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4주 아버지의 두 손처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렘 4:11-12, 22-28
11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 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12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 판을 행할 것이라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 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 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 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 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응송 | 시 14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 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서신 | 딤전 1:12-17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 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 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 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 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 | 눅 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 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 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 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 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 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4:11을 묵상하십시오. 유다 백성들을 향해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② 딤전 1: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 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입니까?
③ 눅 15:6, 9을 묵상하십시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 를 찾는 여인을 보았을 때 회개란 궁극적으로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아버지의 두 손처럼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고, '빛의 마술사', 혹은 '빛과 어둠의 화가'로도 불리는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황혼녘의 자신을 탐색하거나 응시하는 듯한 초상화를 이 무렵 집중적으로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탕자의 귀향' 안에도 황혼을 맞이한 자신의 내적 고백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중년에 큰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중년 이후에는 아들과 두 딸을 잃었고, 아내마저 먼저 세상을 떠난 이후, 함께 살던 여성은 정신병원에 갇혔으며, 자신도 재물과 명성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 후에 그린 그림이 '탕자의 귀향'입니다. 그 작품 안에 투영된 렘브란트 자신은 잘 나가던 시절의 그가 아닌, 온갖 비극을 겪은 후, 절망의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신입니다. 훗날 헨리 나우웬(1932-1996)은 렘브란트의 이 작품을 묵상하며 '탕자의 귀향'이라는 같은 이름의 명저(名著)를 출간했는데, 그 책에서 헨리 나우웬은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한 렘브란트의 심정에 자기 마음을 얹어 공감하곤 했습니다. 그림에서 헨리 나우웬이 얻은 영감에 의하면 '탕자의 귀향'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아들보다는 아버지 쪽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에게 대입해 표현한 그림이기 때문에 '탕자의 귀향' 대신 '인정 많은 아버지의 환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유도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보면서 '온유, 자비, 용서 같은 성품을 내면적으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림에서 늙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는 아들을 보아서가 아닌, 어루만짐으로서 알아보는데, 쪼글쪼글해진 아버지의 두 손에 온유와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나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우리도 성경 말씀이나 신앙서적을 읽다가, 혹은 헨리 나우웬처럼 성화를 감상하다가 하나님의 온유와 자비와 용서를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마음도 달라질 것이고, 회개하기 위해 나아온 형제들을 맞이하는 마음도 사뭇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한결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온유와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에게 심판을 선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크고 두려운 심판을 당할 언약 백성들을 생각하며 당혹해하는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 | 렘 4:11, 12
'그 때에' 즉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즈음에' 파멸을 상징하는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내 딸 백성을 덮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뜨거운 사막에서 파멸의 열풍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 렘 4:22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아야 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했지만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다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언뜻 보았을 때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호칭(互稱)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내 딸 백성'(렘 4:11)이라고 부르십니다. '내 딸 백성'은 히브리 표현으로 '밧 암미(ימע תב)'인데, '딸 내 백성'으로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표현에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유다 백성을 하나의 여성 인격체인 '딸'로 부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내 백성'이라고 부르심으로서 비록 죄를 짓고 심판을 선고 받는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향하는 숨길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속내 가득 담아내고 계십니다. 영어 성경인 KJV, RSV에서는 '내 백성의 딸'(the daughter of my people)로 해석했는데, '내 백성'과 '내 딸'이 동격으로 쓰이는 것으로 볼 때, 역시 유다 백성을 딸로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애가에만 이 표현이 나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예레미야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탕자의 귀향'의 아버지처럼 두 팔 가득 그들을 끌어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회개'를 생각할 때, 내가 저지른 '탈선행위로부터의 돌이킴'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회개는 그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즉 참되고 본 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는 '존재론적 자기이해'에서 출발합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에 따르면 '비존재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 자기이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의 자리에 둠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시작하는 신앙의 출발점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신서에서 그러한 사람을 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3-15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합니다. 과거에 그는 '비방자(모독하는 자)'였고, '박해자(방해하는 자)'였으며, '폭행자(거만하고 잔인무도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정말 말하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의 핵심은 그의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를 말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여기서 진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자신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입니다. 그는 '도리어'라고 말합니다. 그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악했지만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자기 과거를 덮고도 남을 만큼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자신의 행실이 다른 사람들보다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이었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단절된 부작용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납고 거칠게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을 색출하고 박해하며 자기 확신에 겨운 삶을 살아냈지만, 그렇게 이룬 성과가 크고 강렬할수록 하나님과의 단절은 더욱 심화되었고 내면의 소외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심연(深淵)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앞에서 바울은 그 동안 예수님의 생명과 단절되어 살아온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절망적인 상태였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 죄의 심연에서 건짐 받은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깨달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고백하는 밑바탕에는 예수 밖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과거에 대한 진정어린 회개와 자기 부정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회개가 주는 은총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진정어린 회개가 터져 나오는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고백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 살아온 그간의 삶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그에게 나타난 병리 현상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온 자기 과거에 대한 회한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만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온 죄에 대한 슬픔과 후회가 깊을수록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더 밀착시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처럼 당신 손을 내밀어 우리를 끌어안아주십니다.
분석가들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양 손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왼쪽 손은 가늘고 기다란 반면 오른쪽 손은 넓고 커 보입니다. 즉 왼손은 여성성을, 오른손은 남성성을 그린 것인데, 왼손은 모성애적인 섬세한 사랑을, 오른손은 부성애적인 넓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섬세하고 넓은 사랑이 애틋하게 표현된 세 가지 비유를 잇달아 들려주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눅 15:4-7),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개를 찾았다며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연 여자의 비유(눅 15:8-9), 귀향한 탕자를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비유(눅 15:11-24)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게 된 배경과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누군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눅 15:1-3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 여기 나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불결하게 취급받던 세리와 죄인들을 예수님께서 환대하시고 함께 음식까지 드시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내면에 똬리 튼 완고함과 편견이 자칫 나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의 회개까지 가로막을 수 있겠다는 경각을 갖게 됩니다. 탕자의 귀향에서 렘브란트는 탕자의 형을 통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를 풍자합니다. 아버지의 빛에서 곧바로 반사되는 빛 한 줄기가 그가 장자임을 보여줍니다. 옷을 길게 내려뜨린 유대인 복장도 그가 아버지의 상속자인 장자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 장자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양손이 각기 다른 손으로 보이듯 이 장자의 양손도 다릅니다. 한 손은 어둡지만, 한 손은 밝습니다. 어두운 오른손이 밝은 왼손을 누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활짝 반기는 양손과 대조를 이룹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은 전달받았지만, 밝은 왼손을 어두운 오른손으로 짓누르는 그림은 장자의 내면에 들끓는 복잡한 심정을 보여줍니다. 그 들끓는 심경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보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세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첫째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눅 15:4-6
양은 목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우리 안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에서 이탈해 그만 돌아올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목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바울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셨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심으로, 내가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 영성 생활의 목표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눅 15:7
이 하늘의 기쁨은 누구의 기쁨입니까? 잃은 양을 찾아온 목자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을 찾음으로 인해 하늘에서 기쁨의 축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모두가 잃은 양이었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동족의 등을 쳐 먹고살던 세리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면서 정작 하나님 없는 삶을 살던 유대종교 지도자들도 주님의 심정으로는 다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실 때, 그 기쁨은 바로 어깨 위의 양의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마침내 찾아냈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기쁨에 겨워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눅 15:9)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눅 15:10
집 나간 아들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눅 15:22-24a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b) 하나님을 이렇듯 '사랑의 아버지'로 경험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따뜻하신 손길과 품 안이 행복해서 다시는 그 손길과 품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회개의 의미를 오해하면 회개란 늘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고 께름칙한 종교적 멍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회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잃어버리고 험한 산과 골짜기를 헤매던 양이 자기를 찾던 목자에게 발견되어 따뜻한 품에 안기듯 하나님의 품에 다시 따뜻하게 안기는 것이고, 주인의 손에서 잃어버려진 채 먼지 속을 뒹굴다, 애타게 찾아다니던 주인에게 다시 발견되어, 주인 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의 기쁨이 되듯, 하나님께 다시 발견되어 하나님 뿐 아니라 하늘 천군천사의 환호를 받는 축제 같은 것이고, 아버지를 떠나 타향에서 불안하게 떠돌던 아들이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환대를 받듯, 하나님께 돌아가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입니다.
한가위를 맞이해서 많은 아들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 오고갑니다. 올해는 부모님의 쪼글쪼글하신 손을 매만지며 부모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 자리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얼굴을 묻고 있는 부모님의 품이 나를 애타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렇게 행복한 한가위를 보내고 다시 씩씩하게 일상에 복귀해서 쪼글쪼글하지만 따뜻한 부모님의 손처럼, 내 손도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내밀어주고, 고단한 형제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복을 나누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께 마음 멀어진 채 스스로 소외되어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복이 매일 지속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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