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3주 영성이 발현發現되는 자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7: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 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 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 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 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 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 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 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 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 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 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응송 | 시 95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서신 | 롬 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 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 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 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복음 | 요 4:5-26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 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 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 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 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 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 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 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 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17:5-6절을 묵상하십시오. 물을 달라며 모세와 다투던 이스라엘 자손이 해갈을 얻은 것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② 요 4:10, 14을 묵상하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③ 롬 5:3, 4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겪는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유익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영성이 발현發現되는 자리
나다(na-da) 공동체 대표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우리 삶에는 영성이 발현되는 자리가 숨어 있는데, 그 자리를 '소명의 자리(Calling Locus)'라고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도토리가 땅에 묻혀서 싹을 내고 뿌리를 내릴 그 곳, 나비의 알이 애벌레일 때 양식으로 먹고 자라야 할 줄기와 잎, 그 자리가 바로 자기라는 존재가 자라는 고유한 자리이고, 자기의 영성이 자라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아직 알의 차원에 있는 나비에게는 사방이 벽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 그 알을 감싸고 있는 껍질은 자신이 먹을 양식이라서 그것을 차근차근 먹고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알에서 나와 굼실굼실 기어 다닐 때 역시 기어 다니는 공간이 작아 제한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는 방식으로 애벌레는 한정된 공간을 기어 다니다가 번데기라는 큰 누에고치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갇혔다 풀어졌다' '갇혔다 풀어졌다'를 반복하며 애벌레는 누에고치를 지나 궁극의 상태인 나비에 도달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각자의 자리에서 차원을 넘어가고, 지평을 넓히고, 다양한 요소들과 상호 작용하며 성장합니다. 이 '자리'가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에 있어 중요한 초점 중 하나는 바로 이 '소명의 자리'입니다. 나를 부르신 이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금 내가 처한 이 자리를 먹고 자라야 합니다. 이런 훈련 과정을 무시한 채 "답답하다. 어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야지" 하면 힘들기만 합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쳐 나비가 된 사람만이 알도, 애벌레도, 번데기도 다 알 수 있는 영적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애벌레인 상태에서는 나비를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령 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상상일 뿐입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보여주는 각각의 상황과 자리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바로 그 '소명의 자리'입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모세에게 불평하는 광야의 히브리 자손들을 보여줍니다. 나비의 성장 단계로 비추어 보면 그들은 이제 막 알에서 애벌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나비의 영광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뜨겁고 목마른 광야를 영성 발현의 자리 즉 소명의 자리로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는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온 한 여인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알에서 서서히 깨어 애벌레의 차원으로 들어섭니다. 여인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소명의 자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각각의 존재가 자라고 영성이 자라는 고유한 자리를 주셨습니다. 때로는 광야와도 같으며, 때로는 우물가와도 같은 이 소명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각각의 자리에서 영적 훈련을 통해 차원을 넘어서고 지평을 넓힐 때, 우리도 곰비임비 궁극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 출 17:1
여기에서 '노정(路程)'이란 신 광야로부터 돕가와 알루스를 거쳐 르비딤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민 33:12-14). 그 노정 끝에 장막을 친 '르비딤(םידיד 레피딤)'은 '원기회복'이란 뜻으로 시내 산에 이르기 직전의 마지막 장소로 보입니다. 혹자는 이곳을 오늘날의 '와디 페이란(Wadi Peiran)'으로 추정하는데, '와디 페이란' 지역은 본래 샘과 개울이 있어서 '시내 산의 진주'로 불릴 만큼 물이 넉넉했지만, 히브리들이 도착했을 때는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 고갈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그곳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 말라버린 전형적인 모래사막이 되어 있었습니다. 행로 속에 오아시스를 전혀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이 얼마나 목이 마르고 신경이 곤두섰을 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고 맙니다.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 출 17:2
주석서들은 이들의 태도를 놓고 매우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다고 비판합니다.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의 이 언사는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6)에 이어 물로 인한 두 번째 원망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찾지 못한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번번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ידשׁ לא 엘 샤다이)'이심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분은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신데,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항의하는 것은 출애굽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불신한 언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 속에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들이 갖는 불만이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것을 알기에 그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택합니다.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 출 17:4
혹자는 이 장면에서 히브리들이 본질적으로 문제를 삼은 것은 물이 아니라 출애굽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물이 없다는 원망은 자신들이 애굽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는 항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대근동의 일반적 관습처럼 실패한 지도자로 인식되는 모세에게 돌을 던질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이끌고 나오셨는지, 왜 그들이 원망하고 부르짖기 전에 미리 풍성한 물을 주시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성신학자인 '아르투로 파올리(Arturo Paoli)'는 고독 속의 비움을 배우기 위해 사막에 갔을 때, 사막생활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그것은 불편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사막생활의 무익함 때문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그 느낌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식(浸蝕)해가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의 내면에는 그런 갈증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노동의 치열함과 생산의 보람을 잘 아는 그들입니다. 애굽에서 물질적 생산을 이루어온 자신들은 애굽 사회를 지탱해온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처해진 사막은 지극히 수동적인 장소였고, 그 어느 것도 생산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은 스스로 침식되고 있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고, 하나님을 치열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막일기'에서 아르투로 파올리는 '베른하르트 벨테'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합니다.이 세상의 여러 한계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마치 텅 빔처럼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런데 그런 한계 상황에서는, 예수께서 지니셨던 비전을 지닐 필요가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근심에 빠뜨리는 고통 저 너머에서 "이것을 믿어라.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텅 빔'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의 자리로 여겨졌던 사막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같은 비전을 지닐 수 있다면 사막은 더 이상 어두운 심연(深淵)이 아니라 영성 발현의 장소이자 소명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영적 여정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삶의 에너지가 되는 '갈망(渴望)'은 영적 성숙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들을 목마름에 직면케 하심으로 물을 향한 그들의 갈망이 선용되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의 영적 에너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과정에서 해갈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셨고, 남은 광야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셨습니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 출 17:5, 6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십니다. 이들은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생명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나비의 성장 과정에 차원이 있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도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성이란 바로 그 하나님을 아는 차원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처음 자유인이 되어 광야로 나올 때는 애굽 땅에서 자기들을 호령하던 지배자들처럼, 자기들도 어서 강대한 제국을 이루어서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호령하고 싶은 속된 포부를 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즈음 성숙하게 변화되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온 천하에 증명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시작은 속된 욕심으로 출발했지만, 그러나 알과 누에고치에 얽매인 사고를 극복하고, 아름답게 날갯짓하며 훨훨 하늘을 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갈망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갈망이 삶을 성실과 행동으로 이끄는 에너지임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처음 갈망은 속되고 육체적입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직 내 신앙이 채 성숙에 이르지 못했는데, "탐심은 안 돼. 하나님만 사랑해야지" 하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 되고 율법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갈망의 차원과 방향성입니다. 방향을 하나님께 두고 점차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도 하고 회개도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나씩 가르쳐주실 때마다 "네" 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 신앙이 좀 더 성숙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차원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씩 갈망의 껍질들이 벗겨지면서 우리는 신앙의 신비인 완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누에고치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진실로 만나기 위한 순간순간의 자기 부정과 깨어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고, 지금 내 갈망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여인을 보십시오.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요 4:6-8
예수님과 수가(Sychar) 성의 여인이 야곱의 샘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이 대화의 흐름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우물의 물을 달라고 하시며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이 요청에 대해 여자의 믿음에 목마르셨기 때문이라고 했고, 토리노의 막시무스는 예수님께서 물을 청하신 것은 온 세상의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놀랍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a)라며 퉁명스럽게 예수님께 대꾸합니다.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요 4:9b),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가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요 4:10
예수님께서는 대화의 주제를 계속 '물'에 두시면서도 대화의 무게는 '그' 즉 '당신'에게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여인은 좀처럼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합니다. 그녀와 예수님의 대화가 팽팽하게 수평을 이룹니다.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요 4:11-15
예수께서 영(靈)의 음료로서 생수를 말씀하시면, 여인은 육(肉)의 음료로서의 우물물로 대답하고, 예수께서 '내가 너에게 샘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면 여인은 '당신은 두레박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시점을 주목해야 합니다.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요 4:16-17
우리는 이 대화를 보면서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 쳐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숱하게 우물물을 길어 마셔 왔지만, 그 물은 내면의 갈증은 해갈해주지 못하는 마셔도 또 마셔도 목마른 물이었습니다. 내면의 목마름 속에서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와 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의 삶은 황폐해갔고 자신도 이웃도 모두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저 옛날 광야에서 부르짖던 히브리들의 갈증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으로 남자들의 품을 떠돌던 여인의 갈증은, 그것을 육신의 갈증으로만 여겼다는 점과, 우물물만으로는 해갈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른 샘물, 그것은 우리들 실존의 해갈되지 않는 갈증입니다.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갈증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갈증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바라보고, 물 한 모금 먹고 또 하늘을 바라보는 병아리들보다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무지한 것 아닐까요?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갈증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 혹은 때때로 겪는 고난과 힘겨움은 우리 내면의 영성이 발현되는 자리이고,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 부르시는 소명의 자리라는 사실 말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3, 4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공허함으로 사방에서 벽을 느끼고, 해결되지 않는 환난과 고난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러나 매일 겪는 갈증이나 때때로 겪는 환난은 오히려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되고,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되어 우리를 차근차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갇혔다 풀어졌다', '갇혔다 풀어졌다'를 반복하며 마침내 애벌레가 궁극의 상태인 나비에 도달하듯, 우리 역시 때로 분노하고, 때로 갈망하고, 때로는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어가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의 나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마을로 뛰어 들어가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하며 온 마을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전도자가 되었듯이, 우리 역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인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변화되어 주님의 부르심에 황홀한 신앙의 날갯짓으로 반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그리스도 밖에서 해갈을 얻으려 몸부림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날로 변화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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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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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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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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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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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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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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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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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