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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2주 그리스도인다운 시선(視線)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1-05 16:04
조회
537
성령강림 후 제22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학 1:15b~2:9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 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 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 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 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 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 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응송 | 시 145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 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서신 | 살후 2:1~5, 13~17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 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 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복음 | 눅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 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 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 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 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 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 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 묵상 | meditatio
① 학 2:5을 묵상하십시오.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며 새 성전의 초라함에 낙담한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② 눅 20:38을 묵상하십시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 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③ 살후 2:1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신 목적 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마치 하나의 펼쳐진 책과도 같습니다. 거기에는 창조의 언어들 즉 말씀이 가득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마 6:26)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시고,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8)시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게' 하신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아라"와 "살펴보아라"하신 말씀은 "읽어라"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새와 들꽃을 관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언어들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10:17).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구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말씀에 부응해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전 구약시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번번이 하나님의 의지와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당신을 형상(形狀)으로써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 즉 '하나님 형상으로' 오신 분,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1:25-27).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여러 세기와 세대 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 신비는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났고(골 1:26),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난 메시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등을 통해 말씀으로 다 표현해낼 수 없던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성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사(聖事 sacraments)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총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 예배의식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사를 보아낼 수 있는 시선을 갖추는 것입니다. 김희욱 선생은 '관음과 성모 그리고 페미니즘' 서문에서 두 가지 그림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표상'과 '의상', 즉 육안으로 보면서 느끼고 즐기는 그림과, '심안' 또는 '영안'에 의해 보이며 마음이 정화되고 승화되는 그림입니다. 책에서 김희욱 선생은 그림 속 그림을 관상하며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 능력으로 터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를 권장합니다. 마음이 정화되고 승화되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려면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시켜 '심안' 또는 '영안'을 떠야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보아낼 수 있는 것도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시켜 '영안'을 뜰 때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안타까운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ניא, 아인)'에 얽매여서 보이지 않는 '여호와(יהוה, 야훼)'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학개 선지자가 여호와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진 날짜와 소식의 방향 즉 수신자들입니다. 소식이 전해진 날짜는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 즉 7월21일이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건축자들이 공사를 약 1개월 간 진척시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진 방향 즉 이 소식의 수신자들은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입니다. 이 중에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이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Cyrus)의 칙령에 의해 BC 537년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귀환한 지도자로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도와 BC 536년 성전의 정초식을 거행한 인물입니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에스라 3:2, 8에 언급된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동일인물입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손이기도 한데, 그는 귀환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고, 스룹바벨과 함께 제2 성전을 완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은 1:12, 14절에서 언급된 '남은 모든 백성'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성전재건을 촉구하는 학개의 선포를 들은 후에 하나님의 전 건축을 소홀히 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혈통이 좋고 믿음도 신실한 사람들에게 학개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완공하고 보니까 과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해 외형적(外形的)으로 너무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3:12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과거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새 성전의 치수를 정해 놓았을 때부터 이미 그 초라함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학개 선지자는 일부러 시각적 표현이 담긴 질문을 그들에게 던집니다.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이 시각적인 것에 많은 부분 의존되는데, 바로 그런 시각적인 것들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짚어주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라든지,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라든지, '남은 자들' 그들은 모두 당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신앙적으로 남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으로 인해 그만 낙담에 빠져버린 모습을 보면서 소위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해 온 우리의 지나온 영적관행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학개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 오늘 우리도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낙담하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스룹바벨아, 여호수아야, 이 땅 모든 백성아" 하면서 의기소침한 너희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굳세게 해야 할 이유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오늘 우리가 처해진 삶의 자리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들로 인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이 의기소침하고 낙심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은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을 떠야만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계속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 말씀은 4절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던 "굳세게 할지어다"와 같은 명령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굳세게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하신 말씀'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결정적 관계를 맺었던 출애굽 때 맺어진 언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언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약속을 꼽자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출 19:5, 6; 34:10, 11 신 12:5, 11, 21 등에서 여러 표현으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라시며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오메데트(תדמע)'인데,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할 때 쓰는 분사형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분사형은 '중단 없는 계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나의 영' 즉 '성령'이 과거에 너희 조상들에게 그랬듯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기탄잘리에서 "연꽃이 핀 날, 내 마음은 방황하고 있어서 꽃이 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꽃이 그토록 가까이 있음을, 또 그 꽃이 나의 꽃임을, 그 완벽한 향기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자신의 마음의 방황으로 인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거나 낙담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까이 있어도, 또 그 은총이 나를 위한 은총이어도, 그만 방황과 낙담에 겨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중에, 성전의 초라한 외형을 보고 또 다시 낙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재적 도우심을 '약속으로' 확신시켜 줍니다.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언어로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노아 홍수나 출애굽 같은 어떤 사건이 반복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이스라엘에는 그 약속과 연결 지을 만한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학 2:7b) 하신 말씀은 이방나라들의 보배와 은과 금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동되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가까운 미래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약속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봐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는 지금 유다 백성들이 그들이 과거에 눈으로 보았던 솔로몬의 영광에 붙잡혀 미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영(靈)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영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성취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그런 거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 11:1-3 공동번역).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육의 눈'으로 보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영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미래'가 '보이는 현재'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아브라함을 포함한 족장들과 모세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배'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든 아니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재료로 해석하든 그것은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약속하고 있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하신 말씀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하신 말씀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질 부활의 미래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서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눅 20:27)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38) 하신 말씀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이루어질 부활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할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만 바라본다면 심지어는 자신마저 참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있음'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죽어야할 '없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왜곡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온갖 폐해에 존재 전체가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살후 2:3)고 엄히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살후 2:13)에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너희에게 머물러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에 온전히 마음 두지 못하고 '보이는 현상'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낙심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면, 오늘부터는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며, 육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밝히 뜨고, '보이지 않는 진리' 위에 굳게 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보이는 현실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진리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②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학 1:15b~2:9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 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 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 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 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 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 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응송 | 시 145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 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서신 | 살후 2:1~5, 13~17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 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 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복음 | 눅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 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 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 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 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 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 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 묵상 | meditatio
① 학 2:5을 묵상하십시오.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며 새 성전의 초라함에 낙담한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② 눅 20:38을 묵상하십시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 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③ 살후 2:1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신 목적 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다운 시선(視線)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마치 하나의 펼쳐진 책과도 같습니다. 거기에는 창조의 언어들 즉 말씀이 가득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마 6:26)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시고,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8)시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게' 하신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아라"와 "살펴보아라"하신 말씀은 "읽어라"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새와 들꽃을 관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언어들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10:17).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구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말씀에 부응해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전 구약시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번번이 하나님의 의지와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당신을 형상(形狀)으로써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 즉 '하나님 형상으로' 오신 분,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1:25-27).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여러 세기와 세대 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 신비는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났고(골 1:26),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해 드러난 메시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등을 통해 말씀으로 다 표현해낼 수 없던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성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사(聖事 sacraments)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총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 예배의식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사를 보아낼 수 있는 시선을 갖추는 것입니다. 김희욱 선생은 '관음과 성모 그리고 페미니즘' 서문에서 두 가지 그림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표상'과 '의상', 즉 육안으로 보면서 느끼고 즐기는 그림과, '심안' 또는 '영안'에 의해 보이며 마음이 정화되고 승화되는 그림입니다. 책에서 김희욱 선생은 그림 속 그림을 관상하며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 능력으로 터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를 권장합니다. 마음이 정화되고 승화되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려면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시켜 '심안' 또는 '영안'을 떠야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보아낼 수 있는 것도 영성과 깨달음의 흐름을 자정시켜 '영안'을 뜰 때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안타까운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ניא, 아인)'에 얽매여서 보이지 않는 '여호와(יהוה, 야훼)'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학개 선지자가 여호와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 학 2:1, 2
여기서 우리가 먼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진 날짜와 소식의 방향 즉 수신자들입니다. 소식이 전해진 날짜는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 즉 7월21일이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건축자들이 공사를 약 1개월 간 진척시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진 방향 즉 이 소식의 수신자들은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입니다. 이 중에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이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Cyrus)의 칙령에 의해 BC 537년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귀환한 지도자로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도와 BC 536년 성전의 정초식을 거행한 인물입니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에스라 3:2, 8에 언급된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동일인물입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손이기도 한데, 그는 귀환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고, 스룹바벨과 함께 제2 성전을 완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은 1:12, 14절에서 언급된 '남은 모든 백성'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성전재건을 촉구하는 학개의 선포를 들은 후에 하나님의 전 건축을 소홀히 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혈통이 좋고 믿음도 신실한 사람들에게 학개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완공하고 보니까 과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해 외형적(外形的)으로 너무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3:12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과거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새 성전의 치수를 정해 놓았을 때부터 이미 그 초라함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학개 선지자는 일부러 시각적 표현이 담긴 질문을 그들에게 던집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 학 2:1, 2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이 시각적인 것에 많은 부분 의존되는데, 바로 그런 시각적인 것들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짚어주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라든지,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라든지, '남은 자들' 그들은 모두 당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신앙적으로 남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눈에 보이는 보잘 것 없음'으로 인해 그만 낙담에 빠져버린 모습을 보면서 소위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해 온 우리의 지나온 영적관행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학개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 오늘 우리도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4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낙담하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스룹바벨아, 여호수아야, 이 땅 모든 백성아" 하면서 의기소침한 너희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굳세게 해야 할 이유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오늘 우리가 처해진 삶의 자리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들로 인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이 의기소침하고 낙심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은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을 떠야만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계속 말씀합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 학 2:5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 말씀은 4절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던 "굳세게 할지어다"와 같은 명령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굳세게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하신 말씀'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결정적 관계를 맺었던 출애굽 때 맺어진 언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언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약속을 꼽자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출 19:5, 6; 34:10, 11 신 12:5, 11, 21 등에서 여러 표현으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라시며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오메데트(תדמע)'인데,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할 때 쓰는 분사형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분사형은 '중단 없는 계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머물러 있나니' 이 말씀은 '나의 영' 즉 '성령'이 과거에 너희 조상들에게 그랬듯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기탄잘리에서 "연꽃이 핀 날, 내 마음은 방황하고 있어서 꽃이 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꽃이 그토록 가까이 있음을, 또 그 꽃이 나의 꽃임을, 그 완벽한 향기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자신의 마음의 방황으로 인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거나 낙담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까이 있어도, 또 그 은총이 나를 위한 은총이어도, 그만 방황과 낙담에 겨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중에, 성전의 초라한 외형을 보고 또 다시 낙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재적 도우심을 '약속으로' 확신시켜 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6, 7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언어로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노아 홍수나 출애굽 같은 어떤 사건이 반복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이스라엘에는 그 약속과 연결 지을 만한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학 2:7b) 하신 말씀은 이방나라들의 보배와 은과 금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동되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가까운 미래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약속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학 2:9
학개 선지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봐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는 지금 유다 백성들이 그들이 과거에 눈으로 보았던 솔로몬의 영광에 붙잡혀 미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영(靈)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낙담하고 있을 때도, 영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약속'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성취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그런 거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 11:1-3 공동번역).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육의 눈'으로 보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영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미래'가 '보이는 현재'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아브라함을 포함한 족장들과 모세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배'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든 아니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재료로 해석하든 그것은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약속하고 있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하신 말씀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하신 말씀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질 부활의 미래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서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눅 20:27)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38) 하신 말씀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이루어질 부활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할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만 바라본다면 심지어는 자신마저 참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있음'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죽어야할 '없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왜곡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온갖 폐해에 존재 전체가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살후 2:3)고 엄히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살후 2:13)에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 살후 2:15
오늘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너희에게 머물러 있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에 온전히 마음 두지 못하고 '보이는 현상'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낙심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면, 오늘부터는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며, 육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밝히 뜨고, '보이지 않는 진리' 위에 굳게 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보이는 현실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진리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②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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