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3주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수 3:7-17
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 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 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 희가 알리라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 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 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응송 | 시 107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 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서신 | 살전 2:9-13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 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 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 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 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복음 | 마 23:1-10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 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 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23:3을 묵상하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수 3:7-9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후 여호수아는 어 떻게 행동했습니까?
③ 살전 2:12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사람들 앞에서 거 룩하고 옳고 흠 없는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성경 말씀은 '믿는 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힘들고 불편스러운 것이라면 그건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겠습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형제들에게 사용할 때는 그 말씀을 먼저 나에게 사용해 봐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성경 말씀들 중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성경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그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사람들이 '충실히' 들어서, 자기가 심각하게 처해 있거나 연루되어 있는 잘못들, 그리고 그 잘못들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고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교회공동체 안에서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욱 자만심과 겉치레와 위선적인 태도에의 유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성경의 드높은 진리와 가치관을 전하고 있으면서 사실 자신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교회 지도자들이 그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 사고의 방향을 다른 데로만 돌린다면 현재의 불편한 상황은 훨씬 악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말씀의 선포자'일 뿐 아니라 '말씀의 실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혁되는 교회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한데다, 경건의 모양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송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인정하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대개 기도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이들은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경건의 대명사입니다. 그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자주 충돌한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신학적으로 수호하는 이들이었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처럼 그들은 직업적으로 율법과 연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사두개인들에 비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위선에 떨어질 개연성이 훨씬 높았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바로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그들이 와 있었습니다.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 마 23:1-3
주님은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자리란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아마 그곳이 회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그 회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a)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항상 옳기 때문에 그들 말하는 바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마 23:3b). '말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이 없는 것' 그것이 그들 위선의 정체였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폭로해 가십니다.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마 23:4
물론 주님의 이 말씀에는 다소의 과장이 있습니다. 사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율법 수호를 위해 죽도록 수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런 율법을 일반 사람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처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무거운 짐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 율법의 짐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율법을 강요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마조히즘적인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조히즘(masochism)이란 타인에게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면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신을 옹호하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에 마치 연인처럼 집착하며, 거기서 얻는 자학적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떨쳐낸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질병 자체를 빼앗기는 일이 된다. 이 질병이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원적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사랑받는다'는 복음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는 고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 같고,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멍에가 가벼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거운 사슬에 묶이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오늘 현대인의 모든 삶에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앙적 수양을 위해 자신과 형제를 억압하며 거기서 자학적인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경향입니다. 그런 경향이 반복되면서 점점 바리새인이 되어갑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그런 바리새인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마 23:5-7
남에게 보이려면 우선 좋아보여야 합니다. 속은 어떻든지 일단 세련되게 보여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은 자랑스럽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경건하고 유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경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눅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치 예수님께서 경건함 자체를 부정하신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경건함이 부정되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됩니다. 문제는 경건을 앞세우는 삶의 태도입니다. 경건하게 사는 건 필요하지만 그걸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도를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주의의 함정입니다. 경건을 내세우고 기도를 내세우는 게 왜 잘못일까요? 사람이 근본적으로 경건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 대답입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한 척하려다 보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아직 기도의 영성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기도하는 척하려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이런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위선이 악(惡) 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강도나 사기질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보다는 비록 위선이라 할지라도 존경받을만하게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위선과 악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악은 이미 악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은 선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위험합니다. 사이비 이단이 훨씬 위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마 23:9-11
선생 '연(然)' 아버지 '연(然)' 지도자 '연(然)'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일 뿐이지 선생도, 아버지도, 지도자도 될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직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선생이시고, 오직 주님만이 아버지이시고, 오직 주님만이 지도자라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큰 사람은 선생 연(然) 지도자 연(然)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섬기는 자'가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보면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수 3:7, 8
여기에는 어떤 겉치레라는 게 없습니다. 그 앞에 주어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 앞에 순명(順命)해야 할 현실뿐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지도자가 바뀌었으면 취임식부터 한다고 법석을 부렸을 텐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거두절미하고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의 곁에 있어주었듯이 네 곁에도 있어준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게 해줄 테니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해서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들어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일국의 새 지도자로서 어떤 의전(儀典, ceremony)도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순종과 실천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소탈한 믿음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 살전 2:9-12
그동안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살전 2:9).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의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살전 2:10). 그리고 성도들을 대할 때는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권고하고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살전 2:11). 여기에는 그 어떤 허세도 처세술도 보이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이상을 알았기 때문에(살전 2:12) 바울 일행은 밤낮으로 노동을 하고,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는 행동을 하고,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권고하고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바울 일행은 그토록 수고하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가 처음 신앙 때의 순수함을 지켜내지 못하고 신앙의 신실함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영광에 더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랬듯이 말씀도 복음도 선교도 심지어 기도와 헌신도 나의 세속적 야망을 관철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인가부터 내 신앙이 덧없어지고 성경의 말씀이 힘들고 불편스러워졌다면, 언제인가부터 성경의 책망이 내게 주시는 책망으로 읽혀지지 않고, 타인을 향하는 책망이라고 여겨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나의 속사람도 경건하고 '삶의 열매가 경건한'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께 순명(順命)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상을 깨닫고 '지금' '여기'에서 옳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말씀의 종들을 위해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당신께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소서. 그들의 수고에 축복하소서. 그들이 그 수고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당신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려는 열성 때문에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소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에 매달리고 있는 신앙은 아닌가?
② 말씀을 깨달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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