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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주 떠나라 하시는 하나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6-11 06:47
조회
807
성령강림 후 제2주, 환경선교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12: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응송 | 시 33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서신 | 롬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 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복음 | 마 9:9-13, 18-26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 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 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12:1절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② 롬 4:13절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③ 마 9:12절을 묵상하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말씀은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이면서, 한국교회가 제정하고 40년째 함께 지켜오고 있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40년째 환경선교주일을 지켜오고 있다는 것은, 40년 전부터 이미 한국교회가 환경오염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감리회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세계 6월호에 '어쩌면 봄이 사라질지도 몰라'라는 제목의 특집이 실렸는데, 집필자들은 각각의 성찰을 동원해 기후위기를 경고했습니다.
계명대학교의 김해동 교수는 '꿀벌이 사라졌다'라며 봄이 과거보다 더 빨리 시작되고 더 빨리 끝나다보니, 과수원의 꽃이 피는 시기가 꿀벌의 정상적인 활동기보다 빨라져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아기 꿀벌들이 꿀을 얻기 위해 나섰다가 체력고갈로 도중에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드림교회의 김신형 목사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노란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 봄이 왔음을 알았고,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은 봄의 절정을 알려주었고, 철쭉이 피고지면 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순서가 뒤바뀌는가 하면 꽃들이 한꺼번에 피기 시작해서, 곤충들의 수정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결국 사람들의 식량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정교회 박인환 목사는 최근 '기후난민'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생겨났다며, 기후난민 문제는 전쟁난민 문제보다 더 심각해서, 전쟁난민은 다른 지역이나 이웃국가로 피해갈 수 있지만, 기후난민은 지구가 하나밖에 없어서 피할 곳조차 없다고 걱정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위해 애를 써왔지만 전 지구적인 생태위기는 멈추지 않고, 창조 이래 최대의 기후위기 가운데 곤충과 동식물,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가 내몰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위일체주일을 갓 지나 맞이한 환경선교주일은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성찰을 갖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Jϋrgen Moltmann)'은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를 고백한바 있습니다. 삼위(三位)의 교제(koinonia)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이라는 그의 고백 속에는,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사랑하심이 교회만이 아닌 모든 사회의 모든 생명에 걸쳐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회만이 아닌 사회와의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지키는 사역에 나서야 한다는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믿음의 의미, 그리고 사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관계는 '명령과 약속'이라는 도식으로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된 계약관계가 명령과 약속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은 그 다음 절에서 보다 구체화 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 22)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써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침으로써 의로워진 '그 행위'는 어찌 무시하느냐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판하는 야고보 계열의 이 반론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의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롬 4:2의 바울의 말씀을 다시 잘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반론입니다. '렌스키(Lenski)'라는 주석가는 바울의 이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를 구별해서 설명합니다. 신앙에서 우러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에서 우러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부 암브로시아스테르 역시 '바울의 열세 서간 주해'에서 바울은 '율법에 근거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해석을 종합하면, 지금 바울은 '율법'에 근거한 행위에 대해 언급한 것이고, '율법'에 근거한 행위가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주장처럼 '신앙'에 근거한 행위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 열매로 볼 수 있기에 '칭의(稱義 justification)'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의 주장만 채용해서 칭의에 대해 함부로 결론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나 야고보, 혹은 히브리서 저자 등 성서저자들부터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논쟁에 대해 바울 자신이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말씀이 엡 2:8-10에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임을, 그리고 성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고, 그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2:10).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겠습니다. 선한 일 즉 선한 행위는 떠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으로부터 떠나 ○○○을 향하여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떠나는 행동'으로서 반응했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서 큰 민족을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중요한 것이 믿음만 이었다면 그냥 고향에서 믿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바벨탑 사건(창 11:1-9)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능을 따라 힘의 지배원리를 추종했고, 그러한 경향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숭배가 만연 했었는데,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아무 불편 없이 살았다는 것은, 그 역시 우상의 비호를 믿고 살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로운 민족을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는 믿음은 아무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나야만 새로운 민족을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로운 질서를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마태라는 세리가 주님께 부름 받아 따라나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게 익숙한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탐욕과 교만의 바벨탑을 스스로 허물고,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창조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감독회의에서 탄소중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22년에 열린 각 연회에서 탄소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실천방안으로 음식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교회 주보나 자료집을 재생용지로 사용하게 하고, 교회 내에서 환경선교를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주보를 재생용지로 하고 있으며, 각자 개인컵을 사용하도록 지침을 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익숙해 있는 고향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새 질서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체결해 주시고, 생명 가득한 세상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기세계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가?
② 나를 떠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태계를 아끼고 사랑하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12: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응송 | 시 33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서신 | 롬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 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복음 | 마 9:9-13, 18-26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 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 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12:1절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② 롬 4:13절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③ 마 9:12절을 묵상하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말씀은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떠나라" 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이면서, 한국교회가 제정하고 40년째 함께 지켜오고 있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40년째 환경선교주일을 지켜오고 있다는 것은, 40년 전부터 이미 한국교회가 환경오염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감리회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세계 6월호에 '어쩌면 봄이 사라질지도 몰라'라는 제목의 특집이 실렸는데, 집필자들은 각각의 성찰을 동원해 기후위기를 경고했습니다.
계명대학교의 김해동 교수는 '꿀벌이 사라졌다'라며 봄이 과거보다 더 빨리 시작되고 더 빨리 끝나다보니, 과수원의 꽃이 피는 시기가 꿀벌의 정상적인 활동기보다 빨라져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아기 꿀벌들이 꿀을 얻기 위해 나섰다가 체력고갈로 도중에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드림교회의 김신형 목사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노란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 봄이 왔음을 알았고,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은 봄의 절정을 알려주었고, 철쭉이 피고지면 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순서가 뒤바뀌는가 하면 꽃들이 한꺼번에 피기 시작해서, 곤충들의 수정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결국 사람들의 식량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정교회 박인환 목사는 최근 '기후난민'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생겨났다며, 기후난민 문제는 전쟁난민 문제보다 더 심각해서, 전쟁난민은 다른 지역이나 이웃국가로 피해갈 수 있지만, 기후난민은 지구가 하나밖에 없어서 피할 곳조차 없다고 걱정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위해 애를 써왔지만 전 지구적인 생태위기는 멈추지 않고, 창조 이래 최대의 기후위기 가운데 곤충과 동식물,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가 내몰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위일체주일을 갓 지나 맞이한 환경선교주일은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성찰을 갖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Jϋrgen Moltmann)'은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를 고백한바 있습니다. 삼위(三位)의 교제(koinonia)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이라는 그의 고백 속에는,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사랑하심이 교회만이 아닌 모든 사회의 모든 생명에 걸쳐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회만이 아닌 사회와의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지키는 사역에 나서야 한다는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믿음의 의미, 그리고 사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관계는 '명령과 약속'이라는 도식으로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된 계약관계가 명령과 약속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 12:1, 2
이 말씀을 '명령과 약속'의 도식으로 보면, 1절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2절은 그 명령에 따르는 '약속'입니다. 전통적인 신앙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 명령과 약속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창조질서 위기라는 사회적 사건 안에서 이 말씀을 재해석해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으로부터 떠나 ○○○을 향하여 가라'는 이 명령 안에는 '벗어나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이 함께 지시되고 있습니다. 벗어나지 않으면 지향할 수 없고, 지향하려면 벗어나야 하는 갈등적 요소가 이 하나님의 명령 안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의 수신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곳은 그의 존재의 근거이고, 삶의 터전이며, 그가 지금껏 누려온 가장 익숙한 세계입니다. 반면에 그가 그곳을 떠나서 가야 할 곳, 즉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란 미지의 땅입니다. 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땅이고, 불확실한 미래가 가로놓인 땅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 세워 구원사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배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브라함의 결단입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이고, 삶의 터전이며, 가장 익숙한 세계인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고수하던지, 아니면 약속을 따라 불편을 감수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던지 입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 창 12:4
창세기의 저자는 칠십오 세의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갔다'고 보기에도 듣기에도 훈훈한 결말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대개 위인들이 지나온 삶은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공과 과가 매우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평가를 보게 됩니다.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롬 4:13
창세기의 저자가 '말씀을 따라갔다'고 말한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것이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층 더 훈훈한 평가를 내려줍니다. 이때가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이고, 더욱이 율법도 할례도 없던 시절이고 보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물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무조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와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이 추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입니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울의 입장은 분명해 보입니다. 롬 3:28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리고 4:2-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이러한 말씀들을 근거로 볼 때,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약 2:20절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여기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무용함을 지적합니다. 바울은 '행함과 무관하게 믿음의 의'를 주장한 반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야고보의 주장은 그 다음 절에서 보다 구체화 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 22)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써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침으로써 의로워진 '그 행위'는 어찌 무시하느냐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판하는 야고보 계열의 이 반론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의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롬 4:2의 바울의 말씀을 다시 잘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반론입니다. '렌스키(Lenski)'라는 주석가는 바울의 이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를 구별해서 설명합니다. 신앙에서 우러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에서 우러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부 암브로시아스테르 역시 '바울의 열세 서간 주해'에서 바울은 '율법에 근거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해석을 종합하면, 지금 바울은 '율법'에 근거한 행위에 대해 언급한 것이고, '율법'에 근거한 행위가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주장처럼 '신앙'에 근거한 행위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 열매로 볼 수 있기에 '칭의(稱義 justification)'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의 주장만 채용해서 칭의에 대해 함부로 결론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나 야고보, 혹은 히브리서 저자 등 성서저자들부터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논쟁에 대해 바울 자신이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말씀이 엡 2:8-10에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임을, 그리고 성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고, 그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2:10).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겠습니다. 선한 일 즉 선한 행위는 떠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으로부터 떠나 ○○○을 향하여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떠나는 행동'으로서 반응했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서 큰 민족을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중요한 것이 믿음만 이었다면 그냥 고향에서 믿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바벨탑 사건(창 11:1-9)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능을 따라 힘의 지배원리를 추종했고, 그러한 경향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숭배가 만연 했었는데,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아무 불편 없이 살았다는 것은, 그 역시 우상의 비호를 믿고 살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로운 민족을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는 믿음은 아무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나야만 새로운 민족을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로운 질서를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마태라는 세리가 주님께 부름 받아 따라나서는 것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마 9:9
우리는 이 마태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속한 집단이 당시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을 만큼 악하고 타락한 집단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관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그가 세리라는 직업에서 떠날 마음이 아직은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내면에 악이 없음을, 그리고 그가 회개한다면 누구보다 신실한 사도가 될 수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는 지체 없이 일어나서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속의 자리에 두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 '말씀을 따라가도록' 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그를 세관에 그냥 두시지 않고, 그곳을 '떠나서' 당신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앉았고, 예수님과 자연스레 어울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느냐"고 항의했을 때의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마 9:12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개 절실하게 돌아서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듯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지금 우리는 건강한 사람일까요? 지금 우리는 의로운 사람일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마태처럼, 지금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를의 카이사리우스에 따르면 우리가 떠날 고향은 육체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죄에 찌든 육체에서 떠나도록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은 후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기 위해 육적인 관습을 떠날 때, 우리는 올바르게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해지고, 방종했던 내가 정숙해지고, 탐욕스런 내가 청빈해지고, 시샘 많던 내가 관대해지고, 투박하던 내가 온화해질 때, 그것은 내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서 기쁨으로 주님 말씀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주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눅 18:9),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눅 18:12)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모양은 의로웠지만 긍휼이 없었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낮출 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새로운 자신을 향해 떠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우리가 더럽히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상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의 붕괴와 봄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꿀벌마저 사라지는 이런 생태적 난국은 모두 우리의 탐욕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현재 지구의 동식물이 사라지는 속도는 지구 역사상 대멸종 규모가 가장 컸던 고생대의 폐름기와 중생대의 백악기 때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과거 다섯 차례의 대멸종은 지각변동이나 천문학적 요인에 의한 환경격변이 원인이었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오롯이 인간이 부른 기후위기가 원인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문제도, 먼 훗날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닥치고 있고, 우리 자녀에게 닥치고 있는 우리의 문제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게 익숙한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탐욕과 교만의 바벨탑을 스스로 허물고,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창조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감독회의에서 탄소중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22년에 열린 각 연회에서 탄소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실천방안으로 음식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교회 주보나 자료집을 재생용지로 사용하게 하고, 교회 내에서 환경선교를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주보를 재생용지로 하고 있으며, 각자 개인컵을 사용하도록 지침을 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익숙해 있는 고향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새 질서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체결해 주시고, 생명 가득한 세상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기세계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가?
② 나를 떠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태계를 아끼고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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