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3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8-2:10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 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 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 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 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 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 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 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 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 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응송 | 시 124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서신 | 롬 12:1-3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 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 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복음 | 마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 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 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 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 르지 말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2: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이름에 그의 어떠 한 삶을 담아주셨습니까?
② 마 16:5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 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롬 12:3을 묵상하십시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란 어떠 한 것이며,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생각의 기준'은 무엇인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노자는 도덕경 제2장에서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인데 '사악이(斯惡已)'요,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인데 '사불선이(斯不善已)'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이 아름답다고 알아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이 더러움이요, 이것이 선하다고 알아 선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선하지 아니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미(美)'와 '악(惡)'을 가려서 한쪽을 고집하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선(善)이고 저건 불선(不善)이라고 선과 불선을 가려서 한쪽을 고집하는데, 바로 그것이 더러움이요, 선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토록 선과 악, 선과 불선을 가려 한쪽을 고집하는 이유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에 의하면 분별지(分別智)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살다 보면 선악 간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자 역시 판단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다만 판단을 하려면 무슨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이라는 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기억하고 따라서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절대화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노자에 따르면 그 기준을 '도(道)'에 두라는 것이고,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 보면 성경은 한결같이 좋은 기준과 관련해서 '이름' 즉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에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담아주십니다. 바로의 딸은 나일강에서 건져낸 히브리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우세스(Mouses)'라고 짓습니다(출 2:10). '건져냄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 이집트식 이름은 히브리 발음을 따라 '모세(Moses)'로 고쳐지는데, 그 뜻은 '장차 자기 백성을 건져낼 자'였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장차 그가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자녀들을 시련과 죽음의 강에서 건져내는 것이었는데, 모세가 바로 그 일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물으신 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예수는 훗날 제자들이 삶으로 따라가야 할 모본이며, 내가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훗날 뒤따를 그들 삶의 기준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b)고 당부하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당부합니다. 분별과 믿음은 우리의 지혜로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이 되었으면, 이후로는 '그 이상의 기준'을 가지지 말고 그 기준에 입각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는 모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비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히브리 자손들은 애굽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살게 된 연유는 창세기 후반부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야곱 시대에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 덕분으로 애굽의 곡창 지대 중 하나인 고센 땅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 뒤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히브리 자손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전쟁 시에 그들이 적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노동 강도를 높였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 출 1:10, 11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 출 1:14
당시 이집트의 건축 토목 사업은 이집트를 지탱하는 근본이었습니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나 오벨리스크, 왕궁 등이 그 시대의 산물들입니다. 고대의 토목공사는 거의 사람 손으로 다 했는데, 노예들의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니까 소수민족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수민족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이유 중에는 그들의 출산율을 저하시키고자 하는 저 출산 정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칫 소수민족의 인구가 많아지다 보면 언젠가는 저들이 정치적으로 합병해서 애굽에 대항해올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노역만으로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자 파라오는 새로운 정책을 실행합니다.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 출 1:15, 16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립니다(출 1:17). 마침내 애굽 왕은 모든 백성들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리기에 이릅니다(출 1:22). 이 이야기는 예수 출생 시에 헤롯이 베들레헴과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아이들 중에서 두 살 아래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이야기와(마 2:16)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레위 지파에 속한 한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출 2:2b에 보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라고 했는데,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같은 상황에 대해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히 11:23)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출애굽기 저자는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 아이를 숨겨두었다고 하는 것이고, 히브리서 저자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석 달 동안 그 아이를 숨겨두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아기의 부모에게서 믿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 아이는 잘생겨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게 당연하지" 싶기도 하고, "그럼 만약 자기 아이가 못생겼더라면 그냥 죽도록 버려두었을 건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훗날 누가는 행 7:20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그 '아름다운 아이'라는 표현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누가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행 7:20a)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어디에서 본 듯한 말씀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의 부모가 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아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인 것을 알고 석 달 동안 이 아이를 숨겼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석 달 동안 아들을 숨겨 키우다 한계에 직면합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부부는 나일강가에서 자라는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 아기를 넣고 나일 강에 띄웁니다(출 2:1-3). 이 상황은 분명히 비극입니다. 그런데 마침 파라오의 딸이 시녀들과 함께 목욕을 하러 나일 강에 왔다가 갈대숲에서 그 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갈대상자의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걸 알았지만 다행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버리지 못합니다(출 2:6). 마침 멀찍이 서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아기의 누나가 기지를 발휘해 바로의 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 출 2:7
그렇게 해서 아기는 합법적으로 친모의 손에서 어느 정도 자란 뒤에 바로의 딸이 있는 왕궁으로 들어가 살게 됩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 출 2:10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의 말씀이 전하는 모세의 출생에 얽힌 에피소드입니다. 이집트의 핫셉슈트 공주는 그 히브리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우세스(Mouses)'라고 짓습니다. 이집트어로 '모(Mo)'는 '물'이란 뜻이고 '우세스(uses)'는 '건짐을 받다'란 뜻으로 '모우세스'는 '건져냄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훗날 이 이집트식 이름은 '자기 백성을 건져낼 자'라는 뜻으로 '모세(Moses)'로 고쳐집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변화 속에서 장차 그가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의 강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데려 가십니다.(마 16:13) 빌립보 가이사랴는 헐몬산 기슭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왜 주님은 이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뭔가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신께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해 그릇된 지향을 갖지 않기를 원하셨고, 당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인해 올바른 지향을 갖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에 관한 교설이 잡다하고 교묘히 세속화 된 신관이 범람한 시대가 또 있었을까요?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언설들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뜻을 같이 한 말씀'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에 관한 물음을 통해 우리가 정말 믿어야 할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 시켜주고 싶어 하십니다.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마16:13, 14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지금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이 질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마 16:15
무리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했지만, 그러나 지금 주님께 있어서는 당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따라온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주신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이 물음은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기준과 방향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했습니까?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16:16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인데,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겁니다. 그리고 뒤이어 따라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대한 부연설명인데, 마태복음에서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절대 유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언지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도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마 16:17
'신앙고백'은 이성이나 지성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분명히 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이어지는 마 11:25-26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데 있어 우리가 취할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순진무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마 16:18, 19
우리가 주님을 바로 알고, 교회를 바로 아는 것에 있어서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올바를 때만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올바로 고백된다는 건, 그 분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고백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이 고백을 상실한다면 비록 교회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천국의 열쇠가 없는 까닭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은 언제나 계속되어지는 물음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곳이고, 그 고백을 기초로 내 기준이 재구성되는 곳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으로 인해 내 삶의 지향이 재구성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땅의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를 얻는 곳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2:2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롬 12:3
이 세대는 그리스도를 믿는 효과와 성과에 대한 왜곡된 과장이 교회를 병들게 하는 세대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니, 엘리야니, 선지자 중 하나이니, 하며 교언을 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고백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마땅히 생각할 내 기준'이 되어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은 비로소 우리를 교회라 부르시고,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 주신 기준을 넘어서서 내 기준을 따라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주님께서 주신 판단의 기준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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