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사랑에 순절하신 목자 예수님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사도행전 | 행 2:42-47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서신 | 벧전 2:19-25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 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 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복음 | 요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 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 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 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10을 묵상하십시오. 도둑이 온 이유와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② 벧전 2:24을 묵상하십시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당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행 2:42-4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양으로서의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 기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사랑에 순절殉節하신 목자 예수님
최근 'JMS(기독교복음선교회)'라는 이단의 교주 정명석의 성폭력 피해자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 출연해서, 교주가 자행해온 무도한 성추행과 성폭행을 폭로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바 있습니다. 지난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는 유병언의 구원파가 드러나고, 코로나 19를 통해서는 신천지의 실체가 드러나기도 했는데,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위기는 항상 거짓 선생들과 적그리스도의 등장, 그리고 이단들의 출연이었습니다. 그래서 2세기의 이레네우스 같은 선각자들은 바른 신앙을 정립해 영지주의 등의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 반박에 평생을 바치기도 했었습니다. 탁지일 교수(부산 장신대)에 따르면 우발적인 종교범죄란 없다고 합니다. 비성서적인 이단 교리를 근간으로 치밀하게 기획된 확신범죄가 바로 이단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성서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다른 교주들의 교리나 정체불명의 민간속설을 벤치마킹한 후 자신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고 합리화해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탁지일 교수는 성공하는 이단 교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성공한 교주들의 7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① 몰라야 성공한다. 이단 교주는 성서를 제대로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그들은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② 믿어야 성공한다. 이단 교주들은 정말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믿는 자기세뇌의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③ 바꿔야 성공한다. 이단 교주는 성서의 내용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바꿔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④ 넘어야 성공한다. 이단 교주는 자신이 따르던 교주를 딛고 넘어서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② 눌러야 성공한다. 남성 2인자들의 배신을 수차례 목도해 온 이단 교주들은 후계구도를 넘보는 2인자들을 눌러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⑥ 벌어야 성공한다. ⑦ 속여야 성공한다. 등입니다.
탁지일 교수는 이러한 이단 연구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는데, 결론 과정에 이르게 되면 연구대상인 이단 단체의 자리에 교회를, 교주의 자리에 목회자들을 대입해보는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교회에도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을, 단지 이단이라는 전제와 선입견으로 비판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점점하게 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단 연구를 통해 교회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알면서 이단의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단들의 미혹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예수님 안에 온전히 그 분의 착한 양으로서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착한 목자의 상(像)'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 설명은 이스라엘처럼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에게는 정서적으로 가장 이해가 빠른 설명이겠습니다. 목자는 수많은 낮과 밤들을 자기 양들과 함께 지낼 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단순한 양치기가 아닌 아버지로 인식됩니다. 목자에 대한 이런 정겨운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응송에서의 시인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1-4
시인의 이 고백 속에 나타난 목자의 사역은 자기의 양떼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즉 죽음의 음산한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를 지나며 그럼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의 예수님 말씀은 마치 시인의 그 고백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요 10:1-3
목자이신 당신의 사역을 말씀하시기 전에 주님은 먼저 도둑의 특징부터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에서 이단의 특징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이단의 교주, 즉 도둑은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양을 돌보고 먹이기보다는 착취하는 것에 더 목적을 둡니다. 그런 도둑은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도 않았고, 성경을 따라 양떼를 돌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을 넘어 몰래 들어가 양들을 낚아채 억지로 끌고 갑니다. 양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피해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하고 어린 양들을 생각할 때, 안쓰럽고도 섬뜩한 장면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소개하시면서, 목자인 당신은 문으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는 말씀을 통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최선을 다해 당신 양떼를 인도해 가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문지기가 목자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일일이 자기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나섭니다(요 10:4). 해마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양들이 태어나는데, 이때 팔레스티나의 들판에는 목자들이 한층 수가 늘어난 양떼의 어린 것들을 풀밭에 풀어놓습니다. 이때부터 착한 목자는 여가(餘暇)를 완전히 접습니다. 정성스럽게 어린 양들을 안거나 목덜미와 어깨에 메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한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셔도,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요 10:6). 결국 이런 논쟁적인 성격을 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까닭에 그 다음 '문에 관한 비유'로 이어집니다.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7-10
당당하게 문을 통과해 양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 양들을 죽이고 멸하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비유로만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도둑이며 강도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신 8절을 근거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겨냥해 말씀하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필사본들은 '다' 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해버린 것들도 있고, 또 어떤 사본은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을 삭제해서 그런 통속적인 오해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 즉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슬러 비열하고 집요하게 벌이고 있는 음모들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는 '눈이 먼' 사람들(요 9:39-41)이었고, 스스로 '안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무섭도록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눈이 멀고 무지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폭력으로 없애려 들었습니다. 예수를 쳐서 없애야 그의 양떼를 흩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26:31에 보면 예수님께서 슥 13:7의 예언을 인용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참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자기 양을 지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하려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 요 10:10a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했던 사탄은, 지금은 거짓 목자들을 이용해 양떼를 쳐서,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양들을 지켜내려 그렇도록 애를 쓰시는 겁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10b
거짓 목자들의 목적이 하나이듯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적도 하나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오로지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희생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양떼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순절하신 것입니다. 1913년 간도에서 태어난 박계주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가 1938년 '매일신보'에 '순애보(殉愛譜)'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순애보는 '사랑에 순절(殉節)하는 인생의 기록'이라는 의미이고, 광복군이 조국을 위해 죽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위해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책에서 박계주 선생은 순애보를 '가장 높고 가장 깨끗한 사랑에 자기를 제공하여 남을 위해 사랑의 제물이 되는 다 같이 사랑에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도들이며, 십자가의 사도들'로 규정합니다. 여기에서 '제공', '제물',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읽을 수 있는 개념들인데, 글 마디 행간마다에 뚝뚝 떨어지는 순애보의 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은유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순애보의 피를 뚝뚝 흘려주신 선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박계주는 예수님의 보혈만을 말하지 않고, 그 보혈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중 등장인물인 '최문선'은 자기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살인과 강간 미수 누명까지 덧씌우려 했던 '이치한'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원수인 이치한이 병원으로 자기를 찾아왔을 때, 칼로 가슴을 찔러도 시원치 않을 마음이었지만, 원수를 향해 원망도 저주도 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치한이 자기를 위기에서 건져준 이유를 물었을 때, 최문선의 대답이 이랬습니다.당신은 나와 만나기 전부터 나의 친굽니다. 모름즉이 우리는 한 피로 묶여져야 합니다. 피란 무엇입니까? 피는 사랑이요 희생입니다. 또 작중 인물인 '헤순'은 자기 남편을 빼앗은 '옥련'과, 누명을 씌워 자기를 헌신짝처럼 버린 남편 '철진'이 자동차가 전복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 피를 뽑아 두 사람에게 수혈시켜줍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명히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언니, 난 기뻐요. 오늘에야 나는 내 원수들을 복수했어요.
최문선이 피에 대해 관념적인 정의를 내렸다면, 차헤순은 실천적이며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의 이런 고백과 실천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흘러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선한 목자의 표상이라면, 이들의 희생적 사랑은 그 표상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표상을 우러러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행 2:42
여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는 삶,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는 삶,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는 삶,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삶입니다.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존자 베다는 사도행전 해설에서 이렇게 감격스럽게 해설했습니다.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젖으면 지체 없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러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이며 같은 사랑의 열기가 곱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두 번 주어졌다는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어린 신앙생활을 했더니 그 결과는 참으로 눈이 부셨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행 2:4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도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고,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 힘써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 2:22-24
왜 주님은 죄도 없고, 거짓도 없으시면서,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감내하셨을까요? 우리를 향하신 순애보 때문입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오로지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사랑으로 순절(殉節)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가장 높고 가장 깨끗한 사랑에 당신을 제공하셔서 사랑의 제물로서 순(殉)하신 순애(殉愛)의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 순애보의 보혈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 안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영적 차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생명 하나 살리려는 순애보로 세상 거짓과 타협하지 않으신 분, 때로는 지팡이로 나약하고 눈 어두운 나를 인도해 주시고, 때로는 막대기로 거짓 목자와 사나운 이리를 쫓아내시는 분,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내 이름을 불러 곁에 두시는 분, 그 분만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문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 받는 양으로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두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서 그 분의 양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순애보의 사도가 되어 우리 역시 사랑의 제물로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삶,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대결해 이기는 삶,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거짓 목자의 미혹에 속아 음산한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가?
② 참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생명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