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3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 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 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 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 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 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응송 | 시 146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약 5:7-10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 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 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 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 로 삼으라
복음 | 마 11:2-11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 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 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 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 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 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 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1:6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요한의 의심과 회의(懷疑)가 시작된 시점은 어디라고 보십니까?
② 사 35:1-4을 묵상하십시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 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③ 약 5:7, 8을 묵상하십시오.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의 자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이
지난 주 우리는 광야의 세례 요한에게서 절제와 고독과 자기 비움의 전형을 보았습니다. 삶의 여백 없이 지나친 과밀에 시달리는 우리로서 그가 입은 낙타 털옷, 그리고 그가 먹었던 메뚜기와 석청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신선한 충격에로 우리를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요한을 보면서 느끼는 충격은 그가 평생 기다려온 것을 알면서 더욱 배가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주님을 기다리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은 요한이 스스로를 처하게 한 절제와 고독과 자기 비움이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우려는 '복음적 비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투로 파올리는 '사막일기'에서 비움은 태초의 풍요로움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태초의 혼돈과 공허에서 그는 역설로서 비움의 풍요를 보아낸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가 비움의 풍요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아르투로 파올리 신부에 따르면 어떤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거나 자기 능력에 호평을 받는 사람은 비움을 자기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출발선으로 삼기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비움은 곧 자신의 업적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역시 비움을 거부하는데, 소비사회는 비움에 대한 공세적 방어선이고, 비움에 대한 두려움의 생생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절제와 고독과 자기 비움에 처하게 함으로써, 태초의 비움이 하나님의 창조를 불러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를 불러옵니다. 세례 요한이 해만 뜨면 했던 말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가까이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으로 절제와 고독과 비움 속에서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이 세례요한을 예수님께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등 제자들과 달리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여는 과정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示唆)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이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의 요한과 너무 달라서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마 11:2, 3
여기서 '오실 그이'가 누구인지 마태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 49:10;시 118:26;말 3:1-3 등에서는 '오실 그분'이 정확히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요한의 이 물음은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미 그는 3:11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내 뒤에 오시는 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런 요한이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할 때, 우리는 그가 품었던 희망 전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다 보면 예수님에 대한 그의 확신에 찬 증언이 연거푸 이어집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요 1:29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요 1:30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 요 1:31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2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 요 1:33, 34
우리가 당황스러운 것은 어떻게 요한이 가졌던 이 확신이 그렇게 갑자기 흔들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직면한 요한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확신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질문이 요한 자신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흔들리고 있는 제자들을 위한 질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능성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를 방문하던 길에 자기 이복동생의 아내와 간통하고 그 빼앗은 제수와 결혼한 것을 책망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요한과 사이가 좋지 않던 헤롯은 요한을 사해 동쪽 마케루스(Machaerus) 요새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드넓은 광야를 활보하던 그에게 지하 감옥의 어둡고 비좁은 공간은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의 수감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 옴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를 괴롭혔던 것은 옥에 갇혔다든지, 죽음이 임박해 있다든지 하는 자기 신상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갇히기 직전까지 그가 예언한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고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의 곡식을 거침없이 가리는 심판자(마 3:11, 12), 그리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어 강력하며 단호한 역할을 펼치는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해주는 예수의 모습은 자기가 희망한 메시아와 너무 달랐습니다. 더욱이 요한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분이 정말 메시아라면 자기를 위해 정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단 말인가 하는 일말의 섭섭함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메시야 사역에 대한 이해의 다름' 갈등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정말 잘한 것은, 그 의심을 품은 채 혼자 가슴앓이 하지 않고, 주님께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마 11:4, 5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마 11:4 공동번역) 라시며 설명해주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 사역이 그동안 요한이 희망해 온 메시아 사역과 결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설명해주시는 당신 사역은 오히려 오래 전에 구약성경에서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과 더 가까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 사 35:5, 6
이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 사역은 심판이었는데, 이사야의 노래를 통해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신 메시아 사역은 치유와 회복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부드러운 메시아이셨습니다(사 42:3;마 12:20).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봅니다. 요한은 율법의 굴레를 벗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즉 그는 율법의 마지막 담지자로서 복음을 세상에 소개하는 전환기의 선지자였습니다. 요 1:7절은 그의 임무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빛을 소개하고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그동안 외친바 대로 말하면, 율법 다음에 세상에 비치는 빛은 복음이었고(요 1:7, 8), 율법은 복음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으며(요 1:27), 율법은 쇠해야 하고 복음은 흥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요 3:30). 그러나 그는 아직 율법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는 아직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치 마케루스의 감옥 안에 몸이 갇혀 있듯이, 마케루스의 쇠창살이 그 몸을 감금하고 있듯이, 율법의 쇠창살에 갇혀서 여전히 심판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요한도,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평가해버리기에는 그 동안 요한이 선포해 온 복음이 너무 확신에 차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우리가 눈 여겨 볼 측면이 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시점은 제자들이 요한을 찾아와 예수의 사역에 대해 전해준 직후였습니다(마 11:2). 어쩌면 제자들은 요한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전하며 그 동안 요한에게 배워 온,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기대해 온 메시아 사역과 결이 다른 예수님 모습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라고 묻게 한 것은 요한 자신의 의심에서 비롯된 질문이라기보다는, 흔들리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질문이었을 가능성입니다. 즉 제자들이 자신에게 배운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예수님께 보냈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 요한의 진실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요한은 미스터리를 남긴 채 머지않아 헤롯에 의해 잔인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을까요?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이해도 설득도 그에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한 심판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가슴에 사무쳐하며 눈을 감지 못한 죽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소명을 마친 흡족함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았을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비춰온 복음을 따라서 시선을 조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삶을 곰곰이 분석해 보면 복음보다 율법에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보다는 판단하고 의심하고 정죄하는데 익숙합니다. "하나님은 왜 저런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실까?" 하는 우리의 생각과 언어 속에서 율법주의가 번득입니다. 나는 복음으로 인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도, 내가 정죄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복음에 의해 구원받는 사실에 대해서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6).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메시아 스캔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 받으실 보배로운 나의 주님이시지만 그러나 때때로 주님 뜻과 내 뜻이 부딪칠 때, 주님은 나를 실족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 2:7, 8절에서 주님께 대한 반응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십니까? 항상 주님 마음이 꼭 여러분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때때로 나의 기대와 주님의 뜻이 달라서 화나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주님이십니까? 베드로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께 부딪히고 걸려 넘어지는 것은 주님 말씀을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처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뭅니다. 그는 같은 절 안에서 주님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a)라고 찬사를 받았는가 하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b) 라고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먼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마 11:11a)는 평가는 요한의 사역과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고, 무리들에게 예수를 일깨워준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물론 요한 전에도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예언한 적이 있었지만, 요한처럼 친히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소개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마 11:9)였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 11:11a)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또 하나의 평가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마 11:11b)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해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위대했고 그들의 메시지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자 중에 가장 큰 자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이고, 메시지 중에 가장 큰 메시지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입니다. 우리가 비록 작은 자라도 우리에게는 요한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용서와 사랑과 구원 그리고 부활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 안에서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라면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지금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복음 앞에서 흔들렸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선구자였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한 선지자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을 의심한 순간부터 초라한 의심자로 실족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경 속의 선지자라도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실족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흔들리는 갈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전하십니까? 미처 알지 못했던 예수님 모습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고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한결 다듬어지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약 5:7, 8
여기서 사도 야고보는 농부의 마음을 소개합니다. 농부는 밭을 골라 씨앗을 심은 후 서두르거나 조바심 하지 않습니다. 농부는 밭에 심겨진 씨앗에서 때가 이르면 싹이 돋고 자라 열매가 맺힐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때가 오면 이른 비를, 때가 오면 늦은 비를 뿌려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했던 열매를 품에 안을 때, 농부는 믿음에 대한 결실을 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광야와 메마른 땅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백합 같은 희망을 피워낼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내 욕심에 겨운 믿음이 아니라,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나타나신 그대로' '있는 그대로' 화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사실이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특권을 추구하는 우리 바람과 부딪힐 때도 우리는 예수님을 내 마음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나타나신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하신 바로 그 분'이 되심은 그러한 순전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을 지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마다 오시는 그 분이 손꼽아 기다려지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님과 다른 내 생각이 실족의 이유가 되고 있지 않은가?
② '본대로 들은 대로' 믿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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