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8주 하나님 형상에의 참여 소통 합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왕하 5:1-3, 7-15a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 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 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 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 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 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 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응송 | 시 66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 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서신 | 딤후 2:8-15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 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 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 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복음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 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 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 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 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왕하 5:14-15을 묵상하십시오. 자신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 되어 깨끗해진 것을 본 나아만 장군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② 눅 17:15-19을 묵상하십시오. 나병이 치유된 열 명 중에 주님께로 돌아간 사람은 몇 명이며, 주님은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③ 딤후 2:11-12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한 사람에게 주 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 형상에의 참여, 소통, 합일
24절기의 17번째 절기인 한로(寒露)가 지나고 나니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의 뜻 그대로 이제는 제법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선득해졌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이맘때이면 화로가 방안으로 자리를 잡곤 했습니다. 화롯불의 발갛게 달궈진 불꽃을 보려면 하얗게 변해버린 재를 걷어내야 했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의 신앙도 본래의 빛을 보려면 언제부턴가 마음에 때처럼 억겁으로 쌓인 구태를 걷어내는 작업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때처럼 낀 구태를 걷어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당신 형상을 따라 지으신 그 첫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닮게 창조된 인간은 본래는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그 사실로서 이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그만 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마는데, 사람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함으로서만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머금은 존재로서 진정 품격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프랑스 신학자인 존 메이엔도르프(John Meyendorff)에 의하면 '은혜'란 '참여'이고, 그 '참여'란 '하나님 형상에의 참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에의 '참여'와 '소통' 그리고 '합일'이라는 신앙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고 소통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와 복음서는 여러 면에서 뚜렷하게 공통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두 말씀이 똑같이 나병 환자가 치유 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 둘째, 두 경우 모두 치유 받은 주인공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방인이라는 점, 셋째, 두 주인공 모두가 병을 치유 받은 이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감사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왕하 5:1)이 나병에서 치유 받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소개에 눈이 갑니다.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 왕하 5:1
그는 왕이 아끼는 '큰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나병으로 고통 받던 그는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찾아가면 자신의 나병을 고쳐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치유자가 있는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엘리사의 집 앞에 섰을 때,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왕하 5:10)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엘리사의 태도를 치욕으로 받아들여 노발대발합니다.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 왕하 5:11
그의 말에서 그가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치유가 안수를 통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종들이 격노한 그를 설득합니다.
만일 이 선지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 왕하 5:13 공동번역
그리하여 나아만은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담그고 씻게 됩니다. 그러자 정말 새 살이 돋았고,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살처럼 깨끗해졌습니다(왕하 5:14). 무엇이 그의 몸을 고친 것입니까? 그는 요단강물의 치유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치유 받았고, 자기생각(왕하 5:11)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치유된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자기생각'을 극복하고 선지자의 말씀대로 따랐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인간의 생명 영역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시도록 하는 통로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 왕하 5:15, 16
나아만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다'는 그의 말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나아만 만이 아닙니다. 그를 맞이하는 엘리사의 태도 역시 믿음의 행동입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은 '당신을 고친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나아만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새겨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걷게 했을 때, 사람들이 놀라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한 말이 이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하나님의 사람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사에 마음에 두고 진정으로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선물을 고사(固辭)하자 이번에는 나아만이 다른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 왕하 5:17
그의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고대근동 당시의 신(神) 숭배사상 안에는 신이 거하신다고 믿는 나라의 흙을 신성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그는 가져간 흙으로 자기 고향 다메섹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단을 쌓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 중에도 바벨론 포로기 때,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흙을 나른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혹자는 나아만의 그런 요구가 지금껏 그가 신앙하고 있던 다신론에 근거한 요청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심을 모르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병을 고침 받은 후에 곧장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 감사한 것,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눅 17: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 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이 나병은 몸속 세균의 활동으로 눈썹과 코 등에 결절(結節)이 생기고,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그게 짙어지면서 피부가 곪고 썩어 들어가는 질병입니다. 이 병은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기도 하고, 또 전염성이 있어서 그들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필요에 따라 마을로 내려오더라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그들은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a)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는 선뜻 따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들은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병이 나은 사람들에게 우슬초와 새(bird)의 피를 뿌려서 정결의식을 행하고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아직 나병이 치료되지 않은 그들로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이 갔다고 말합니다. 열 명 모두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봐서 열 명 모두 예수님 말씀을 믿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상황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 눅 17:14b
말씀에 순종한 대가는 눈이 부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나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상황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눅 17:15, 16
이 이야기는 4복음서 중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누가만이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시선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호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함께 나병을 치유 받은 아홉 명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반면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합니다. 누가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을 꺾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눅 17:17-19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육체만 고침을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까지 치유를 받고 전 존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누가는 '돌아와'라는 단어에서 찾아냅니다. 15절의 '돌아와'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회심(휘페스트렢센 ύπέστρεψ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 마음이 예수님께로 돌아섰음을 뜻합니다. 나머지 아홉은 기쁨에 내달려 가족에게로 갔습니다. 아니면 제사장에게 보이러 달려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향해 온전히 돌아설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이 말씀에 의하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은 마치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듯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자아'라는 우상을 완전히 뽑아 예수 그리스도께 심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무아(無我)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거짓 자아를 뿌리째 뽑아버린 사람'입니다. 지나치게 완고한 자아도 내 안에서 뽑혀져야 하지만, 지나치게 파괴된 자아도 내 안에서 뽑혀져야 합니다. 그는 지금껏 자아랄 게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채 일상적인 사람의 영역 밖에서 살아왔고, 사람에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자아가 꺾여버린 채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육체가 나은 것도 놀랍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족(蛇足)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존재 전체가 예수께로 돌아옴으로서 존재 전체가 구원을 받는 쾌거를 이룹니다. 그가 예수님께 보인 '감사행위'는 단지 '예의 바른 행동'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마리아인에게까지 드리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기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는 엄청난 안타까움이 배여 있는 겁니다. 단지 육체만 치유 받고 영혼은 치유 받지 못한 채 집으로 가 버린 나머지 아홉 명에 대한 안타까움 말입니다. 인간이 단지 육체로만 지어진 존재라면 육체가 치유된 것으로 만족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닮게 창조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까지 회복해야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은혜'란 곧 '참여'이고, 그 '참여'란 '하나님의 형상에의 참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의 '참여'와 '소통'과 '합일' 신앙의 목표를 거기까지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함으로서 우리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주님의 선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 딤후 2:8-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이 왜 죽으셨고 부활하셨는지를 알아, 그 죽음과 부활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질병이나 죽음 등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를 옭아매도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되게 우리를 향해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만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딤후 2:11-13
주와 함께 죽은 자만이,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사람, 그럼으로써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인정해주신 그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 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를 통해 되살려 깨우고, 성령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성 대 바실과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말씀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 하나의 소명에로 부름을 받았으니 곧 수행자가 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수행자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내 안의 거짓된 것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매일매순간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만족이 채워졌다고 금세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매일 바라보며, 그분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으로 내 존재를 채우는 사람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하면 존재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로 인한 존재의 완성, 그것만이 우리의 행복을 완성시켜줍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홉 명의 사람이 세상으로 달려갈 때, 내 존재를 완성시켜주시고, 내 생명을 완성시켜주시고, 내 행복을 완성시켜주실 그리스도께로 단호하게 돌아서는 그 복된 존재가 바로 여러분이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께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 소통, 합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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