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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3주 저마다 제 길에서, 그리고 함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9-03 21:30
조회
708
성령강림 후 제13주 (다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렘 18:1-11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 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 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 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 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 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응송 | 시 139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서신 | 몬 1:10-14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 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 | 눅 14:25-33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 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4:26, 27, 33절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② 렘 18:6을 묵상하십시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 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③ 몬 1:11을 묵상하십시오. 빌레몬에게 무익했던 오네시모는 새로이 빚어져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 용어가 등장했는데. 교회의 자기 정체성 실현과 사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의 고유한 특성을 담은 용어라 하겠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synodus)'의 형용사형 '시노달리(synodale)'에 명사형 어미 '타스(tas)'를 결합시킨 단어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그 내용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인 성도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에 대한 고유한 특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활동도 시노달리타스의 한 부분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이루신 구원을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안에 완성시키시기 위해 세우신 당신의 신부요(고후 11:2), 당신의 몸이며(엡 1:22), 당신께서 친히 '내 교회'(마 16:18)라 부르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에 기원을 둔 이 교회는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주님도, 정체성도, 사명도, 목표도 한 번도 달랐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껏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의 목적을 향해 장구한 세월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시노달리타스'라는 기치를 새로이 내세우며까지 개혁을 촉구하게 된 것일까요? 마치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생명력도 생기도 없이 표류하는 교회를 새로이 각성시켜서 교회다움, 그리스도인다움을 회복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동시대 속에서 교회됨을 살아내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교회를 교회이게 하는 본질적 요소인 말씀과 성례를 회복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도 그중 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싸움 없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는 자기 안의 정념들 과 싸워 이겨야 했고, 다음은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 만연한 정념들과 싸워 이기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 일은 '저마다' 해야 할 과제였고, 동시에 '함께' 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들이 '각자' 그리고 '함께' 치열하게 맞닥뜨려야 할 말씀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던 중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과 내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도를 이루는 과정에는 숱한 시행착오가 발생하는데, 이때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과 단호하게 결별할 수 있어야 믿음의 진보와 더 완전한 인간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절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가 읽고 묵상해온 말씀들을 반추해보면, 주님의 이 말씀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12:51절에서도 주님은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신바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은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분쟁입니다(눅 12:53).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주 말씀에서 바리새인에게 초청받아 가신 집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 역시 가족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눅 14:12) 여기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 '혈통'을 매개로 한 관계라면, 부(富)한 이웃은 '이익'을 매개로 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가 식탁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나 이웃의 기준까지도 바뀌어야만 합니다. 단지 혈통이나 이익을 매개로 한 관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조건으로 재구성 된 이웃들과 식탁과 사랑을 공유하라는 것입니다.
8:21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 새로운 조건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이익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가족이나 이웃을 재구성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18:29-30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의 이런 말씀들은 이제 막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햇내기 신자나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라고 하시고, 심지어 버리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족을 미워하는 것'이 어떻게 제자도일 수 있으며, '가족을 버리는 것'이 어떻게 경건일 수 있습니까? 십계명은 오히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러면 주님은 십계명의 가르침을 부정하신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마는 걸 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을 마태의 시선으로 읽으면 예수님 말씀의 방점이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마태는 마 10:37절에서 같은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누가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의 차이를 보십시오. 누가는 가족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표현한 반면, 마태는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마태의 표현이 누가의 표현과 다른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에 방점을 찍은 것이고,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활동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의 표현을 중심으로 오늘 말씀을 재해석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거나, 심지어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혈육(血肉)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은 짐승의 세계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은 희생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치에 동의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소중히 여기신 것들을 나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 희생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만큼 사랑해야만, 우리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걸 희생시키고, 예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것들을 나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핵심은 변혁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여러 정보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사소한 것에까지 적용해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은 우리 내면을 변혁으로 이끌어 마침내 예수님과 삶과 죽음을 함께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모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단호한 말씀은 제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될 준비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제자 될 준비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예는 망대를 세우는 작업니다. 망대를 세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미리 계산하지 않고 망대를 세우려다가는 기초만 쌓고 끝나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이 전쟁을 시작하려면 전쟁을 치를만한 군사력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군사력이 부족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닌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온갖 육적인 생각들과도 우리는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시선을 오로지 해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혈육을 나눈 가족 사랑하는 것보다 더 깊고 뜨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한 번의 은혜 경험과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수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자의 길이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숱하게 좌절하고 깨어지면서 불완전한 존재로서 제자의 길을 걷는데, 그렇게 깨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우리를 참된 제자로 빚어 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당신 손 안에 들려있다는 겁니다. 흙이 원해서 그릇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는 토기장이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이 원치 않아도 부수고 다시 만듭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손에 들려져서 매일매일 부서져야 하고, 매일매일 다시 빚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하고, 어제보다 완성된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제보다 다른 오늘이 되게 하는 신앙의 그릇으로서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제보다 더 완성된 신앙의 노력은 '하나님 목소리에 대한 청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청종(聽從)을 통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그릇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역사의 현장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말씀에 청종하는 삶'이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외길'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오네시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그 삶이 부서져버렸다가 하나님의 손에 다시 빚어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망쳐 나왔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 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도망쳐 나온 이후로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잡혀 들어왔다가 바울을 만나 말씀으로 양육 받고, 내면이 다시 빚어진 것 같습니다. 전에 그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그를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노달리타스', 저마다 제 길에서, 그리고 함께 주님의 참된 제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온전한 따름을 위해 하나님 손으로 매일매일 다시 빚어지시기 바랍니다. 그 빚어짐을 위해 우리는 먼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의해 새로이 빚어진 우리는 다음으로 성례에 참여해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것을 기념하는 희생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게 되는 신앙의 신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이루어짐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생각과 신념을 고수하며 깨어짐을 거부하지는 않는가?
②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깨어짐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렘 18:1-11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 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 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 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 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 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응송 | 시 139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서신 | 몬 1:10-14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 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 | 눅 14:25-33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 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4:26, 27, 33절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② 렘 18:6을 묵상하십시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 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③ 몬 1:11을 묵상하십시오. 빌레몬에게 무익했던 오네시모는 새로이 빚어져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저마다 제 길에서, 그리고 함께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 용어가 등장했는데. 교회의 자기 정체성 실현과 사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의 고유한 특성을 담은 용어라 하겠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synodus)'의 형용사형 '시노달리(synodale)'에 명사형 어미 '타스(tas)'를 결합시킨 단어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그 내용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인 성도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에 대한 고유한 특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활동도 시노달리타스의 한 부분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이루신 구원을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안에 완성시키시기 위해 세우신 당신의 신부요(고후 11:2), 당신의 몸이며(엡 1:22), 당신께서 친히 '내 교회'(마 16:18)라 부르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에 기원을 둔 이 교회는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주님도, 정체성도, 사명도, 목표도 한 번도 달랐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껏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의 목적을 향해 장구한 세월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시노달리타스'라는 기치를 새로이 내세우며까지 개혁을 촉구하게 된 것일까요? 마치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생명력도 생기도 없이 표류하는 교회를 새로이 각성시켜서 교회다움, 그리스도인다움을 회복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동시대 속에서 교회됨을 살아내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교회를 교회이게 하는 본질적 요소인 말씀과 성례를 회복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도 그중 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싸움 없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는 자기 안의 정념들 과 싸워 이겨야 했고, 다음은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 만연한 정념들과 싸워 이기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 일은 '저마다' 해야 할 과제였고, 동시에 '함께' 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들이 '각자' 그리고 '함께' 치열하게 맞닥뜨려야 할 말씀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던 중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26, 27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과 내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도를 이루는 과정에는 숱한 시행착오가 발생하는데, 이때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과 단호하게 결별할 수 있어야 믿음의 진보와 더 완전한 인간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절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가 읽고 묵상해온 말씀들을 반추해보면, 주님의 이 말씀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12:51절에서도 주님은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신바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은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분쟁입니다(눅 12:53).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주 말씀에서 바리새인에게 초청받아 가신 집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 역시 가족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눅 14:12) 여기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 '혈통'을 매개로 한 관계라면, 부(富)한 이웃은 '이익'을 매개로 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가 식탁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나 이웃의 기준까지도 바뀌어야만 합니다. 단지 혈통이나 이익을 매개로 한 관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조건으로 재구성 된 이웃들과 식탁과 사랑을 공유하라는 것입니다.
8:21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 새로운 조건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이익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가족이나 이웃을 재구성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18:29-30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의 이런 말씀들은 이제 막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햇내기 신자나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하라고 하시고, 심지어 버리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족을 미워하는 것'이 어떻게 제자도일 수 있으며, '가족을 버리는 것'이 어떻게 경건일 수 있습니까? 십계명은 오히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러면 주님은 십계명의 가르침을 부정하신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마는 걸 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을 마태의 시선으로 읽으면 예수님 말씀의 방점이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마태는 마 10:37절에서 같은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누가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의 차이를 보십시오. 누가는 가족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표현한 반면, 마태는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마태의 표현이 누가의 표현과 다른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에 방점을 찍은 것이고,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활동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의 표현을 중심으로 오늘 말씀을 재해석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거나, 심지어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혈육(血肉)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은 짐승의 세계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은 희생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치에 동의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소중히 여기신 것들을 나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 희생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만큼 사랑해야만, 우리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걸 희생시키고, 예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것들을 나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핵심은 변혁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여러 정보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사소한 것에까지 적용해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은 우리 내면을 변혁으로 이끌어 마침내 예수님과 삶과 죽음을 함께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모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단호한 말씀은 제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될 준비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 눅 14:28-32
제자 될 준비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예는 망대를 세우는 작업니다. 망대를 세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미리 계산하지 않고 망대를 세우려다가는 기초만 쌓고 끝나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이 전쟁을 시작하려면 전쟁을 치를만한 군사력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군사력이 부족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닌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온갖 육적인 생각들과도 우리는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시선을 오로지 해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혈육을 나눈 가족 사랑하는 것보다 더 깊고 뜨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한 번의 은혜 경험과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수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자의 길이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숱하게 좌절하고 깨어지면서 불완전한 존재로서 제자의 길을 걷는데, 그렇게 깨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우리를 참된 제자로 빚어 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 렘 18:6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당신 손 안에 들려있다는 겁니다. 흙이 원해서 그릇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는 토기장이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이 원치 않아도 부수고 다시 만듭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손에 들려져서 매일매일 부서져야 하고, 매일매일 다시 빚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하고, 어제보다 완성된 오늘의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제보다 다른 오늘이 되게 하는 신앙의 그릇으로서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 렘 18:10
어제보다 더 완성된 신앙의 노력은 '하나님 목소리에 대한 청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청종(聽從)을 통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그릇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역사의 현장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말씀에 청종하는 삶'이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외길'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오네시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 몬 1:11
이 오네시모는 그 삶이 부서져버렸다가 하나님의 손에 다시 빚어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망쳐 나왔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 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도망쳐 나온 이후로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잡혀 들어왔다가 바울을 만나 말씀으로 양육 받고, 내면이 다시 빚어진 것 같습니다. 전에 그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그를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노달리타스', 저마다 제 길에서, 그리고 함께 주님의 참된 제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온전한 따름을 위해 하나님 손으로 매일매일 다시 빚어지시기 바랍니다. 그 빚어짐을 위해 우리는 먼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의해 새로이 빚어진 우리는 다음으로 성례에 참여해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것을 기념하는 희생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게 되는 신앙의 신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이루어짐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생각과 신념을 고수하며 깨어짐을 거부하지는 않는가?
②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깨어짐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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