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1주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37:1-4, 12-28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 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 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 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 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 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 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 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 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 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 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 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 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 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 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 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응송 | 시 105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서신 | 롬 10:5-15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 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 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 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 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 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 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 | 마 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 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 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이로소이다 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4:22-23을 묵상하십시오.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보내신 예수님께서 따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② 마 14:26-2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며 떨던 제자 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③ 롬 10:9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입으로 시인해야 할 것과 마음에 믿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성령강림 후 제11주이자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입니다. 지나온 73년 동안 남과 북의 시간 속에서 각각의 사고(思考)와 삶의 모습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민족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묵상하며, 외로움(Loneliness)을 고독(solitude)으로 바꿀 때, 내면으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독은 단지 영적 상승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고독은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존재와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고독을 통해 내적 힘을 쌓으며, 그 내적 힘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풍랑을 이겨냅니다. 더 나아가 고독은 공동체의식과 연대감을 길러줘서, 이웃을 향한 따뜻한 환대로 발돋움하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들에도 민감하게 의식하도록 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우리의 묵상과 기도로 삼게 하며 우리 시대의 역사와 사회적 과제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반응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그 고독과 기도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 마 14:22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재촉하사(에낭카센 ήνάγκασεν)'라는 말씀은 '억지로 시키다', '강요하다'란 뜻입니다. 왜 주님은 강요까지 하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하셨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마 14:23
주님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5) 이 일은 자칫 제자들로 하여금 그릇된 욕망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해 해산시키심으로서, 그릇된 욕망의 유혹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마 14:24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의 심판(렘 18:17), 사람을 꼬드기는 유혹(엡 4:14)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불어 닥친 이 바람의 정체는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군중들이 보내온 환호와 열광인데, 그 기막힌 순간을 누리지 못한 채 예수님께 떠밀려 배에 태워져서 육지로부터 멀리 떠나온 제자들에게 아직 남아있는 권력에 대한 미련이라는 상상이 가능합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란 표현 역시, 배가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는 것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기들을 향해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거슬러 있는 제자들의 영혼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태는 아주 대조되는 두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산에 올라가 날이 저문 후에 혼자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육지로부터 수 리나 떨어진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며 고난을 겪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두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풍랑을 진압한 것은 풍랑과 맞서 싸우고 있던 제자들이 아니라 산 위에서 혼자 기도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풍랑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힘써 노를 젓는 나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다만 궁극적인 해결은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가능한 것임을 이 하나의 장면은 보여줍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나라를 강타한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종(縱)으로 관통하면서 전국에서 태풍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도로가 침수되고 산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불어난 강물에 실종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난 때마다 우리 모두 절감하는 것은 자연 앞에서 사람이 참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오늘 말씀에서 풍랑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 제자들의 속수무책을 보여주고 있는데(마 14:24),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는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서 인간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막 6:48). 헨리 나우웬은 '영성 수업'에서 사람이 세상과 맞닥뜨려 살아갈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강박'에 관해 말하면서 행복에 대한 갈망을 채우지 못해 불안하고 초조하며, 욕심과 분노에 차서 계속 허둥지둥하는 것이 강박증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이 강박증 때문에 사람은 계속 움직이면서도 '도대체 장기적으로 진전이 있는지' 의심하고, 그로 인해 영적 고갈과 탈진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예수님 공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은 세례를 받으시며 하나님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의 말씀을 들으시던 때였다고 믿는다. 그 핵심적인 체험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참 존재에 대해 깊고 깊은 깨달음을 얻으신다. 우리 각자 안에는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하시는 주님의 내적인 음성이 있다. 따라서 당신은 하등 무익한 이런저런 추구에 빠질 필요가 없다. 원하기만 하면 당신은 참된 내적 자유를 찾아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 수 있으며 풍성하게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남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 곧 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우리 삶은 기복(祈福)의 연속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할 때나, 내가 가진 것이 많을 때 우리 기분은 상승됩니다. 반대로 내가 좋은 일을 하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할 때나, 내가 가진 것이 많지 않을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 강박증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가진 것'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럼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마 3:17)라는 주님의 음성이 내 존재와 영혼을 관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을 마치셨을 때 다가온 유혹은,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받는 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믿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자다.", "너는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자다.", "너는 다른 사람들로 네 권세에 절하게 할 수 있는 자다."(마 4:1-10)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번의 유혹 앞에서 번번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그것만이 진짜 나"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에 나는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확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 번의 유혹을 거침없이 이기게 하셨고, 또한 그 확신이 공생애 내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실 때도, 거부를 당하실 때도, 혹은 칭찬을 들으실 때도 예수님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기뻐하는 자"라는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그 음성을 더 오래 듣고 싶고, 더 깊이 듣고 싶은 내면의 갈망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사람이 더 깊이 파서 맑고 시원한 샘물을 얻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는 바로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해저물녘 산을 오르십니다. 풍랑은 언제 멈추었습니까? 저물도록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셨을 때,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의 문제는 언뜻 보기에는 노 젓는 사람들이 해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 마 14:25-27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 자기들을 향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공포에 질려 '유령'이라고 외쳤습니다. 배를 타고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은 그렇게 거스르는 바람과 환각에 의한 심한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현실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 분과 깊은 내적 일치 가운데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현실일까요? 아니면 그 '현실(Reality)'을 떠나, 세속의 풍랑에 놀라며, 환각으로 유령을 보며, 물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허우적대는 것이 현실일까요? 우리 삶의 가장 큰 덫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파도에 휘말려 표류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당신은 유능하다"라는 칭송이 때로는 "당신은 무능하다"라는 비난이 순전히 자본주의적 기준에 의해 덫과 같이, 혹은 파도같이 몰려드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을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착각이고, 환각이고, 오해이고, 환영(幻影)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자들의 환각과 착각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이내 그쳤습니다. 진정한 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배에 오르시면 두려움과 환각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일상에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흔들리고 불안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혼자 계셨다가, 제자들이 고난당함을 알고 찾아오신 사건은 오늘날 사회를 향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강림 후 제 11주 예배와 더불어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는 역사적 격랑에 휘말려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우리는 기도를 통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확신해야 합니다. 외세의 방해와 국내의 이념적 갈등이 마치 얽혀버린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우리 배에 오르시면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의 아침이 눈부시게 밝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 안에서 얻는 평화, 그것만이 우리나라의 진짜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고난당하는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교회의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현장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마 14:28-32
베드로가 시선을 주님께로부터 떼지 않았을 때, 그는 믿음으로 물 위를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이 주님을 떠나 바람을 향했을 때, 그는 순간 무서워하며 바다에 빠져들고 맙니다. 주를 향한 믿음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는 미묘한 상태, 그것이 지금 베드로 안에서 안타깝게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세상의 위력과 그 위용이 사실은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속아 두려워하며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작은 믿음도 책망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더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요셉을 봅니다. 그가 형들에 의해 내던져진 현실은 제자들이 겪은 풍랑에 견줄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 창 37:23, 24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 창 37:28
요셉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죽음의 구덩이에 내던져졌다가, 그 죽음의 구덩이에서 구출된 후 애굽으로 팔려갔다가, 보디발의 집에서 청지기로 가까스로 정착하는가 싶더니,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 도덕적 시험에 직면하고, 결국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誣告)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는 것을 계기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부상하는 요셉,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과의 극적인 상봉 등등 얼마나 드라마 같은 생애입니까? 그런데 이 중에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닥쳐오고,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당도했을 때,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 앞에서 요셉이 고백한 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믿음 없는 시선으로 이 사건을 보면 무정한 형들에 의한 인신매매 사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시선으로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흉년이 오기 전 요셉을 앞서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응송에서의 시인 역시도 요셉이 팔려간 사건에 대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시 105:17) 라고 노래합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속의 풍랑이 내게 닥쳐와도, 사람에게 배반당하고 목숨에 위협을 당해도, 그것은 한낱 환각과 같은 것이고, 다만 참된 현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이 참된 현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홀로 하나님 앞에 앉아있는 기도자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롬 5:9, 10
의심은 우리를 환각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성난 바람도 파도도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념이라는 우상 혹은 환각도 아닙니다. 우리와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은 무정한 이기주의에 의해 분단되어버린 한반도를 다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시적인 시선으로 보면 아직도 이 땅에는 바람과 파도가 한껏 성질을 부리고 있지만, 중간에 막힌 담을 당신 육체로 허물어버리신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기도로 인해 마침내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 마 14:27
지금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괴로이 노 젓는 손을 잠시 멈추고 두 팔 벌려 평화의 주 예수님을 맞이하십시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민족의 분단이라는 환각을 현실로 여겨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현실'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3 | 다운로드 |
New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
KOR | 2024.11.25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