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2주 긍휼을 입어, 긍휼로 산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45:1-15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 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 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 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 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 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 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응송 | 시 13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 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 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서신 | 롬 11:1-2a, 29-32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 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복음 | 마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 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 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 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45:5-8을 묵상하십시오. 창44:30-34에서 형 유다의 변화를 보고 감동한 요셉은 형들 앞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② 마 15:26-28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 모욕을 당한 여인의 반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무엇을 칭찬하셨습니까?
③ 롬 11:30-3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 들(유대인)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긍휼을 입어, 긍휼로 산다.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 바서가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을 소개한 마틴 슐레스케에 따르면 직선이란, 우회를 모르는 완고함, 다른 사람을 살필 줄 모르고 앞만 향해 달려가는 마음입니다. 그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직선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 우리 마음의 결, 우리 삶의 길, 성공적인 인간관계, 이것들이 과연 직선일까요? 작도하듯 그어진 완벽한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 우리가 지닌 가능성, 우리가 겪는 상황, 이 모든 것은 천천히 나선형으로 자랍니다. 구부러진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직선 긋듯이 똑바로, 쉽게, 직통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마음은 하나님과 마찰을 빚습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면 하나님이야 말로 곧은 선을 그을 능력이 없다고 분노할지도 모릅니다. 직선적인 믿음은 모든 일을 밀고, 끌고, 잡아당기고 주무르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끔 하나님마저 가르치려 듭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서 '직선이 가져다주는 위험과 거기 비견되는 '나선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자기들이 버린 동생 요셉을 만난 형들의 두려워하는 모습과, 자기를 버린 형들이 찾아왔을 때,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창 45:5),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창 45:7)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애굽으로 가는 대상(大商)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의 마음에서 직선의 완고함이 보인다면,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믿음의 시선으로 헤아리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는 요셉의 마음은 부드러운 나선의 결을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을 대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마음이 교차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3)라고 말하는 제자들에게서 작도하듯 그어진 직선의 마음을 본다면, 태생적으로 이방인인 까닭에 주어진 모욕조차 딸을 위해 감당하며 믿음을 잃지 않은 여인을 칭찬하고 격려하시는(마 15:27, 28) 주님에게서는 부드러운 나선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소개해 줍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롬 11:30 공동번역)라고 그는 말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심판이 주어져야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부드러운 마음은 오히려 자비로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창세기 후반부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들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낯선 나라 이집트에까지 팔려온 요셉과 형들의 극적인 화해가 바로 여기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이 화해가 형들의 회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한 원망을 풀고, 과거에 형들이 자기에게 자행했던 폭력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형 유다의 변화된 모습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창 44:30, 31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그리고 33절과 34절입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동생 베냐민이 은잔을 훔친 죄로 노예로 끌려갈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가 동생을 위해 눈물겨운 탄원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저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을 것이라며, 내가 저 아이를 대신해 남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 진심어린 탄원은 마침내 동생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유다가 정말 자기의 미래를 걸고 동생 베냐민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자기를 팔아넘기던 무정한 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형제들이 처음 애굽에 온 그 때부터 요셉에게는 극도의 자제가 필요했었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보고 마음이 복받쳤을 때도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울고 나와야 했고(창 43:30), 만약 요셉에 이어 베냐민마저 잃고 말았을 때, 아버지 야곱이 감당해야 할 슬픔을 염려하며 형들이 괴로워할 때도(창 44:27-29) 요셉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애굽에 포로로 남겠다고 말할 때, 그는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후 형들 앞에서 큰 소리로 웁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 장면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창 45:1, 2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변화된 유다 같기를 바랍니다. 유다처럼 우리의 회개에 진정성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형제들이 이렇게 극적인 화해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에 대한 요셉의 신앙적인 해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창 45:4, 5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겪은 어떤 일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해석하려면 관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관점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있을 때 올바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어떤 인간적인 섭섭함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이 나를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창 45:5) 이었다며 지금까지 있었던 비극적인 가족사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비로소 형들도 두려움을 풀고 동생 요셉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요셉의 고백도 보십시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창 45:8
우리가 요셉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상황을 해석할 수 있었던 그의 '믿음의 안목'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인격으로 형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극적인 자기 가족사 속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진정한 강자였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약한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는 강한 자에게 부여된 특성이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그러나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용서의 뒷맛이 마치 체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용서는 언제나 강함의 표현이지 체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채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될 때,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강인함과 여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한 여인에게서 바로 그런 여유와 강인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 지금으로 말하면 레바논 베이루트 지역으로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보십시오.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마 15:22, 23
마태는 그녀를 가나안 여자라고 밝힙니다. 이방인 여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그럼에도 이 여자가 유대인인 예수님께 왔다는 건 정말 다급하고 절실한 부탁이 있어서일 것입니다.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이런 딸을 키우는 어미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 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울부짖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를 안 하십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며 잔인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사뭇 냉정하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마 15:24)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며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라며 한층 더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마 15:27
이 여인이 특별하게 인격적이어서 이 수모를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인은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말 이 여인이 슬기로웠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에 악의가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예수님도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마 15:28
주님께 무엇을 칭찬받고 싶으십니까? 인격을 칭찬받고 싶으십니까? 행위를 칭찬받고 싶으십니까? 가장 먼저 믿음을 칭찬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에서 인격도 행위도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 당시 로마교회에도 이런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 신자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처음에는 유대인 기독교인의 수가 더 많다가 클라우디오 추방령 이후로 이방인 기독교인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같은 로마교회에 다니면서도 곳곳에서 입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로마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점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절대화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울의 이런 주장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유대인 뿐 아니라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바울의 이런 주장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롬 10:21절에서 이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가리켜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불순종에 떨어졌느냐가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당시의 로마에서도 황제들이 골치 아파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전합니다.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롬 11:1, 2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롬 11:30, 31
바울의 이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거부'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듯이 이제 하나님은, 과거에 불순종 했던 이방인을 긍휼히 여기셨던 그 긍휼로 현재 불순종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오늘 우리를 보십시오. 흡사 요셉 앞에 부끄럽게 서 있는 형들처럼 부끄럽고 초라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혹은 모진 모욕을 견디며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가나안 여인 같은 모습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자화상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짓 자아를 버리고 변화와 쇄신의 참 자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토록 부끄럽고 초라하며 모욕을 당하는 우리를 영광스럽고 당당하며 행복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입니다. 먼저는 그 긍휼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음은 그 긍휼과 자비로 형제를 대하는 것입니다.요셉이 그랬습니다. 그의 처음은 노예였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 안에서 다시 보면 그의 인생에 초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노예였을 적에도 하나님의 긍휼 속에 있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하나님의 긍휼 속에 있었고, 심지어 총리였을 때도 하나님의 긍휼 속에 있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기에 그는 비극적인 가족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로 가족들을 초청해 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만 더 확대하면 요셉의 형들도 그 은총 가운데 서게 됩니다. 유다가 '동생을 버렸던'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변화되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을 때, 어느덧 하나님의 긍휼은 그를 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은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러나 그 믿음이 빛났던 이방인 여인에게도 어김없이 베풀어졌습니다. 그녀는 모진 모욕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현명함으로 주님께 칭찬을 얻고 딸을 치유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 즉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는 어김없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11:1) 하신 말씀처럼 이방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복음을 믿은 자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과 자비를 우리는 신비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오늘 서신서의 말씀 바로 다음 구절인 롬 11:33에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황홀하게 노래하며 주님의 자비를 형제들과 나눌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의 긍휼함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형제를 대하지 않는가?
②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자로서 형제에게 긍휼을 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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