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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0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8-05 11:30
조회
747
성령강림 후 제10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32: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 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 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 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 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응송 | 시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서신 | 롬 9: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용 없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 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 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 라 아멘
복음 |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 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 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32:24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시작한 시점 은 언제입니까?
② 마 14: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를 향 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③ 롬 9: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누구 때 문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9:4, 32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사실 외로움만큼 사람의 가슴을 후비는 감정도 드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로움이라는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주목하고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조언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전적 의미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신학적, 철학적, 심리학적으로는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은 고독(孤獨)이라고 정의했고, 정신분석학자인 설리번(H. S. Sullivan)은 '관계로부터 격리된 부정적 혼자됨'을 외로움으로, '스스로 선택해 나다움을 찾는 긍정적 혼자됨'을 고독으로 구분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역시 외로움(Loneliness)을 고독(solitude)으로 가져가라고 조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고독(solitude)이라는 말과 은둔자(solitary)라는 말은 '혼자 있다'라는 뜻의 라틴어 솔루스(sol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러 시대 동안 영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광야나 산 등 외딴 곳으로 떠나갔는데, 외딴 그 곳에서 외로움(Loneliness)이 깊은 고독(solitude)으로 바뀔 때, 내면의 필연적인 요구에 대해 말해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적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깊은 고독은 자신의 영적 상승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고독을 체득한 두 사람이 서로를 보호해 주고, 서로에게 선을 그어주고, 서로를 맞이하는 것이라네"라고 말했듯이, 고독은 우정과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길러줘서, 적개심으로부터 동료 인간을 향한 따뜻한 환대로 발돋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어야 했고,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20년 동안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으로부터 1남 1녀를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양떼와, 남종, 여종, 낙타, 나귀 등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창 30:43). 타향에서 외톨이로 살면서,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모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번창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배경은 아버지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8:3, 4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창 28:13, 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을 찾아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부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기보다, 잔꾀와 계략을 의존해 살아갑니다(창 31:32-42). 그리고 그런 삶은 관계에 긴장을 형성하고, 서서히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의 야곱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감지됩니다. 외삼촌의 아들들은 야곱을 모함하기 시작했고(창 31:1), 외삼촌 라반의 안색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창 31:2). 결국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봄에 양털을 깎는 이른바 '목동들의 추수기'를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라반의 수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야곱을 주저하게 만드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에게 떠오릅니다. 20년 전에 장자의 명분을 뺏기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의 원한이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얍복 나루에 도착한 야곱은 우선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선물을 보내 봅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 그리고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지새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그의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너갑니다(창 32:21, 22). 그런 후에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열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만남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내적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도 끝없이 불화합니다. 우리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 낡은 자아의 집요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경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모른 채,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디딤돌을 놓듯이,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위의 책 24쪽)
야곱은 자신을 되찾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 그가 비로소 '참 자아'를 찾은 것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의 영혼의 밝음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성경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장면 전체에는 승리자의 장엄함이 묻어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얍복 나루터의 행복한 아침이 여러분에게 밝아오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일상의 분주함에 끌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과 홀로'의 시간을 애써 갖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32: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 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 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 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 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응송 | 시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서신 | 롬 9: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용 없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 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 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 라 아멘
복음 |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 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 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32:24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시작한 시점 은 언제입니까?
② 마 14: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를 향 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③ 롬 9: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누구 때 문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9:4, 32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헨리 나우웬은 '영적 발돋움'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걸림돌을 '외로움',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걸림돌을 '적개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걸림돌을 '환상'이라는 말로 요약했는데, 어쩌면 그의 이 말이 요즘 우리가 보고 있는 야곱의 처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때 그는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외로웠고, 이웃과의 관계를 적개심으로 물들였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환상 이상을 넘지 못해 번번이 육(肉)의 집착을 보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걸림돌을 차례로 극복하고 시간 속에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야곱을 '고행자'로 소개하고, 악덕을 이기고 덕을 얻고자 훈련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그리하여 야곱이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그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있어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상황은, 그가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매우 중대한 전환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 라는 상황설정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도(창 28:10) 해가 진 광야에 '홀로' 처해져 하나님을 만난 바 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흐른 뒤, 자기 생의 또 다른 전환기에 다시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남아있는 모습입니다. 이때의 야곱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근원적인 외로움', 야곱 역시 그 외로움과 자기 연민(憐憫)에 젖어있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이십 년 전 벧엘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외로움을 영적 고양의 순간으로 삼고 있을까요?사실 외로움만큼 사람의 가슴을 후비는 감정도 드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로움이라는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주목하고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조언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전적 의미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신학적, 철학적, 심리학적으로는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은 고독(孤獨)이라고 정의했고, 정신분석학자인 설리번(H. S. Sullivan)은 '관계로부터 격리된 부정적 혼자됨'을 외로움으로, '스스로 선택해 나다움을 찾는 긍정적 혼자됨'을 고독으로 구분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역시 외로움(Loneliness)을 고독(solitude)으로 가져가라고 조언합니다. 그에 따르면 고독(solitude)이라는 말과 은둔자(solitary)라는 말은 '혼자 있다'라는 뜻의 라틴어 솔루스(sol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러 시대 동안 영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광야나 산 등 외딴 곳으로 떠나갔는데, 외딴 그 곳에서 외로움(Loneliness)이 깊은 고독(solitude)으로 바뀔 때, 내면의 필연적인 요구에 대해 말해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적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깊은 고독은 자신의 영적 상승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고독을 체득한 두 사람이 서로를 보호해 주고, 서로에게 선을 그어주고, 서로를 맞이하는 것이라네"라고 말했듯이, 고독은 우정과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길러줘서, 적개심으로부터 동료 인간을 향한 따뜻한 환대로 발돋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어야 했고,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20년 동안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으로부터 1남 1녀를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양떼와, 남종, 여종, 낙타, 나귀 등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창 30:43). 타향에서 외톨이로 살면서,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모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번창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배경은 아버지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8:3, 4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창 28:13, 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을 찾아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부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기보다, 잔꾀와 계략을 의존해 살아갑니다(창 31:32-42). 그리고 그런 삶은 관계에 긴장을 형성하고, 서서히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의 야곱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감지됩니다. 외삼촌의 아들들은 야곱을 모함하기 시작했고(창 31:1), 외삼촌 라반의 안색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창 31:2). 결국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봄에 양털을 깎는 이른바 '목동들의 추수기'를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라반의 수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야곱을 주저하게 만드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에게 떠오릅니다. 20년 전에 장자의 명분을 뺏기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의 원한이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얍복 나루에 도착한 야곱은 우선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선물을 보내 봅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 그리고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지새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그의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너갑니다(창 32:21, 22). 그런 후에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창 32:24
어둠이 깊은 나루터에 홀로 앉아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나간 20년간 자기가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땅에서 분명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러나 외적 성취만 가지고는 자신을 다 설득할 수 없는 내적 목마름과 피로감이 몰려왔을 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육신의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질책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씨름을 걸어옵니다. 그는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벌였습니다. 씨름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와예아베크(קבאיו)'인데, '먼지를 일으키다'라는 뜻의 '아바크(קבא)'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먼지가 일어나도록 격렬한 몸싸움을 한 것인데,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야곱이 '필사적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란 '천사'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30절에서 야곱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로 보입니다. 야곱은 그를 붙잡고 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집요함'이기도 혹은 '절박함'이기도 했습니다.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창 32:25
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중상을 입히고 맙니다. 그래도 야곱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날이 새려고 하자 다급해진 천사가 그만 놓아달라고 말합니다(창 32:26a). 그런데 이때 야곱의 대답이 뭐였습니까?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창 32:26b
그리고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십시오.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창 32:27, 28
이 사건을 계기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이스라엘(לארשׂי)'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 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에 올 때도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때도 야곱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었는데,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지금 마치 데자뷰처럼,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던 중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에 관한 대서사는 이 두 전승을 기둥으로 세워진 건축물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자기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 | 창 32:29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면서 대신 야곱을 위해 축복했고,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20년 전 '홀로 있다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곳 지명을 '벧엘(לא⎺'תיב)'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었는데, 20년 후 '홀로 있다가' 하나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그곳 지명을 '브니엘(לאיבפ)'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짓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은 이렇게 영이 깨어나는 시간이고, 혼자 남는다는 말의 궁극적 의미 또한 영적입니다. 홀로 있을 때, 내가 있는 그 장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홀로 있음 즉 고독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 소양 혹은 태도입니다. 간혹 신체적으로 격리되는 것이 마음의 고독을 계발하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거대한 도시의 한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속에서도,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서도, 고독은 유지될 수 있고, 내적 역량을 키워 하나님과 이웃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내가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찾아와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 삶의 시간과 시간 사이, 그 분주한 마디와 마디 사이를 침묵으로 비워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한 무리의 고독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죽음 이후로 마음 둘 곳 없어 하다가 갈릴리의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마치 야곱이 두려움과 고독 속에 얍복 나루터에 혼자 있었듯이, 이들 역시 영적 고독을 안고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연민(憐憫)이 복음서에 가득 나타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 마 14:14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의 영적 고독을 보신 것입니다. 둘 곳 없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독을 예수님께 보여드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채우시고 여러분의 브니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1b)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롬 9:4)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롬 9:32).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 시선이라면, 행위는 자기를 향한 육신적 시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음을 주지시켜 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분주한 행위를 멈출 때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고, 나의 적나라한 무능함에 절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걸어오신 싸움은 바로 그 진리를 일깨워주시는 싸움이었습니다. 분명히 홀로 있음의 시간은 야곱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홀로 있음은 야곱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자인 '존 메인'이 '침묵으로 이끄는 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열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만남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내적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도 끝없이 불화합니다. 우리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 낡은 자아의 집요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경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모른 채,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디딤돌을 놓듯이,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위의 책 24쪽)
야곱은 자신을 되찾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 그가 비로소 '참 자아'를 찾은 것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의 영혼의 밝음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성경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장면 전체에는 승리자의 장엄함이 묻어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얍복 나루터의 행복한 아침이 여러분에게 밝아오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일상의 분주함에 끌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과 홀로'의 시간을 애써 갖고 있는가?
첨부파일 : 성령강림-후-제10주-야곱은-홀로-남았더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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