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22:1-14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 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 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 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 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 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 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 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 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응송 | 시 13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서신 | 롬 6:12-2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 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 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 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복음 | 마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 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 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22:3을 묵상하십시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의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② 롬 6:13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누구에게 어떻게 내어주라고 합니까?
③ 마 10:42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주는 것 가운 데 하나를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실례합니다
빈 의자에 앉아 있는 빈 사람이 일어난다
묵례(默禮)로 나는 그 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시름없이 생각을 풀어내면
바람은 하롱이며 미루나무를 지나간다
나무 위를 간혹 질러가는 여름의 새
나는 의자(椅子)에서 일어난다
일어나 몇 발 떨어져 돌아보면
어느덧 빈 의자에 빈 사람이 앉아 있다
그의 얼굴을 나는 모른다
보아도 자리엔 없고
알려면 더욱 몰라질 뿐
미루나무에 다시금 바람이 인다
흰 구름은 서서히 나무 위를 떠난다
빈 의자(椅子)엔 언제나 빈 사람이 앉아 있다
의자(椅子) | 신동집
위의 시(詩)에 등장하는 의자는 사람이 앉아 있음에도 '빈 의자'입니다. 시인의 그러한 성찰 속에는 의자에 '앉아 있음' 자체가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함의(含意)되어 있습니다. 의자는 소유할 수 있는 사물도, 누릴 수 있는 권세도 아닌, 그저 '위치'나 '역할'로서 존재할 뿐인데, 세상에는 의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의자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시인은 또 '빈 의자에 앉아 있는 빈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정과 사회 안에서 현재 내가 앉아있는 몇몇 '의자', 심지어 가족이나 '나' 조차도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시인의 인식은 깊고도 무겁습니다. 바람이 일면 미루나무를 떠나는 흰 구름처럼, 나도 언젠가는 의자를 두고 일어서야 하기에 시인은 "실례합니다" 라는 겸손함과 의자를 향해 '묵례'하는 정중함으로 나의 부재(不在)를 예고할 뿐입니다. 고려 말기 학자 이곡(李穀)이 쓴 한문수필 중에 '차마설(借馬說)'이 있습니다.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남편으로부터, 비복(婢僕)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차마(借馬) 즉 말을 빌려 탔던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소유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지금 내 수중에 있는 소유들을 다 내 것이라 여기고 반성할 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의자가 나 자신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듯이 차마(借馬) 또한 나 자신도 권세도 아닙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의자나 차마를 자신이나 권세로 여기며 살아가서인지, 하나님께서는 간혹 당신의 사람들을 흔들어 그런 우상을 포기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꾸 무언가를 포기하게 하십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심으로서 땅 만이 아닌, 그 땅에서 누릴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게 하시고, 하갈이라는 여종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자 하나님은 그 아들마저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창 21:11), 또 '여종으로 말미암아'(창 21:12)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포기함으로써 육신의 근심을 영적인 근심으로 승화시켜 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또 한 번 포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심지어 이번 요구는 처음 두 번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창 22:1,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다시 부르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에 대한 전체 기사 중에서 가장 심미적(審美的)이고 신학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창 22:1)라는 시기에 대한 소개는 '이스마엘이 언약에서 배제된 일'(창 21:13)이 있고 난 후라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산을 올라갈 만큼(창 22:6) 자란 것으로 미루어 '그 일' 즉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린 일과, 이스마엘이 언약에서 배제된 일이 있는 후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부르신 것에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출 16:4;신 8:2)를 진단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를 낮추시며 유익을 주시려는(신 8:16) 목적이 선행하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훗날 이렇게 진단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저자가 어떤 성찰의 과정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100세에 주신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다시 당신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자식을 소나 양처럼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바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소돔 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끈질기게 하나님과 협상을 벌였던 아브라함이(창 18:23-33), 정작 자기 문제 앞에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창 22:3
그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는 그의 모습은 일체의 고민이 배제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재고하지 않았습니다.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단을 불 사를 장작을 쪼개서 떠난 아브라함은 내리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창 22:4
이 삼일 길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셋째 날은 항상 신비와 관련이 있다면서,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출애굽 할 때, 셋째 날에 희생제물을 드리고, 셋째 날에 정화되었던 사건에 연관시키는가 하면(출 19:15), 주님의 부활이 일어난 셋째 날에 견주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마 27:63;막 8:31). 그런가하면 아를의 카이사리우스는 삼위일체 신비에 견주어 아브라함의 삼일 길을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이 사건을 구약의 골고다 사건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구속사적으로 직결되는 예표적(豫表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의 견해대로라면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의 예형이고, 이삭은 성자 예수님의 예형입니다. 이어지는 사건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매우 납득이 가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삼일 길을 다 걸은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이삭을 바칠 곳을 멀리 바라보며, 종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창 22:5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이 살리시리라는 믿음은 지난 삼일 길을 걸으며 아브라함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직 아버지의 결단을 모릅니다. 산을 오르며 나누는 부자간 대화가 애틋합니다. 아들 이삭이 먼저 "내 아버지여"(창 22:7a) 하고 부르자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고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b) 하고 아들이 묻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벌어지는 장면을 따라가 보면,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예언대로 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붙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정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이삭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이삭이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아브라함이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육의 것을 포기하고 영의 것을 얻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삭을 통해 장차 늘어나게 될 '별보다 티끌보다 더 많은 자손'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 해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 18)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이룰 큰 민족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냥 '큰 민족'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을 두고 약속하신 '그 나라'는 그냥 '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떡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나라였습니다(신 8:3;마 4:4). '육의 몸'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영의 몸'으로 사는 나라였습니다(고전 15:44). 그 나라는 빈 의자에 앉아 있는 빈 사람 같은 나라가 아닌, 지금의 존재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나라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하여금 그 고통스러운 사흘 길을 걷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제련(製鍊)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서만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변에 흔한 '떡으로만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나라의 믿음의 표상으로 굳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걸어 끝내 이삭과 함께 도착한 그 여호와의 산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숫양은 그냥 이삭을 대신한 단순한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셔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그 길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걸으실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사흘간의 담담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듯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과 무덤 속의 사흘이 성경에 하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도 감정이 있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슬픔을 누르시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독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침묵 속에 모리아에서 죽으셨습니다. 칼로 이삭의 목을 찌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동작을 멈추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라며 울부짖던 당신의 외아들의 죽음은 멈추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우리의 미래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이 가져다 준 그 미래가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여호와 이레'입니다. 우리 운명을 '빈 의자에 앉아 있는 빈 사람'으로 놓아두지 않으시려고, 바람이 일면 미루나무를 떠나는 흰 구름처럼, 언젠가는 의자를 두고 일어서야 하는 허망한 존재로 놓아두지 않으시려고 주님은 모든 이들을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을 대신해 성부의 모진 침묵 속에서 골고다 길을 오르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죽음이 지금 우리의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육체를 희생하셔서 우리의 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빈 의자에 앉은 빈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삭을 그저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번제(煩提)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제의적 행동이고 영적 행동입니다. 육을 죽임으로 영으로 사는 행동이고, 찰나를 죽여 영원을 사는 행동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행동을 촉구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롬 6:13
죽여야 할 이삭이 있고, 살아야 할 이삭이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무기인 육이 죽어야 할 이삭이라면, 의를 행하는 무기인 영은 살아나야 할 이삭입니다. 윤동주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 -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신의 만족을 좇아 '살았으나 죽은 존재'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육은 죽고 영이 산 존재로 현재로부터 영원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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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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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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