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4주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처방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21:8-2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 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 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 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 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 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 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응송 | 시 86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 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서신 | 롬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 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 | 마 10:24-39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 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 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 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21:11-14을 묵상하십시오.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바뀝니까?
② 마 10:2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고통에 직면해 있을 때에라도 정 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③ 롬 6: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엇에 대 하여는 죽고,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처방
오늘은 6.25 한국전쟁 73주년이고, 7월27일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전(停戰)'이 맞는지 '휴전(休戰)'이 맞는지 표현을 두고 논란을 벌이기도 하는데, 정작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휴전 당시 20세이던 청년이 90세 노인이 되도록 한반도는 국제법상 '전쟁의 지속상태'인 '휴전'을 끝내지 못하고 세계 최장의 전쟁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대로라면 정전협정 100주년을 맞이할 개연성이 매우 높습니다. '정전체제'라는 용어가 너무 익숙해진 우리의 모습이 문득문득 섬뜩한 것이, 정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이미 5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음에도 이 정전체제를 끝내려는 절실함이 그리 없어 보이기 때문이고, 오히려 대북 적대감을 자극해 정치적 이익을 누리고, 정전체제를 자신들의 정치적 서식공간으로 악용하는 질 나쁜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정전협정이 갖는 나름의 의의를 부여한다면 더 이상의 비극적인 동족 살상은 막았다는 것입니다. 목원대학교의 역사학자인 김흥수 교수에 의하면 이때 한국교회는 휴전을 반대했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유화(宥和)가 아닌 공산주의를 굴복시킴으로써 한국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한국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며, (북진)통일 이후에 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김흥수 교수는 "동족이 그렇게 많이 죽고 있는데 전쟁을 계속 하자는 것이 과연 교회가 취할 태도였을까"라고 자문하며, 정전협정 후에 한국교회는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했다고, 오늘날에도 일부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이것이 정전 70주년을 맞고 있는 오늘 교회의 자화상이라고 비통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북 간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충돌이 염려되다 보니, 상호 적대성이 구조화 되고, 정전체제와 분단체제 아래서 남과 북은 각각 군사력 확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안보라는 명분으로 이 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모습이 과연 정상일까 라는 의문도 스스로 가져봅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따라 이념의 덫에 걸려들어 70년이 지나도록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우리 자화상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가 정말 우리의 이상이라면 우리는 성경 안에서 평화의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가정에 갈등이 촉발하고 확대되던 한 순간, 저마다의 미묘한 감정의 부딪침을 보여주고,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전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는데, 그때 사라의 반응을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엄두를 내었으랴? 그러나 내가 지금,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 창 21:6-7 표준 새 번역
아브라함의 노경(老境 창 21:7)에 낳은 아들 이삭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전격적으로 할례를 행합니다(창 21:4). 그가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할례를 13세에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 | 창 21:8
이삭이 언제 젖을 떼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기간이 대략 3살 정도였던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삭의 나이도 3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 사회에서 젖을 뗄 때까지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날 잔치 석상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 창 21:9
사라는 무심히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리아의 성 에프렘은 창세기 주해에서 '이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엄마와 얼마나 닮았는지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15년 쯤 전, 하갈이 임신한 후로 자신을 멸시했던(창 16:4) 쓰라린 기억을 사라는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마엘이 자기의 아들을 놀리자 사라는 과거의 불쾌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은 사람의 시선을 이렇도록 경멸에 찬 시선으로 만들고 맙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문장에 의하면 괴물은 사람의 시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괴물의 얼굴들은 시대에 따라 무한히 달라지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괴물의 얼굴은 모두 사람이라고,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의해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의 마지막 생각은 '죽음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 라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셀리는 말합니다. 이스마엘을 바라보는 사라의 시선이 그 순간 한 아이를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아무튼 이 사태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굉장히 불행한 방향으로 치닫습니다.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 창 21:10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을 향한 사라의 시선이 얼마나 경멸에 차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아브라함과 하갈의 이혼(離婚)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밟아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 대해 지니고 있는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까지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함무라비 법전 등 고대 법(法)에 의해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갈을 내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이삭이 놀림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지만, 법적인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내심이 실제적 이유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갈등(葛藤)은 사실은 두 여인이 아닌 아브라함이 원인이었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통해 대를 잇자고 제안해 왔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아들'을 믿고 기다리자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한 까닭에 사라의 제안대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보여줍니다.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 창 21:11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우유부단함은 고스란히 아브라함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사이에 불거진 갈등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 창 21:12, 13
지금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창 21:11), 그리고 '여종으로 말미암아'(창 21:12)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네가 정작 해야 할 근심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목적으로 나아가는 근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걱정'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영적인 근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아내 사라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반대 없이 함께 떠남으로써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아브라함의 안전을 위해 누이라 불리움도 감내했었고, 아브라함의 번영을 위해 자기의 평생을 희생했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이른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사라의 날선 시선으로 인해 이스마엘이 곤경에 처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닌 아브라함의 고집으로 태어난 자녀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라의 분노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에게 준(창 16:3) 하갈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시샘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육(肉)의 아들이 영(靈)의 아들을 놀리는 것에 질투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근심 역시 아버지로서의 연민(憐憫)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한 근심이어야 했습니다. '언어로의 도상'에서의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영혼이 잡아 찢기는 고통을 역전시켜 영혼에게 원초의 빛을 선사하는 근심', '영혼의 본질을 회복시켜 성스러움에 이르게 하는 승화된 근심, 영혼의 뜨거운 불꽃을 기르는 근심'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효섭 목사는 '백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성찰했습니다.얼마나 두텁고 오랜 어둠을 지나야
이리도 순백의 육신이 됩니까?
얼마나 무겁고 깊은 침묵 뒤에야
이리도 활짝 웃어집니까?
아, 얼마나 오랜 죽음 끝에야
이리도 영혼은 향기로워 집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 창 21:14
하나의 절에서 두 개의 장면이 교차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아브라함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끝내 내쫓김을 당하는 하갈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들은 약속이 있으니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하갈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의 입장에서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브엘세바 광야로 하루아침에 내침을 당한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후로 벌어지는 하갈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 창 21:15
하갈이 이런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는 장면(창 21:22-31)이 나오는데, 그 협상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소와 양을 주는 대신 안전하게 소와 양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습니다.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 창 21:31
이 브엘세바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가죽부대에 물이 떨어져 죽어가고 있던 바로 그 광야입니다. 자기를 버린 남자는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먹이자고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고, 그 협상이 성사되고 있는 바로 그 땅에서 그 남자의 여자와 어린 자식은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이 겪는 고통은 비단 물과 양식이 없어 죽는 고통만이 아닙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외에 마음마저 찢어지는 삼중의 고통 속에 지금 그들이 있습니다. 이게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비열한 인간의 역사를 뒤집고 새롭게 공의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창 21:17, 18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을 보십시오. 울고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아이를 일으켜 붙들라시며 이 아이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방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갈등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아브라함에게는 영(靈)의 시선을 떠서 보라는 것이고, 이스마엘에게는 큰 민족의 이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념의 덫에 매여 있던 시선을 바꾸어 영의 시선을 뜨고 보다 본질적이고 큰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를 성찰하고, 그 나라를 향해 우리의 역량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 평화의 나라 지금보다 더 큰 나라를 일구어갈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 창 21:19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시자, 눈이 밝아진 하갈이 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영안(靈眼)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겨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근현대사를 지나오며 우리는 너무 여유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 올리지 못하고, 자꾸만 나른 나라의 눈치를 살피며 처신하게 됩니다. 강대국이 우리를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건강하고 올바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영혼의 불꽃을 기르시는 분, 거센 고통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 10:28
죽일 수 있는 육신과 죽일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몸도 영혼도 지옥에 멸하는 분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정말 시선을 두어야 할 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쩌지 못하는 어떤 현실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능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0-11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르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죽어야 할 나'가 있고, '살아야 할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죽어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6.25 73주년을 맞는 우리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원수로 여기면서도 70년을 죄책감 없이 살아온 무지함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70년 동안 켜켜이 쌓아온 감정의 똬리를 풀어버리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당신의 육체로 허무신 우리의 평화이신(엡 2:14)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만이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평화의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육의 씨를 버렸을 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영의 목표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울부짖던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녀는 자신과 이스마엘을 살릴 수 있는 샘물을 발견합니다. 이스마엘은 그 샘물을 마시고 힘을 내어 큰 나라를 세우는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항상 옳습니다. 옳으신 하나님을 따르면 우리도 항상 옳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게 다가온 갈등을 육적 본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가?
② 갈등이 신앙 안에서 내 영혼의 진보로 재창조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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