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6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4:19-31
19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가매 구 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 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 우에 벽이 되니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5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 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 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 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 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 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 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 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 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응송 | 시 114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서신 | 롬 14:1-12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 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 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 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 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 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 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 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복음 |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 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 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14:31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큰 능력을 본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② 마 12:32-33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참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느 때부터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③ 롬 14:3을 묵상하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사람은 저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진 판단의 기준이 명료한 진실을 흐려놓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 즉 신성한 사역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룩의 차원이기에 세속의 기준과 달라야 하고 반드시 꼭 그래야만 합니다. 특히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이르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근접해야 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視野)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도록 영적감화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들려줍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 항상 거울처럼
제 안에 계신 주님을 뵙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런 사람은 정욕과 악한 생각에서 벗어나느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며
부끄럽고 지저분한 말을 멸시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는 악한 자에게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로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제 영혼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는 위대한 목자의 쇠막대기로 항상 경계하리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 이웃에게 순종하며
감사함으로 반대를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러한 사람은 주님께 고백자의 면류관을 받아쓰리로다.
오늘 성서일과를 곰곰이 묵상하다보면 세 개의 본문이 각각 하나의 주제로 삼색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삼색의 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의 공통된 주제'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삶에 주어지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의 있음과 없음이 우리를 얼마나 다르게 하는지를 이 말씀들은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믿음을 갖게 되는 여정에 관한 말씀이고, 서신서는 '믿음이 서로 다른 형제'를 대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향한 경외감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의 말씀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히브리들이 모세와 함께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장면에서 출애굽기 저자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나 모세의 능력의 지팡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집단은 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이집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해 도망가는 중이고, 애굽의 군인들은 그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 장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면에 애굽은 최정예 기동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따라잡는 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뜻밖의 상황을 펼쳐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 출 14:19-20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중간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이어 구름기둥이 그 중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상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님은 세 단계로 애굽 군대를 궤멸시키십니다. 첫 단계는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새벽녘에 야훼께서 불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자 이집트 군대는 갈팡질팡하였다 | 출 14:24 공동번역
두 번째 단계는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꼼짝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 애굽 군대는 그만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 출 14:25
세 번째 단계는 바닷물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입니다.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 출 14:27, 28
지금 이 홍해의 기적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람은 이 사건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서 사람의 역할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오직 하나님의 활동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홍해의 기적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 출 14:31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경외'와 '믿음' 회복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경외감이 없으면 사람은 방자해지고 하나님의 자녀나 이웃을 대함에 있어 무례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하나님 향한 경외감 속에서 형제를 대하도록 이끄십니다.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마 18:21
베드로가 이렇게 물은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형제가 너에게 대해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함으로서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고, 자기감정을 내세워서 꾸짖기보다는 그를 빛 아래 세워 '권고' 함으로서 그가 자기 잘못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갖도록 도와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친구로서 살아가는 두세 사람 즉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고, 그렇게 땅에서 푸는 사람만이 하늘에서도 풀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마 18:18)이 지난 주 복음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받아서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한 겁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시한 일곱 번의 용서는 당시 유대인 문화에서 보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외경인 집회서 19:13-17에 보면, 내게 죄를 범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권고하고 있고, 랍비들은 죄를 범한 이웃을 세 번 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암 1:3). 그러니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용서는 얼마나 관대한 수치입니까? 그러나 이 일곱이라는 관대한 숫자가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차원을 맞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마 18:22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용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너에게는 용서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려 할 때, 그 관대함이 내 인격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려면 관용하는 인격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평생 행할 것 한 가지만 짚어달라는 제자들에게, 용서할 '서(恕)'를 꼽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용서했다고 여기지만, 마음으로 화해되지 않은 용서는 자칫 해결되지 않은 분노로 내면화할 수도 있겠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만이 아닌 자신의 감정까지 모두 헤아려줘야 하는 참으로 섬세하고 어려운 작업일 뿐 아니라 엄격한 자기훈련이 필요한 작업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를 묻는 베드로에게 비유를 들려주심으로 용서의 새 차원을 제시하십니다.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마 18:23-27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유대 전역에서 거둔 1년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면 얼마나 큰 금액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빚진 자'를 뜻하는 단어가 원문에는 '오페일레테스, ὀφειλὲτης'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페일레테스'가 주기도문에서도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죄지은 자'를 뜻하는 '오페일레마, ὀφεὶλημα'로 쓰였습니다. 같은 단어가 '빚진 자'로도 쓰이고 '죄 지은 자'로도 쓰이는 겁니다. 결국 비유에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금이 그 빚을 다 탕감해 주듯,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면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마 18:28-34
백 데나리온은 자기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탕감 받은 은혜를 잊고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무정하게 굽니다. 그 무정함은 곧바로 그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빚을 탕감해 주었던 어진 임금은 매우 화가 나서 '빚을 갚으라'며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그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 빚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임금에게 입은 은혜는 남아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빚진 친구는 만났을 때, 임금의 은혜를 기억했어야 옳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자기에게 자비로웠듯이, 자기도 친구에게 자비로웠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 달란트 빚과 백 데나리온 빚이 다르듯이,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와 내 형제가 내게 지은 죄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죄를 지은 형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형제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용서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그가 유혹받고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용서는 자기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할 때, 비로소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서신서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롬 14:1, 2
당시 로마교회 안에는 믿음이 연약한 자와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첨예하게 맞섰던 것 중에 절기 문제와 음식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사람이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은 신앙적 정결과 상관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고기를 먹으면서 음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이들이 소위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율법이 금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애써 채소만 먹으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소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롬 14:3
서로 자기 판단을 절대화해서 함부로 타인의 신앙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자든 먹지 않는 자든 그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을 내가 뭐라고 판단한단 말입니까? 나와 믿음의 형태가 다른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는 교만이고, 하나님은 그 교만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롬 14:10
오늘 말씀은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반응하며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과 같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는지, 때때로 내게 잘못한 형제를 만났을 때, 내 기질과 성품으로 그를 대하지 않고, 나의 큰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께 크게 용서받은 자로서, 경외감과 겸허함으로 형제를 대하고 있는지, 나와 믿음의 형태가 다른 형제들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그'를 함부로 비판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외감으로 형제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성과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언급합니다.하나님 중심의 삶은 다음의 특성을 가집니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과 채워주심에 의존함
○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춤
○ 하나님 앞에 겸손함
○ 자기를 부인함
○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환경을 바라봄
반면 자기중심의 삶은 다음의 특성을 가집니다.
○ 인생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춰짐
○ 자기를 신뢰하며 자기를 세우고 높임
○ 자신과 자신의 능력에 의존함
○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환경을 바라봄
거룩함을 이루어야만 할 나여! 너무 오랫동안 게으르고, 교만하고, 좁으러진 생각에 갇혀 살었습니다. 이제 맘을 터야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살고 있는 저여! 의무를 느끼고 펼쳐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보혈을 잘 몰라서 영혼이 깨나지 못하고 어둡고 약합니다. 1961. 5. 6 일기
은혜로 사는 저입니다. 선공(善功)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오라 거저 주시는 은혜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선(至善)하시기 때문입니다. 1952. 5. 2 일기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마음 깊이 경외하며 참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 없는 '자기중심적' 신앙인이지는 않은가?
②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모든 상황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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