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4주 그리스도인다운 감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신 26:1-1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 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 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 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 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 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 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 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응송 | 시 100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서신 | 빌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 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 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 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복음 | 요 6:25-35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 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 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신 26:1-3을 묵상하십시오. 신명기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의 땅이었습니까?
② 요 6:32, 33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구하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③ 빌 4:4-7을 묵상하십시오. '주 안에서' 기쁨과 관용과 기도와 간구 그리고 감사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다운 감사
하나님의 시간을 걷고 또 걸어서 시나브로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즉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 주부터는 신앙의 새해인 대림절로 들어서는데, 24절기력으로도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을 이틀 앞둔 오늘이고 보니, 하나님의 시간도 자연의 시간도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을 밟고 서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성찰하게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나이와 함께 나의 내면은 얼마나 성장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삶을 여행에 빗대어서 '여행만큼 우리의 생을 상징하는 말은 없다'며, 개인의 역사란 결국 '어디'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 여행인데, 그 여행은 '자기내면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다비드 르 부르통 역시 '걷기예찬'에서 소로우의 말을 인용해 '여행은 상징적으로 성스러운 땅에 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나온 시간여행 속에서 스스로의 내면과 진지하게 만나보고 그 결과로 나이만큼 성숙해지셨는지요? 그리고 성스러운 땅에 도달하셨는지요? 오늘 구약성경은 40년 광야 여행 끝에 마침내 가나안에 도달한 출애굽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그 뜨거운 광야를 헤매게 하셨으며, 그들은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여행하는 40년간 어떤 성찰에 직면하고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을까요? 그 40년 동안 그들은 자기 내면과의 만남을 통해 '성스러운 내면으로, 성스러운 땅'에 이르렀을까요? 모세는 신 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며 그 여행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b). 그들은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과 남루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낮아져서 하나님 주신 규례와 법도를 겸손히 따르는 삶을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또 모세는 3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며, 또 그들도 알지 못하며 그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성경 안에서 그 출애굽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 중 다수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과 만나지도 못하고,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절실히 깨닫지도 못한 채 출애굽한 보람도 없이 성스러운 땅에 이르지 못하고 그만 광야에서 죽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만 지금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섰는데, 광야에서 겪은 가족의 죽음과 슬픔, 외적의 침략으로 인한 온갖 시련들, 그 40년의 회한을 저마다 끌어안고 요단 강가에 서 있는 모습들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신 25:17-19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역사 속에서 겪었던 아픔을 이렇게 회상시켜 주십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꿈에라도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해서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고단한 행군을 이기지 못하고 뒤떨어진 약한 사람들을 아말렉이 습격해 무참하게 살육해 버리고 만 갓입니다. 그날부터 아말렉이란 이름은 그들 가슴속의 증오로 남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몸서리쳐지는 그 아픈 기억을 기껏 떠올리게 하신 후에 다시 잊으라고 하십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하나님은 왜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고, 이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라고 하시는 걸까요? 과거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 설 때, 비로소 그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만 '내면이 성화된 존재'로서 성스러운 땅을 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주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명령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 신 26:1, 2
그들이 광야의 아픔을 극복한 후 들어갈 가나안 땅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땅이 '그들이 노력해 쟁취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 차지하게 하신 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신 26:1)',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땅'(신 26:2),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신 26:3)' 이것이 가나안 땅의 특징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껏 남의 땅에서만 살아온 그들의 역사를 볼 때, 한편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껏 그들이 경험한 거라곤 남의 땅에 살면서 채찍에 맞았던 기억,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사나운 적들에게 가족이 살해되었던 기억,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쩌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걸어오면서 그들이 그토록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산 것도 그 끔찍했던 과거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두웠던 것만큼 부정적이었고, 시달렸던 것만큼 사나워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광야를 걸어오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들에게 내리셨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을 마시게 하고, 옷이 해어지지 않게,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겪은 끔찍한 학대와 광야에서 가족들을 잃은 슬픈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더 몸과 마음에 배이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그 심성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워지고 사나워진 심성은 새로운 미래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적합하지도 않았습니다. 새로운 땅에 어울리는 심성은 감사였고, 새로운 미래에 어울리는 심성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행복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해야 할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거둔 각종 햇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땅으로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 신 26:3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절정에 섰을 때, 자기만의 고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든지, 도와주신 은인들께 감사한다든지, 오늘의 내 성취가 자랑스럽다든지, 그런데 가나안에서 거둔 첫 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들고 하나님께 가서 "나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룁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 고백은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으십니까? 지금까지 걸어온 나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 제 삶은 당신의 은총입니다. 아버지께서 도우셔서 오늘이 있습니다." 라는 진심어린 고백을 가슴에 가지고 계십니까?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호텔 마다가스카르 라는 책에 보면 지은이가 편지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시간을 멈출 능력을 신에게서 부여받은 남자의 이야기 알아? 그는 언제 시간을 멈출지 정하지 못해서 그냥 늙어 죽었대.
그러자 상대방이 이렇게 답을 합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것도 멈추고 싶은 자리에 멈추는 것도 둘 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정말 두려운 건 아무 생각도 없이 떠밀려 가는 거야"
여러분은 지나온 시간여행 속에서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출애굽한 히브리들은 지금 자기들 여행의 목적지인 가나안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이 찰나에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행복했을까요? 사실 그들이 지금 들어갈 가나안은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지은 햇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달려갈 만한 그 무엇조차 있어 보이지 않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심고 거두어야 할 것은 사실은 곡식이 아닌 신앙이고 감사였습니다. 참 감사는 곡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곡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심고 거두는 것은 농부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들의 인생 자체가 심고 거두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갈 6:7-9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래서 감사절도 농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심고 거두고 그 열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이라는 길목을 지나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데, 과연 우리는 지나온 시간 동안 무엇을 심고 거두었을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인생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심는다고 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내 육체를 위하여 심고 썩어질 육체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일까요? 추수감사절은 지나온 내 삶의 열매를 주님께 보여드리고 감사함 속에서 새롭고도 영원한 내일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 신 26:4-9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뿌리와 그들의 비참했던 과거가 다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저자는 그들이 겪은 비참한 과거에서 분노와 원망을 거두어내지 않습니다. 압제와 학대를 당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보아내고, 그 하나님께서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라고 감격스럽게 고백합니다. 분명 그들이 지나온 과거는 압제와 학대와 살육으로 얼룩진 고통스럽고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진 과거였지만,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았더니 매 순간순간이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행복한 순간',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당신을 믿도록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요 6:30).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요 6:31).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내뱉는 이들의 말은 언뜻 들으면 생존을 위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곱씹어보면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던 사탄의 유혹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요 6:32, 33
주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 너희 조상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라는 것이고, 다음은, 그럼에도 그 떡은 참된 떡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구해야 할 떡은 배를 불려주는 떡이 아닌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농부의 수고를 통해 곡식과 채소를 추수하고, 아내의 수고를 통해 따뜻한 밥을 지어먹지만, 그 이전에는 지난여름 내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태양과 비 즉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상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고, 이 밥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생명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 빌 4:6, 7 표준 새 번역
떡에 대한 집착은 염려를 낳습니다. 하지만 집착보다 기도와 간구가 먼저 있다면, 우리는 염려가 아닌 감사를 추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헤아림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당신께 있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기도와 간구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평화가 바울 자신의 내면에도 있었기에, 그는 우리에게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상태에서 그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그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상황 하나로만 본다면 그는 기뻐하기보다는 염려와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 해답을 '주 안에서'라는 어떤 상태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은 '주 안에(엔 퀴리오 ἐν κυρίῳ)'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적 환희를 자신이 체험했기에 그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주 안에서'의 상태를 당부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고, 24절기력으로도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을 이틀 앞둔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도 자연의 시간도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을 밟고 서 있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에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감사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지고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날 수를 다 채우지 못한 주검들은 아직도 그 죽음의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고, 가족들은 피맺힌 슬픔을 안고 땅으로부터 하늘로 호소하는데, 감사의 시간이 왔다고 무작정 감사하는 것이 과연 교회가 보일 태도인가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압제와 학대와 살육을 당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에 감사해야 했던 이스라엘처럼, 어둡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한 순간도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순간을 견뎌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는 떡에 반응하고 집착하며 살아온 우리를 변화시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난 속에서도 '주 안에서'의 삶을 살게 하시고,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지막 시간여행을 잘 끝마쳐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한해를 걸어오는 동안 나의 내면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시고,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고 성화시켜 성스러운 땅에 도달하게 하신 은총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갇혀 분노와 우울함 가운데 있지 않은가?
② 내면과의 만남을 통해 성화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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