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4주 말씀을 가려듣는 영적 감수성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7:10-16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 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응송 | 시 80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서신 | 롬 1: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 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 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복음 |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 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 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 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7:12을 묵상하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 라" 라는 이사야의 권면에 아하스는 뭐라고 말합니까
② 마 1:24을 묵상하십시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에 요셉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③ 롬 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 로 부르심과 택정함을 입은 것이 무엇을 위함이라고 말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말씀을 가려듣는 영적(靈的) 감수성
바야흐로 우리는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고, 아기예수 탄생의 소식이 한결 가까워진 가운데 24절기는 동지(冬至)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무렵 해운대에는 어김없이 빛 축제가 시작되고 세인들은 빠르게 성탄축제의 분위기로 젖어듭니다. 거리를 물들인 형형색색의 빛 향연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설렘으로 이끕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빛의 거리를 걷다 보면 내가 그리스도인인 까닭에 감지되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가슴 한켠에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즈음을 지나는 자신의 심정(心情)을 윤동주는 이렇게 시(詩)로 담아냈습니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의 아침, 1941.5)
하얗게 눈이 덮이면 사람들은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고, 강아지는 신이 나 들판을 뛰어다니는데, 윤동주는 전신주 울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 마음이 부끄러운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왜 나는 형형색색 빛의 거리에서, 그 안에 생명을 머금고 사람들의 빛(요 1:4)으로 오셔서 어둠을 비추신(요 1:5) 아기 예수님을 떠올리지 못하고, 한 달만 지나면 꺼져버릴 전깃불에 그토록 마음 동하며 걷고 있는지, 그 영적 무심함이 부끄러운 겁니다. 윤동주는 하얗게 눈 덮인 거리에 서서 들려오는 말씀에 '무슨 계시일까' 하며 자기 상태를 돌아봅니다. 그토록 섬세한 영적 감수성이 있었기에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서시)에도 괴로워했었습니다. 아무나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고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표면적 시선으로만 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은 한낱 뜻 없이 지나가는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연현상 너머를 보았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하신 하나님 마음을 보아낸 것입니다. 그런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하얗게 눈 덮인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전신주 잉잉 우는 소리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들으며 "무슨 계시일까"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의 결과로서 그는, 죄를 지어 눈이 밝아진 자신에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윤동주와 같은 영적 감수성을 내면에 갖출 것을 요청합니다. 채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 있지 않은 두 사람에게 어느 날 불현듯 전달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시 유대 왕이던 아하스에게 주신 메시지이고, 복음서는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마리아의 정혼자인 요셉에게 전해준 메시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700년이라는 시대적 거리가 있었음에도 주어진 신탁(神託 oracle)의 내용이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사 7:14, 마 1:23
그런데 같은 내용의 신탁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반응은 각각 달랐습니다. 700년 전 인물인 아하스는 이 말씀 앞에서 손사래를 치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700년 후의 인물인 요셉은 이 말씀에 대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각각의 태도에 따른 결과도 그 태도만큼이나 현저히 달랐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사 7:10
여기서 '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전에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 '전(前)에 하신 말씀'이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대적자들이 심히 분노할지라도 그들은 타다가 만 두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불과하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또', '재차' 아하스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걸 보면 아하스가 '앞의' 말씀을 못 믿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믿음 없음이 자신 뿐 아니라 백성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때 왕과 백성의 마음을 이렇게 꿰뚫어 보았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사 7:2b) 바람에 요동하는 풀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것, 불신앙이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7장은 이사야서의 중심 메시지인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는 명제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들은 '굳게 믿지' 못한 까닭에 '굳게 서지' 못한 채, 왕의 마음도 백성의 마음도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BC 740-738년경에는 앗수르 제국의 강력한 군주인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북시리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다 정복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디글랏 빌레셀의 무리한 조공 요구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해서 아람의 르신 왕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 동맹군은 유다의 아하스 왕을 찾아가 반 앗수르 연합전선에 동참하도록 강요합니다. 하지만 유다의 아하스 왕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자신들의 계획을 잘 따르는 왕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우고 예루살렘으로 진격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사 7:7)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윗의 왕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언약하신 것인데(삼하 7:11-16; 시 89:27-37), 세상의 왕들이 도모한다고 해서 교체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없던 아하스 왕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결국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그 대가로 자기 나라를 앗수르에 예속시켜 버립니다. 이때가 BC 721년입니다. 아하스 왕이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자, 이사야 선지자가 그를 이렇게 설득합니다.
너는 야훼 너의 하나님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여라. | 사 7:11, 공동번역
그렇게 믿어지지가 않으면 하나님께 '징조' 즉 지하에서 벌어지는 지진이든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이든 보여 달라고 요청하라는 겁니다. 굳게 믿고, 굳게 서기 위해 어떤 징조라고 좀 구해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사 7:12
아하스의 이 대답은 위선의 전형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신 6:16의 율법 조항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앗수르'에 기대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사야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당시 유다의 절망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거칠게 위협하던 북이스라엘도 아니었고, 우방이라고 자처하며 실제는 자기들 이익을 우선하던 앗수르도 아니었고,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바벨론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절망은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불신앙이 저지른 아하스의 정치적인 선택은 결국 자기 백성들을 외세의 수탈에 내몰리게 하고, 자기 나라를 식민지로 예속시켜버리고 맙니다. BC 733-732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이런 사례를 통해 절감합니다.
지난 11월 4일 워싱턴에서 열렸던 제54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이 있습니다. 그 중 2항은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위한 공동의 비전'을 주제로 하고 있고, 한미 동맹이 상호 신뢰, 자유, 민주주의, 인권, 법치라는 동일한 원칙과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재적 전쟁공동체로서의 이 포괄 동맹은 평시, 유사시를 불문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를 전쟁준비와 군사 작전에 복속시킴으로써, 군사 분야에서 대미 종속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경제와 기술 분야에서도 대미 종속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평화와 민생이 설 자리를 잠식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는 반복되는데, 오늘 구약성경에서 목격한 남 유다의 위기상황이 오늘날 한반도에 재현되는 듯해 마음이 아픕니다. 아하스의 정치적 선택은 결과적으로 남 유다가 앗수르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영적 타락과 무능의 결과였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한 말씀은 두고두고 우리에게도 울림이 됩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이사야는 더 이상 아하스에게 예언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미래의 유다 백성을 향해 예언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 사 7:13
아하스의 불신앙은 단지 사람만 괴롭힌 것이 아닌, 하나님을 괴롭히는 반역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이제 아하스가 아닌 '다윗의 집'을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예언이 이랬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사 7:14
우리는 여기에서 이사야의 희망이 700년 후에 그 땅으로 오실 예수께로 모아지는 걸 봅니다. 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예언이 있고 나서 유다는 멸망합니다. 그리고 장구한 세월이 또 흐르게 됩니다. 수많은 세대가 그 유다 땅에서 살고지고, 그렇게 700년이 흘러간 어느 날, 새로운 배역들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데, 오늘 복음서는 요셉이라는 젊은 남자와, 마리아라는 앳된 처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 1:18
여기 등장하는 마리아는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처녀입니다. 아직 처녀인 그녀의 태중(胎中)에서 벌어진 잉태는, 마리아와 그녀의 약혼자인 요셉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리아의 반응이 누가복음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반면(눅 1:30-38; 46-55), 요셉의 반응은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때 요셉이 가졌던 고민을 소개하며, 극심한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그가 마리아를 위해 매우 사려 깊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마 1:19).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 1:20-23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믿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그녀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이 믿기 어려운 말 앞에서 요셉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요셉은 주의 사자가 전해준 말의 '사실 여부'를 가려내는 일보다 '믿음의 당위성' 즉 '믿어야만 하는 당위성'에 더 적극적으로 부응합니다. 그 당위성은 아기의 이름 안에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 1:21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Jehoshu'a)' 즉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아기의 두 번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마 1:23
이 두 번째 이름에는 첫 번째 이름 '예수'보다 메시아의 신비가 더 선명하게 담겨있었습니다. 자기아내인 마리아가 낳을 아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 구원의 신비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가깝게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이 위태롭고, 심지어 마리아의 목숨마저 위험한 일이었고, 장차 자기 아들의 죽음을 십자가 아래서 바라봐야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이 비극적인 아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내의 비극적인 미래도 수용합니다. 그리고 함께 감당해야 할 자신의 비극적인 미래까지 받아들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마 1:24-25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를 따름으로 함께 겪게 될 박해와 희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믿고 흠모하며 그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서신서에서의 사도 바울이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롬 1:1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만물은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두려움에서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 향한 사랑 때문에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고백에만 그치지 않고, '부르심'과 '택정'이라는 두 단어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종'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소개라면 '사도'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사도로 택하신 목적은, 그의 통찰에 의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였습니다. 바울의 놀라운 자기 인식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복음 안에 철저하게 매어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에 대해 약속하신 것(롬 1:2)이 바로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육(肉)으로는 '다윗의 혈통'일 뿐이었지만, 영(靈)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 분 안에 있는 생명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었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복음'에 자신의 평생을 헌신한 것입니다. 역사는 이런 영적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고, 하나님 나라도 이러한 영적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게 완성되어 갑니다.
아하스는 자기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징조를 작은 일로 여깁니다. 성경이 평가하는 그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괴롭히는 자'(사 7:13)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징조를 자기 안에 받아들여 자신을 헌신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하고, 그리스도는 그의 헌신을 통해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인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바로 그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윤동주는 전신주 잉잉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계시일까' 하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그는 자연현상 너머를 보았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보아냅니다. 대림절도 지나가고 성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우리의 귀와 눈과 마음은 과연 어떤 감수성으로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요?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현실적인 고려로 주님말씀이 거부되고 있지 않은가?
② 자연 현상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가려듣고 순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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