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3주 빛이신 예수님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9:1-4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 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 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응송 | 시 27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 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서신 | 고전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 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 | 마 4:12-23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 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 시니
■ 묵상 | meditatio
① 사 9:1, 2을 묵상하십시오. 흑암의 땅, 멸시를 당하던 땅이 영화롭 게 될 수 있었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마 4:17-22을 묵상하십시오.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이 보이는 '빛을 향해 돌아선 자'의 참 모습은 무엇입니까?
③ 고전 1:10, 17-18을 묵상하십시오. 분쟁이 없는 같은 마음은 오직 무엇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빛이신 예수님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선지서(예언서)들을 지나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빛에 관한 이야기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들에 의한 복음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에 있어서 빛만큼 좋은 상징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주현 후 제3주일인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 역시 동일한 주제로서 '빛'을 다루고 있는데, 돌아보면 이 '빛'은 성탄 이후의 성서일과에서 계속 흘러오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을 비추신 참 빛이신 주님을 소개한 성탄절 복음(요 1:9-14)이 그랬고,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온 박사들에게 경배 받으신 주현절의 복음(마 2:1-12)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주현절기가 깊어가며 성서일과는 더욱 빛의 말씀으로 밝아져 갑니다. 회개의 세례를 기다리던 죄인들 틈에 끼어 그들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주님(마 3:13-17), 바로 그 예수님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는 주현 후 첫째 주와 둘째 주 구약성경에서 각각 이렇게 예언했었습니다.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 사 42:6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 사 49:6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이방의 빛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죄인들 속에 끼어 죽음을 맞으셨으며 그로써 '모든 의(義)'(마 3:15)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이후로 구약성경과 복음서는 세상의 빛이며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의 선포'를 숨 가쁘게 이어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 암흑을 가르는 빛이 되어 우리를 향해 비추어왔습니다.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딤전 6:16)이시고, 사도 요한의 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요일 1:5)이십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말씀 역시 이 빛에 대한 예언입니다.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사 9:2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빛이 비치리라 예언했던 바로 그 고장으로 예수님께서 가심으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가 예언했던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제 막 이루어지려는 찰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 마 4:12-16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이제 막 전개되려 하는 '장소'와, 그 장소를 향해 비쳐오는 '빛' 이 두 가지에서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가 각각 예언과 성취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 간의 일치점은 비단 해방과 구원이 결정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라는 장소의 동일성 뿐 아니라, '빛'이라는 상징의 동일성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사야서도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마 4:12-1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저자는 같은 사건을 두고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막 1:21;눅 4:31;요 2:12) 라고 일상적 언어로 보도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태복음 저자는 이례적으로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다고,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지명(地名)과 현재의 가버나움을 연관 지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거기에 두 가지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 동기는 가버나움이 옛적에 스불론과 납달리 두 종족이 쫓겨나 있던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나 누가나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이 현재의 일상적인 사역으로만 여겨졌지만, 마태는 같은 장면에서 먼 옛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8:5-9:1)의 성취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당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되받아서 선포하고 있습니다.먼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사 9:1-2
그리고 마태의 선포를 보십시오.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 마 4:15-16
그러니까 마태가 볼 때,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비치던 그 빛이, 옛적 스불론과 납달리 땅인 가버나움으로 지금 막 비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보도하는 또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옛 스불론 땅이고 납달리 땅인 이 가버나움에는 아직도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할 때도,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사망의 그늘진 땅'이었던 이곳은, 마태가 복음서를 쓰고 있던 당시에도 여전히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사망의 그늘진 땅'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유대인들을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흑암의 땅, 사망의 그늘진 땅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해 비치시는 빛이 아닌, 온 이방인의 빛이시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이방인의 땅 가버나움에 가신다"고, 그럼으로써 "흑암에 찌든 백성들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그럼으로써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마태가 전해주는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바로 이 빛,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치는 생명의 빛이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비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우리는 이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 옴에도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햇빛의 선물'에서 이렇게 안타까워했습니다.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마 4:17
가까이 도래한 천국을 바라보며 회개한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임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이미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그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했는데, 혹시 내 마음이 아직도 흑암 가운데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를 냉정하게 돌이켜봐야 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항상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곰곰이 읽어보면 마태도 이사야 선지자도 '흑암'과 '사망'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배치하고 있습니다(사 9:1-2;마 4:15, 16). 빛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생명도 성장 가능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사망의 그늘진 땅이 되고 맙니다. 카르투시오회의 랑스페르지오는 이렇게 우리 마음에 호소합니다.그대여, 우리는 모두 암흑 속에서 태어났으며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 남아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제는 정의의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암흑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그들의 발길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오십니다. 그렇다면 암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대의 지성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 그대의 의지와 기억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혹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는 내 존재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이미 비쳐오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질문을 바꾸어볼까요? 회개하셨습니까? 나의 지성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에 대해, 나의 의지와 기억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에 대해, 회개하셨습니까? 지금 이 중대한 순간에, 빛이 사망의 그늘진 땅으로 비쳐 들어오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그 빛을 보고 있으며, 그늘에 앉아있는 인간들의 마음마다 천국이 지금 완성되어야하는 이 절박한 요구 때문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회개하라(μετανοεῖτε 메타노에이테)" 이 말씀은 명령형으로 "너희는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왜 주님은 회개만 요구하실까요? 아직도 마음이 흑암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걸려있는 문제가 '회개' 딱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대단히 함축적이고 깊습니다. 회개란 '슬퍼하며', '돌아와',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가 나를 개선하고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을 향해 돌아설 때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회개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내가 슬퍼하며 돌이켜 빛을 향해 서는 것입니다. 그때 나의 지성이 밝아지고, 의지와 기억이 밝아지고, 생명과 기쁨과 희망이 마음속에서부터 자라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일을 시키십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마 4:18-22
사실 여기 나오는 제자들도 처음부터 빛을 향해 돌아선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뜻 용기 있게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자체가 이미 그들의 밝아진 마음상태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마 4:20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마 4:22
장차 사도가 될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온전히 맡기기까지에는 점진적 과정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맨 먼저 그물을 버리고, 그 다음에는 배를, 마지막에는 아버지까지 떠납니다. 어쩌면 회개란 이렇게 점진적인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결별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자신으로부터의 결별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태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이 제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까닭은 나를 향해 비쳐오는 그리스도를 향해 어떤 자세로 돌아서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도 '회개'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 안에서의 자기 위치나 위신 때문에 사사로이 자기감정을 드러내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려는 자들을 격한 어조로 책망하고 있습니다.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 고전 1:10-13
교회 안에서 서로 갈라지거나 서로 대립을 일으킨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난 악한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돌아서야 할 대상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마음이 흑암 가운데 계십니까? 주님의 빛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에 비쳐들고 계십니다. 죄인들 가운데 서서 함께 세례 받으신 예수님의 겸손함이 우리에게 빛입니다. 스스로를 범죄자의 하나로 여겨 범죄자들 속에 끼여 죽어가면서 그들이 용서받도록 기도하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빛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미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은 그 부드러움이 우리에게 빛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우리는 그 빛을 응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오늘 응송의 시인처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 어깨로 내려앉은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내면으로 비쳐든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밝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회개하지 않은 채 그늘진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빛을 향해 돌아섬으로 진정한 따름이 일어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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