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6주 지금 내가 동경(憧憬)하는 것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암 6:1a, 4-7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 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 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 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7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응송 | 시 91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서신 | 딤전 6:6-19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 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 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 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 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 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 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 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복음 | 눅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 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 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 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 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6:25을 묵상하십시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합니까?
② 암 6:7을 묵상하십시오. 과도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아야 할 분명 한 이유로서 아모스 선지자는 장래의 무엇을 경고합니까?
③ 딤전 6:10-12을 묵상하십시오. 성도들이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지금 내가 동경(憧憬)하는 것
안셀름 그륀은 '삶의 기술'에서 소비사회가 부추기는 욕망과 욕구에 담긴 '은밀한 동경'에 대해 말합니다. 동경은 상품화 되어 대체 만족물 뒤에 숨어있는데, 사람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배우나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호기심을 채움으로서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달랜다는 것입니다. 특히 안셀름 그륀은 이 '동경(憧憬)'이 중독 뒤에 숨어 있으면서 항상 억압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중독 속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본디 내 마음의 심연에서 갈망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내 마음이 처해 있는 동경과 중독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은밀한 중에 동경과 중독은 내면에서 지속적으로 나를 충동하며 내가 갈망하는 것을 충족하려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경하는 것들 중에는 그로 인해 내 존재와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윤동주는 문학을 동경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의 문학에 심취한 그의 시에는 실존주의의 흔적들이 배여 있습니다. 문학에의 동경은 그의 삶을 아름답게 했고, 그는 대학시절 많은 자작시를 남겼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자작시들 중에 19편을 선정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독재 하에서 제자의 안전을 염려한 스승의 만류로 그의 출판은 포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계속 문학을 동경했지만, 일본에서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라도 공부를 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는 '동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신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무렵 그가 쓴 '참회록'에 그의 내적갈등이 아프게 담겨있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후략)
자신이 동경하는 것을 이루고자 갈등 끝에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을 욕되게 여겨 참회하는 그의 고백에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중독되고, 그것에 충동되어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통증이나 참회조차 없이 인생을 살아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지배자들의 자만과 사치를 고발합니다.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기지개를 켜며(암 6:4a), 양 새끼와 송아지를 골라서 잡아먹고(암 6:4b), 자기가 마치 다윗이라도 된 양 악기를 만들고 비파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지절거리고(암 6:5),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두르고 술을 대접으로 퍼마시는 삶을 그들은 동경했습니다(암 6:6). 그들은 자신들이 동경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수탈해서 부(富)를 쌓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날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징벌과 그로 인한 화가 그들에게 미칠 것임을 경고합니다(암 6:7). 복음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를 보여주십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눅 16:19). 그는 그렇게 자신이 동경하는 삶을 사는 동안 자기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살아가던(눅 16:20)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의 날 또한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눅 16:22).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자기의 전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요청합니다(눅 16:24). 무엇이 사후(死後) 그들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을까요? 나사로는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을 동경하며 살았고, 부자는 재물이 많아서 향락에 중독되어 산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실은 부자의 향락적인 삶도, 나사로의 허기진 삶도 영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오늘 서신서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디모데를 향해 탐욕과 미혹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모습으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삶을 제시해 줍니다(딤전 16:11). 그러나 그러한 삶이 쉽지만은 않은 까닭에 바울은 '믿음의 싸움'(딤전 16:12)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복음서 안으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비유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서 경고하신 대상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15장과 16장의 이야기는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15장 2절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비난합니다.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은 잃은 것을 다시 찾는 세 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눅 15:1-32).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보이는 돈'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미래적 가치'에 마음 쏟아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눅 16:9).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는 당시 비유의 수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아닌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눅 16:14)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과 권력유지에만 관심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이어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아마 그들은 이 비유를 듣기가 거북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 눅 16:19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입은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 입던 값비싼 겉옷이었고, 고운 베옷은 마(痲)로 만들어진 속옷으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비쌌습니다. 그런 의상을 입고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자의 이러한 삶은 오늘날에도 대다수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누가는 그의 상태를 처참하게 묘사해줍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눅 16:20, 21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통 이름이 없는데, 이 비유에서만 특별히 나사로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 '엘 라자르'의 줄임말인데, 그러나 정작 나사로는 그 어떤 하나님의 도우심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부자의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로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가 손을 닦고 버리는 빵의 두텁고 질긴 껍데기로 연명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의 누가복음 주해에 따르면 개들마저 그의 아픈 데를 핥아서 고통을 가라앉히고 종기를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개들보다 무심했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별히 나사로를 경멸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사로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교류가 아예 없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둘 중 하나의 배역에 투영시킵니다. 두 배역 사이의 사회 경제적 구분도 뚜렷하고, 두 배역 사이의 신분차이도 분명한데, 우리도 두 배역을 굳이 교류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누가가 이 이야기의 방점을 지상에서의 두 사람 모습에 찍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 눅 16:22-24
학자들에 따르면 대개 이런 형식의 글들은 이집트의 이야기에 기대어 있다고 합니다. 두 세계 안에 두 이야기가 확고히 설정되어 있습니다. 비유는 먼저 두 개의 물리적 세계를 묘사합니다. 그 다음 지상너머의 삶으로 연결되는데, 이 두 세계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연결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심 놀라운 것은 죽음이 불현듯 그리고 빨리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불현 듯, 빨리 엄습한 죽음 앞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동안 그들이 살아온 삶이 드러납니다.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돈을 동경하고 있었고, 그 돈으로 사회적 권리를 향유하며, 심지어 종교적 겉치레까지 즐기면서도 정작 이웃에 대해 마음을 닫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 역시 거지라는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라는 그의 이름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만 동경하며 살아온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부자도 죽고 거지 나사로도 죽었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에 직면합니다. 죽음 이후에 그들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죽고 나니까 가치가 뒤집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누가가 전해주는 이 비유는 눅 1:52-53의 '마리아의 찬가'와 눅 6:20-26에서의 '예수님의 평지설교'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의 일부분은 이렇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1-53) 예수님의 평지설교의 일부분도 보십시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0, 21)
그러니까 마리아의 찬가와 예수님의 설교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 나라에서 웃는 사람은 누구이며, 위로부터 내리쳐져서 고통 받는 고통 가운데 우는 자는 누구입니까?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영혼과 부활에 대한 대화'에서 오늘 비유의 결말을 각색해서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제가 물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불과 구렁텅이 같은 것들이 실제로 말한 바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마크리나)가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하지요.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 그리고 나사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겪은 고생으로 제 임무를 다 채웠다.' 그리고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구렁텅이는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데 대한 심판입니다."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부자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재물이 주는 향락에 중독되어 나태한 삶을 살았으며, 그러한 중에 나사로에게 이웃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재물과 향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도 나사로도 죽음의 순간 진정한 가치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손가락 끝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찍어 건네줄 이웃의 가치, 부자가 자기 동생들이라도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음부와, 나사로가 죽어 얻은 영원과 생명의 가치,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동경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구약성경에도 복음서의 부자와 같은 류(類)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그들의 행실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 암 6:4-6
그들은 자신들이 동경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수탈해서 부(富)를 쌓았지만, 그들의 날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징벌과 화(禍)가 그들에게 미칠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 암 6:7
허망한 인생의 결말입니다. 그리고 이 결말은 머지않은 때, 저와 여러분도 믿음과 삶의 결실로 맞닥뜨리게 될 결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당부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 딤전 6:11, 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딤전 6:14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서 마침내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딤전 6:9)고 말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딤전 6:10)고 경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본 바리새인과 종교권력자들, 그리고 구약성경의 귀족들이 이 경고의 모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을 어쩌지 못해 파멸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피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한 다음,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매우 세심하게 당부해 나갑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동경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그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어찌 그리 호락호락하기만 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굳이 '믿음의 싸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다름 아닌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중요한 것은, 이 순간 나의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이 나의 영원을 결정한다는 엄숙한 사실 때문입니다.
소비사회가 부추기는 욕망과 욕구에 담긴 은밀한 동경에 중독된 채 살아가기보다는 내 존재와 삶이 마지막 때 아름답도록 하나님을 동경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의 오늘은 예배를 동경하며 사는 것이고, 말씀과 기도를 동경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이웃을 내 몸 사랑하듯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미래를 잊은 채 현재의 쾌락을 동경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경청하고 이웃을 돌보며 도래할 미래를 준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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