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0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욜 2:23-32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 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 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 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 지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 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 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응송 | 시 6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서신 | 딤후 4:6-8, 16-1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 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 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 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 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 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 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8:11-13을 묵상하십시오. 자신을 의롭다고 믿은 사람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본 사람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딤후 4:6-8을 묵상하십시오. 떠날 시각이 가까워진 지금, 신앙의 도리를 다한 후(딤후 4:7), 바울의 시선은 누구에게 머물러 있습니까?
④ 욜 2:23을 묵상하십시오. 회개한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진정한 이유 는 어디에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자기 정체성에 관해 묻는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나은 자신을 탐구하게 합니다. 사람에게만 하나님 형상 안에 있는 지적이며 의지적인 능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들은 감히 할 수 없는 자기성찰을 갖게 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기성찰은 종종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성찰할 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하는 것이 공허함입니다. 그런 현상은 현대인의 마음에서 두드러지는데,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몰두해온 삶의 결과가 하나님께로 부터의 소외를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도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탈출시키며 시내산에서 체결해주신 약속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 6).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브리들은 하나님과 체결한 약속이 아니라 가나안 토착 종교인 바알이 약속한 물질과 안정을 더 의존하고 맙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예레미야의 영적 통찰이었고, 그가 바라본 역사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위해 새 언약을 마련하셨다는 것인데, 새 언약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을 앞으로는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심층적인 장소이고, 신체와 정서,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源泉)이기 때문입니다. 조지 말로니(George A. Maloney 1924-2005)에 따르면 성서에서 '마음'이란 인간의 삶, 즉 인격의 깊이에서 나타나는 애정과 열정, 욕구와 지식과 사유(思惟)가 존재하는 자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어서나 헤지카즘 전통의 사막의 교부들에게 있어서 마음이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판단과 결단이 이루어지는 존재의 중심입니다. 또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계시는 내면의 방이기에,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과의 통합을 이루고, 내적 정직성과 자기정화를 이루는 곳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간곡하게 당부하신바 역시 그것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두 사람이 각각 성전 올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두 사람이 기도하는 태도가 첨예하게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기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반면, 한 사람은 자기 삶의 덕목을 하나님께 과시합니다. 이 장면을 좀 더 깊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눅 18:10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신분과 삶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잘 지키는 종교 지도자인 반면, 세리는 지위를 악용해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교만한 현재 마음의 상태로 인해 부끄럽고, 한 사람은 탐욕스런 과거의 삶으로 인해 부끄럽습니다. 각각 다른 이 두 사람의 부끄러움은 그들의 전적 타락과 죄의 결과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 교만한 죄에 빠졌고, 세리는 탐욕을 채우려 타인을 수탈한 죄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러운 두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둘은 기도하는 모습에서 뚜렷하게 극과 극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눅 18:11-13
바리새인은 그가 행하는 일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그가 행해온 일들에 대해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장소에 서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그 감사의 내용을 모두 들어보면 감사라기보다는 자기 자랑입니다(눅 18:11, 12).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그의 마음이 연꽃처럼 드러납니다(눅 18:13). 가슴을 치며 자기 죄를 고백하는 세리를 보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눅 18:14
사실 복음서마다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배하며 종교권력을 누리던 당시 제사장들 같지도 않았고, 또 친 로마파이면서 부르주아이던 사두개파 사람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부활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실제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 때문에 유대인들은 종교적 정체성과 민족적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그들의 기도는 시 17:3-5절에서의 시인의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반면에 세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 부를 누리던 당시 부패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던 자들의 위탁업자들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 그 차액을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계약 기간이 될 때마다 입찰을 붙여서 많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주었는데, 그들은 부정축재의 완벽한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기 위해 자기들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청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당시 동족들에게 심한 경멸을 받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둘 중 하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면 당연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바리새인을 비난하고 세리를 칭찬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런 평가는 바리새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건 당시의 상식에도 맞지 않았지만 오늘 우리의 상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이유와 근거로 그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의와 옳음의 본질을 먼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옳음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옳은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입니다. 두 경우는 같은 듯 다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의 옳음은 때로 기만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을 뚫어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이 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에 관심을 두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옳음을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중심을 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표면적 의로움을 보여드리며 자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가 스스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지금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표면적 의로움에 스스로 속아있다 보니,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기성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자기성찰이 없다보니 하나님께 감사도 없습니다. 분명 그의 삶은 칭찬받을 만 했지만, 그러나 스스로에게 취해있는 동안 그의 내면은 하나님 없이 방치된 채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기도는 공허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자랑은 황폐해진 내면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선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의로움에 취해 타인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 눅 18:11 공동번역
그의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집중하는 겁니다. 나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숭배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교만의 온상이 되어버렸고, 영혼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고합니다. 그의 기도는 시 51:1-3절의 시인의 기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실제로 그는 죄과가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리처럼 살면 안 됩니다. 다만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세리와 같은 태도가 유일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나를 살린다는 사실을 내 영혼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리의 기도를 따라 예배 때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고 우리 찬양대는 '키리에 엘레이손'을 불러주는 겁니다. 인간 안에는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밤이면 피어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지만 동시에 악한 죄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주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보다 못하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 내면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롭게 살기도 하지만, 세리처럼 악하고 이기적이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기도도 하지만, 가끔씩은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겸손은 하나님을 얻고 교만은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딤후4:6-8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며 바울의 시선은 지금 의로우신 재판장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바울에게 중요한 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사실과,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사실과, 믿음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 재판 받을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살기도 하고 세리처럼 살기도 하고,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세리처럼 기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시선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을이 퍽 익었고, 오늘 우리는 상강(霜降)을 지나고 있습니다.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지만 밤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계절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도 다 무의미해지는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 때는 오로지 하나님의 냉엄한 평가만 우리 앞에 남게 됩니다. 여기 '죽음 앞에 선 자로서의' 바울이 절감하는 건 오로지 하나님의 뜻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체포되어서 처음 재판정에 섰을 때,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해 변론하지 않고 모조리 도망쳤다고 말합니다(딤후 4:16). 그럼에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우월감을 비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힘 되심(딤후 4:17a)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심(딤후 4:18)을 알고 있었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같은 바리새인이면서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잘 스며들어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욜 2:23, 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신 것은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미리 알고 회개한 자녀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약속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찬미하고(욜 2:26, 27),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당신의 영을 모든 인류에게 부어주십니다(욜 2:28, 32). 가을도 익어 서리 내리는 계절에 내 인생의 겨울을 미리 내다보며,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타인에게 둔 채 자기 내면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자기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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