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5주 새로운 시대의 사고(思考) 법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2:1-14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 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 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 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 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 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 대로 지킬지니라
응송 | 시 149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서신 | 롬 13:8-14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 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 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 하지 말라
복음 | 마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 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 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 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 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12:2을 묵상하십시오. 유월절이 속한 '이 달'을 '달의 시작 곧 해 의 첫 달'이 되게 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② 롬 13:11-14을 묵상하십시오. 자다가 깰 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 음을 아는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③ 마 18:18-20을 묵상하십시오. 시대의 표징을 아는 사람의 삶을 모 습은 어떻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새로운 시대의 사고(思考) 법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역사가 2천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을 교회의 탄생시점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상으로 보면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교회 공동체의 모형으로 보기도 하고, 스데반의 최후 변론에 등장하듯 출애굽한 히브리들의 광야생활도 원시적 형태의 교회였다 하겠지만, 그러나 교회가 사회적 집단으로 등장한 것은 2천 년 전입니다. 즉 예수님의 지상사역 시기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이때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은 바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매일 수도 있고, 풀릴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6:19). 제도적 교회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열흘 뒤, 성령의 강림과 함께 탄생했습니다(행 2:1-47). 이 때의 교회는 인간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서 누구나 현상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은 얼마 전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라는 사람을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창조부터 늘 있었지만, 오순절부터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깃들어오셨습니다(행 2:3-4). 그래서 교회는 거룩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사회의 다른 집단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기에 사회성을 띱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동체인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집단인 교회의 특성을 직시해야만 교회가 걸어갈 길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 해운대교회는 새 성전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두 가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거룩한 공동체로서 해운대교회는 어떠해야 할까?
사회적 집단으로서 해운대교회는 어떠해야 할까?
하나님께로부터 교회 이전의 소명과 비전을 받은 이후로 이 물음은 우리교회의 화두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이 두 측면은 성격상 모순되거나 배타적인 면이 강합니다. 교회다움과 거룩성을 표현하려니 이웃에게 문턱이 높아질 수 있고, 이웃들이 자유로이 다가올 수 있는 교회를 지으려니, 교회다움과 거룩성을 표현해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페라 건물을 먼저 주셔서 우리교회는 이웃이 머뭇거리지 않고 다가올 수 있는 선교적 공간을 확보하였고, 영감 넘치는 예배를 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가짐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믿음을 신실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예배와 선교, 교육과 봉사 등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는 환경이 새로워진 만큼 우리 마음과 자세에도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변화'가 요청됩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약 6만 번의 생각을 하는데, 그중 95퍼센트는 어제 했던 생각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적인 생각보다는 관성(慣性)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땅으로 이끄심으로 우리를 낡은 관성의 트랙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배, 선교, 교육, 봉사 등에 있어 새로운 영적성찰과 비전을 일구어 가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우리는 지난 430년 간 구태하게 이어온 노예들의 삶의 관성을 깨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출 12:1, 2
이 말씀에서 우리 시선을 끄는 것은,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유월절이 속한 이 달을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출 12:2)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변화는 그렇게 급박하게, 그리고 부지(不知)중에 찾아왔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그들이 그 동안 상식으로 알고 있던 '달'의 개념을 깨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하지(夏至)때,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에 맞춰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랜 세월 애굽의 문화 안에서 살아온 히브리들은 자연스럽게 하지(夏至)를 지나 가을이 되면 새해로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제정하신 달, 즉 태양력으로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때를 '해의 첫 달'로 제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있는 '이 달'(출 12:2)을 의미 있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매 해 반복해서 찾아오는 새해를 유월절과 관련지어 이해함으로써, 나머지 모든 달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시간을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430년을 노예로 살면서 그들은 뼛속까지 노예의 DNA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노예이고, 말하는 것도 노예이고, 사소한 행동과 습관들까지 노예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존의 시간 환산법을 초월해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정해 주신 이유는, 이제부터는 그들이 노예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된 자유인이요, 선택받은 선민(選民)임을 몸으로 기억해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노예로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통치를 받으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도 노예의 시간이 아닌 영적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식으로만 알게 하셨다면 그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노예의 시간과 식습관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살아갔을 것입니다. 사람을 지식으로만 깨우쳐주면, 머잖아 잊을 수도 있고, 몸으로 체화되지 않은 까닭에 삶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스승인 이집트의 성 마카리오스는 '인간은 육(肉)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존재이고, 그러한 상태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이란, '영과 육 모두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 안에 들어가게 함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부터 종말론적 현실 즉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정하셔서 그들의 몸의 습관이 변하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노예가 아닌 선민임을 몸으로 체득하게 하신 것은 사람의 특징을 세심하게 배려하신 은총이었습니다.뿐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들에게 유월절 의식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장차 그 의식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첫 번째 의식은 어린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 출 12:3-7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해의 첫 달인 '아빕 월 열흘'에 어린 양을 마련하라고 하셨습니다. '각 가족대로' 어린 양을 취하라는 말씀은, 가족이 이제부터는 혈연공동체를 넘어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고, '라바아트, תיבל' 즉 '그 식구를 위하여'라는 말씀은, 어린 양의 피가 '각 개인'의 구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4일 뒤인 '아빕 월 열 나흗날 저녁 때' 양을 죽입니다. 그리고 양의 피를 양을 먹을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의 맏아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군대를 일으키거나 반란을 꾀하도록 하시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사용하신 건, 구원이 사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두 번째 의식은 식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식탁에서 나누는 '음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가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 출 12:8-10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게 하셨다면, '고기'는 먹음으로서 출애굽에 필요한 힘을 얻고, 훗날 유월절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해방의 은총을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식사는 단순히 음식만을 나누는 식사가 아닌, 엄숙하고 의미 있는 영적 의식으로서의 식사이자, 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식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유래된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을 부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그리고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희생을 노래로서 부르며, 우리 역시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희생의 은총을 기념하는 것은 '말씀을 귀로 듣고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때때로는 훨씬 깊고, 선명하며,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6세기에 활동했던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성경의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을 '성만찬예배'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들(Divine Name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는 정신을 신중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서, 생각과 존재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분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을 침묵으로 공경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의 계몽적인 광선에게로 들려올라갑니다. '생각과 존재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어찌 글자로 된 성경만을 통해 다 이해할 수 있겠으며, 목사의 거친 설교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침묵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유래된 성만찬 식탁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몸 안에 모시고, 그분을 느끼고, 관상함으로서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인식하려 했던 신앙을 넘어 가슴으로 만나고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출 12:11
유월절 희생제물을 먹는 가장 주요한 방식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그날 밤 안에 속히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희생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남는 음식을 소비하는 의미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뜻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동시에 신과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가올 신의 은총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에는 그들의 기대가 그날 밤 안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지난 430년 동안 중단되어 있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는 말씀도 그러고 보면 기대가 한껏 배인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성을 느끼도록 해 주는 말씀입니다. 언제 출애굽이 감행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긴박성을 넘어 기대와 설렘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으로서의 출애굽 여정을 그렇게 기대와 설렘으로 맞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신서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성도의 기대와 설렘에 찬 모습을 봅니다.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 롬 13:11 공동번역
여기서 바울이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때'는 원문에 '호라 ὥρα'로 되어 있는데, 마치 '의미 있는 시간', '하나님의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 καιρός'처럼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때'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이 '때'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때'를 모르면 사람은 방자해 집니다. 이 '때'를 모르면 사람은 게을러집니다. 사람이 탐심과 탐욕, 분노와 영적 태만 등에 빠지는 것은 지금이 영적 시간으로 어느 때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노예의 관습 그대로, 지식으로는 자신을 노예라 여겨 굴종하고, 감정으로는 한없이 연민에 겨워 슬퍼하며, 의지란 아예 없는 삶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 삶의 낡은 트랙을 깨뜨리시고 자유인으로서 사는 법을 시간에 담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은 이후로 반복되어 찾아올 매 해의 첫 달을 해방절로 지키며, 선민으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으로 사고(思考)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고, 감정으로 느끼고 성찰하며 깨닫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감정 통제에 서툴러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꾸중과 심판을 당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의지를 북돋아주시며, 그들을 통해 아름다운 대안 공동체를 일구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 건지, 가난하거나 연약한 형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자연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노예로부터 차츰 선민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읍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롬 13:12-14 공동번역
빛의 갑옷을 입고 단정하게 사는 것,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고, 영(靈)의 일을 도모하며 사는 것, 거기에 자유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참 자아(自我)'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마 18:18-20
'매다', '풀다'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주로 내게 죄를 지은 형제를 권고해서, 그가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할 때 '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어떤 사람이 합니까? 때의 소중함을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밤이 새어 낮이 가까웠음을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그는 구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기에 다툼이나 시기나 원망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죄와 사망에 매여 있는 자를 찾아다니며 그를 풀어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두 사람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고, 두세 사람만이 내 이름으로 모인다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는 사람들의 수(數)로 그 가치가 규정되는 곳이 아닙니다. 반복되어 찾아오는 매해의 첫 달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맞이하고, 나머지 이어지는 모든 달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호라 ὥρα' 즉 '영적 시간'으로 채워내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 밤이 새어 낮이 가까웠음을 알아차리고, 내게 죄를 지은 형제를 권고해, 그가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땅에서 푸는' 사람들, 그렇게 때를 분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 그렇게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가는 사람들, 참 교회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런 교회가 영적 교회라고 고백한다면 새 성전에서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지향해가야 하겠으며, 교회다움과 그리스도인다움을 완성시켜가야 하겠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어제까지 살아온 낡은 관성으로 오늘을 살려하지 않는가?
② 때를 분간해 매 순간을 영적 시간으로 채워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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