의 본질을 이번 주일 복음서는 '열 처녀 비유'(마 25:1-13)를 통해, 다음 주일 복음서는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해,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복음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를 통해 권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4:17)라고 동일한 말씀을 외쳤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권고도 깊이 되새겨야 하는 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른바 '종말론적 기다림의 시기'를 우리 모두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는 시각에 나의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열 처녀 비유'는 바로 이 '종말론적 기다림'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이 비유는 고전연극의 3단계 형식을 본뜨고 있는데, 1절은 제목이고, 2-5절은 서곡, 6-9절은 본론이며, 10-13절은 결론에 해당합니다. 5절과 6절 사이, 그리고 9절과 10절 사이에 쉬는 곳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신랑은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고, 조연을 맡은 열 처녀들이 주연 배우처럼 본론에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마 25:1
유대인들은 신랑과 신부가 약혼을 하면 일 년 정도는 각자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그러다가 결혼식 날이 오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이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이 도착하게 되면, 신부와 함께 신랑을 영접해서 등불을 켜고 신랑의 집으로 떠나는 연등행렬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초대된 손님들과 함께 혼인잔치를 열게 되는데, 고대 팔레스틴의 혼인잔치는 일주일씩 계속되었습니다. 문제는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열 명의 처녀는 신부와 함께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의 행차가 지연되자 그만 졸음을 못 이기고 하나씩 잠에 떨어졌습니다.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 마 25:2-5
우리는 이 비유가 단지 열 처녀의 삶의 태도와 그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말씀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 비유를 자세히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서두로 해서 세상 만물의 종말과 인간 행위에 대한 최후 심판을 예고하는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장대한 종말론적 흐름 속에 삽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앞에 있는 두 개의 비유 즉 '깨어있는 집주인의 비유'(마 24:43, 44)와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마 24:45-51)에서 '깨어있음'의 중요성이 서서히 강조되어 오던 것이 오늘 복음서인 '열 처녀의 비유'에 이르러 마침내 메시지의 절정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 앞에서 긴장할 뿐 아니라, 나에게 직접 전달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부와 친구들이 모두 깊이 잠들 무렵 한밤중에 그만 신랑이 오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상황을 매우 극적으로 전해줍니다.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 마 25:6-10
미련한 다섯 처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방심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후의 상황을 애처롭게 들려줍니다.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 마 25:11, 1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를 읽으면서 비유에 담긴 메시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신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훗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0, 11).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기다림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말씀을 부여잡고 예수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 다섯 처녀의 슬기로움이란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오랫동안 등불을 켤 수 있도록 기름을 준비한 것에서, 그리고 자칫 낭비하면 모두에게 기름이 부족할 수도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근거로 기름 나누어주기를 거부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자칫 공동체에 위험이 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고 슬기로움입니다. 실제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는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면서 신앙적으로 느슨해지는 사람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굳게 믿고 기다려 왔는데,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내심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서 볼 것은 졸다가 잠이 들어버린 것은 비단 미련한 다섯 처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증언합니다(마 25:5). 마태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도 똑같이 깨어있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마태의 이 기록을 놓고 '문학적인 세련미의 부조화'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부족이나 부조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의 집필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예수님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다림의 신앙'은 점차 '애타는 기다림'에서 '느슨한 형태의 기다림'으로 무디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공동체가 믿었던 것처럼 즉시 오신다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라고 그들은 판단을 굳혀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에 기록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마 25:5)라는 마태의 증언은, 처음의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점차 누그러진 후 당시의 교회들이 보여주고 있던 다소 느슨해진 모습을 훗날 마태는 잠든 처녀들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의 어떤 상황과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이천 년 동안 교회들이 처해 있는 모든 영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처녀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습들입니다. 신랑이 언젠가 올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평온히 잠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의 기다림도 애타는 기다림이 아니라 느슨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모두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시 미련한 처녀들과 함께 슬기 있는 처녀들이 잠들어 있었던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어떤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가 아닌,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똑같이 잠들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결정적인 차이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기름의 차이'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지만 그러나 일상에서 늘 기름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으면서 기름이 없다는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은 사실은 그 즉석에서 형성된 믿음이 아니라 일상에서 준비되어 온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극단적으로 종말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꾸어 가는 '그리스도인다움'이 마지막 때에 이르러 그 진가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온한 일상에서 준비된 기름이란 뭘까요?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의 영적인 생활이겠습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때, 나의 내면이 어떻게 가꾸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직장과 가정과 교회를 오가는 내 소소한 일상 안에서 우리 내면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란 비단 외형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외적 모습보다 훨씬 내밀하고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선 앞에서만 드러나는 나의 감추어진 내면 즉 '중심(中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맨발의 성자라 불리는 이현필 선생은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혀서 평생 동안 가난을 사랑하고, 질병을 찬양하며 정절과 순종, 순명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1961년 6월3일자 그의 일기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께 제 뜻을 강요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 뜻을 기다리고 참는 종 만들어 주옵소서. 제 뜻대로는 아무 것도 허락 마옵시고, 꼭 주님 뜻만 기다리게 해주소서. 아버지여 저를 일초 동안도 안 잊으시건만, 저는 주님 늘 잊어버리옵나이다.
이런 기도가 이현필 선생의 일상이었습니다. 그의 영적 생활은 일상에서 깨어있었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도착하셨을 때, 우리 내면의 상태도 드러나게 될 것인데, 그때 드러난 나의 내면은 과연 어떤 상태일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한 인간의 슬기로움도 그 내면으로 평가되고, 한 인간의 미련함도 그 내면으로 평가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는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을 다듬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영원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마지막 결론을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마 25:13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깊고 진지하게 묵상하는 구도자로써 성령의 임재와 현존하심 속에서 일상을 살며, 신랑이신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날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깨어있음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는 언제나 내일 곧 죽을 것처럼 살아야 할 것이로되, 또한 여러 해를 살 것처럼 제 몸을 다루어야 할 것이니라." 우리의 오늘은 바로 지금 내게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로 여겨서 현재를 죽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고, 내일 떠나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되,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천년을 도모하듯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미 노인이 된 여호수아의 당부를 보십시오.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 수 24:2-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 뿌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편 즉 유프라테스 건너편에서 우상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우상숭배의 가문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오직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인간적 뿌리는 강 저편 이방세계이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이스라엘의 '믿음의 뿌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도 이 가나안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육신의 조상이 하던 우상숭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피 속에는 믿음의 조상도 있지만 우상숭배자의 본능도 함께 흐르기 때문에, 너희 자신을 한 순간이라도 게으름 속에 방치해 두면 언제든지 우상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간곡하게 당부합니다.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수 24:14, 15
여호수아는 이 경고를 막연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너희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라고 촉구합니다. 너희 내면에 잠재하는 두 뿌리 중에서 '지금' 한 뿌리를 분명히 선택해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두 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인간적 뿌리가 내 안에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앙의 뿌리도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뿌리 중에서 매일매일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살전 4:13, 14
이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성도들은 소망 없는 다른 이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살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인간적 뿌리를 따라 본능대로 살지 말고 믿음의 뿌리를 따라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망 없는 이들처럼 슬퍼하며 살지 말고 부활을 믿는 성도답게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미 계절은 겨울로 들어섰습니다. 종말을 체감하는 계절입니다. 사실 우리가 맞이할 종말이라는 것은 우리 생을 멈추어버리는 끝이 아니라 '빛의 나라'의 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등불을 밝혀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마지막 세 주간을 남겨둔 지금 성서일과는 다급하게 '깨어있을 것'을 권고합니다.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마 25:13
이 말씀은 우리를 위협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데리러 오실 분으로서 사랑을 가득 담아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또한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일상에서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우리 내면을 그 분이 기뻐하시는 내면으로 날마다 가꾸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깨어있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기다리는 사람, 우리 모두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겉으로 보이는 신앙의 모습에 스스로 속고 있지 않은가?
② 보이지 않는 내면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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