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6주 내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사도행전 | 행 17:22-31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 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 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 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 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 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 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응송 | 시 66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서신 | 벧전 3:15-22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 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 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 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 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 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 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 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 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복음 | 요 14:16-21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 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 를 나타내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벧전 3:18-19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무엇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까?
② 행 17:24-28, 그리고 28-29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과 우상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요 14:16, 1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는 17절의 설명과, 그리스어 설명으로 볼 때 어떤 분이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
50일 간의 부활시기가 어느덧 거의 차서 오늘 부활절 여섯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다음 주일을 '예수승천주일'로 지키고 나면 바로 이어 '성령강림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무렵을 지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할 단어로 '환희'를 말합니다. '환희'라는 단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근원적 기쁨'을 제대로 묵상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환희(황홀경)'를 뜻하는 영어 '엑스터시 ecstasy'는 그리스어 '엑스타시스 ἔκστασις'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엑(ἔκ)'은 '나가다'라는 의미이고, '스타시스(στασις)'는 '정지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서 원문에서 환희를 경험한다는 것은 '고정된 상태의 바깥쪽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서적 의미에서 환희를 느끼며 살려는 사람들은 '고정되어 있는 자기 마음'으로부터 움직여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를 뛰어넘는 곳으로 탐험을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의 본질인 환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어둡고 고정되어 있는 자기 밖으로 나와, 새롭고 순전한 생명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여섯째 주일을 지나, 예수 승천주일과 성령강림절을 향해 가는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에 관해서,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성자 예수님에 관해서, 그리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에 관해서 증언합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보여주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이 처한 고질적 상황인 어둠과 고난으로부터 기쁨과 환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오늘 서신서 말씀인 벧전 3:15-22은 어둠과 고난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벧전 3: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악(惡)을 행하며, 욕을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3절에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는 말씀이 있고, 14절에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를 입고, 고난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였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해를 입고 고난을 겪었다는 건 무엇이고, 시대가 어두웠다는 건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13절에 있는 '선(善)'이라는 단어와 14절에 있는 '의(義)'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듯하지만 그러나 미묘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선(善)'이라고 표현된 그리스어 '아가두 ἀγαθοῡ'는 표현 그대로 선한 일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다든지, 육신이 연약한 형제를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의(義)'라고 표현된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넨 δικαιοσύνην'은 의미가 다릅니다. 이것은 선(善)과 달리 상대적입니다. 이를테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건 모든 사람에게 환영과 칭찬 받을 일이지만, '북한의' 굶주리는 형제를 돕는다고 하면, 그 의는 불편하게 여길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의(義)'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의(不義)'로 여겨지는,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그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가 시작되던 1세기 무렵 그리스도인들의 의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 실천이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의였지만, 박해자들의 시선으로 보면 불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실천할수록 혹독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5:10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디카이오쉬넨 δικαιοσύνην'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는 모두가 이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인한 박해였습니다. 이 'δικαιοσύνην'에 대한 박해가 클수록 그것은 아직 땅의 어둠이 깊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실천하는 중에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박해의 두려움에 시달렸고, 그런 만큼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 벧전 3:15, 16a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 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너희가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어둠이 배인 자기' 밖으로 나와, 새롭고 순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깊이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자기 어둠을 극복한 후에, 누군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듣고 싶어 하거든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준비된 대답을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이렇게 그리스도를 우러러 모시고, 자신의 희망을 설명할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실제 초기 그리스도교는 자기 희망의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그 비방하는 일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설명한 희망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완성'이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 벧전 3:18, 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름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다"고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이 선언은 인간이 '자기 밖에서만' 얻을 수 있는 희망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이 단서에 대해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은 성육신 하시고 죽을 필요가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고, 성 아타나시우스는 "만일 하나님이 태어나고 죽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태어났으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육체로 태어나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은 버림과 저주를 받으심으로서 모든 죄를 떠맡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을 내신해 비난받으셨으며, 마침내 그들을 위해 죽음에 이르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에 서 있던 고대도시인 아덴 즉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그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 도시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에는 에피큐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행 17:18) 그들은 바울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위해서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행한 바울의 연설이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행 17:22, 23
당시 아테네는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아테네 거리 곳곳에 아름다운 조각과 건축물을 세웠는데, 그 조각들과 건축물들의 정신적 모태는 신화였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이고, 그의 아내이자 누이이면서 여신 중의 우두머리인 신의 이름은 헤라입니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신들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각각의 단들이 아테네 거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도 있었으니, 당시 그리스의 영적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신(神)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던 신과 너무 달랐습니다.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 행17:24-27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더듬어 찾아서 발견할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한 분이시다. 사실 여기까지는 아테네 사람들이나 바울이나 서로 크게 이견이 없었습니다. 만물의 근원을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의 이데아(Idea)라고 했던 플라톤의 주장이나, 세상은 자연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구성되고 유지된다고 본 스토아학파의 사상이나, 세상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성찰한 사람이라면 바울의 주장은 크게 이상할 것 없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돌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형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신들을 가리켜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 행 17:28, 29
결국 22절에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며 칭찬해주었던 것은, 사실은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미신적 경향 즉 그들의 우상숭배를 꼬집어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오늘 우리도 크게 자유롭지 못한 사안입니다. 비록 우리가 손으로 만든 것들을 향해 절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손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고 탐(貪)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지나오며 우리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동안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탐해온 것들이 생명의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입니다. 경제도 문화도 기술도 예술의 발전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러나 한낱 바이러스 앞에서의 무능함을 목도하면서, 돈이 생명보다 우선한 세상이 한낱 우상이었음을 우리는 절감했습니다. 우리는 참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 17:30) 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 지금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너희가 찾아 발견해야 한다"고 힘주어 소개하는 바로 그 하나님께 우리도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울이 소개하는 바로 그 하나님으로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 14:18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이고 | 요 14:19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요 14:20
오로지 생명 하나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을 기울이고 계시는 그 방향을 향해 회개하고 우리 모두는 돌아서야 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들려줄 내 소망의 이유가 되어 주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 요 14:16, 17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주님과 제자들 안에 상기되어 있는 진정한 소망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처형당한 당신 때문에 실망하고, 두려움에 빠져 방문마저 굳게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닫힌 문을 통과해 들어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남기시고(요 20:19), 실망한 제자들의 엠마오 길을 함께 길을 걸으시며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시고(눅 24:27), 주막에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중에 어두워진 그들의 눈을 밝혀주시는가 하면(눅 24:30, 31), 지상에서 제자들과 약속하셨던 그대로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 사명을 환기(喚起)시켜주셨습니다.(요 21:1-23) 그로 인해 제자들은 점차 두려움과 실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마음의 뜨거움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자상하신 배려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남겨진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시며,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부활절기 동안 묵상해 온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 '우리 목자요 양의 문이신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 안에 있는 가슴 벅찬 희망은 이 땅에 강림하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 완성될 희망이었습니다. '보혜사'를 뜻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 라는 뜻의 '파라(παρά)'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의 '클레토스(κλητος)'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보혜사'의 정확한 뜻은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대신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납고 차디찬 인간본성에 기대 살아가는 세계가 강자나 약자를 무론하고 어둡고 두려운 세계라면, 성령의 임재와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세계는 강자나 약자를 무론하고 따뜻한 세계입니다. 롬 8:11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죽음'과 '부활' 사이에 위치한 이 변증법적 사건은, 그리스도인이 어둠 속에 고정된 자기 밖으로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매일매일 체험하는 생명(生命)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생명의 사건'이 우리가 내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겸손히 들려주어야 할 '희망의 실체'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가 깨달아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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