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2주 벗이여 올라앉으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렘 2:4-13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 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 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 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 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일 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 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응송 | 시 8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 였도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서신 | 히 13:1-8, 15-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 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 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 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 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복음 | 눅 14:1, 7-14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 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 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 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 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 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 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4:10절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높은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 낮 은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 판단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② 렘 2:6, 8절을 묵상하십시오. 성전지도자도 백성들도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히 13:7, 8을 묵상하십시오. 신앙의 선배들의 행실의 '무엇'을 주의 하여 보고 그들의 무엇을 본받으라고 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벗이여 올라앉으라.
어떤 형제가 압바 모티우스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사람들 가운데 가서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어딘가 가서 살아야 한다면 뭐든 특별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게. 누구나 다 하는 평범한 생활습관을 따르게. 경건한 사람을 보거든 그를 믿고 그를 따라 하게. 그러면 평화로울 것이네. 자네가 비범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자네를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아무도 자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자네를 근심시킬 일도 하지 않을 것일세." 특별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며, 누구나 다 하는 평범한 생활습관을 따르면 평화로울 것이라는 어른의 말씀이 가슴에 닿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겨서, 다른 이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애쓰느라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안식일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처럼 초대를 받아서 온 다른 바리새파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즐겁게 음식을 나누고 담소를 나누는 일보다 식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 눅 14:8, 9
보기에 따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처세술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다가 창피 당하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사람들의 권유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모양새가 좋지 않겠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세상 사람들의 흔한 처세술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다른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시려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스스로 높아지려 애쓰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지혜는 자신의 한없이 작음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낮은 곳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를 높여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 눅 14:10
여기에서 '너를 청한 자'란, 비유 안에서는 안식일 저녁식사에 초대한 주인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 식탁에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작음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마 21:31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뜻합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 신앙을 가졌을 때, 그들은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신앙인이었을까요? 그들의 표정은 얼마나 맑고 온유하며, 그들의 언어는 얼마나 겸손했을까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 가지씩 악에게 마음을 내어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아적(小兒的) 교만에 마음이 점령당하다가 지금은 그저 높은 자리나 탐하는 소인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막 은수생활 전통에서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을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그리고 교만'으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 따르면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별개가 아니라, 각각 논리적 순서를 따라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음욕은 식욕을 채운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이가 돈을 모으지 못하면 슬퍼하거나 분노의 감정에 빠지는데, 대개 '탐식과 음욕'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초기에 유혹 받는 것들이고,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는 탐식과 음욕을 이겨내고 마침내 '욕정(πάθος)의 부재' 즉 '아파테이아'에 도달했을 때 강력하게 맞닥뜨리는 유혹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악한 생각들과 싸워 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수도자들이고, 어쩌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처음엔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사람들이 흔히 겪는 '영적 승리 다음에 찾아오는 강력한 유혹'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것은 바로 '헛된 영광과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예수님께 비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논리적 순서를 따라 교만해지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불행한 존재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12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반면에 세리들과 창녀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겸손한 척 처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자기 존재의 초라함을 알기에 감히 높은 자리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자청 낮은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결론 맺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눅 14:11
베네딕도 수도규칙 제 7장 '겸손에 대하여'에 이 말씀을 잘 풀이해 놓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만일 겸손의 최고 정상에 이르기를 원하고, 또 현세 생활에서 겸손을 통해 오르게 될 천상적 들어 높임에 속히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야곱이 꿈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던 그 사다리를 우리의 향상하는 행동으로써 세워야 하겠다. 내리고 오른다는 것은 분명히 교만으로써 내려가고 겸손으로써 올라간다는 것으로밖에 우리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다. 세워진 사다리 자체는 우리의 현세 생활이니, 우리 마음이 겸손해질 때 주께서는 천상을 향한 그 사다리를 세워주신다."
여기에서 '겸손을 통해 오르게 될 천상적 들어 높임'이란,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겸손한 신앙인을 위해 주님은 천상을 향한 사다리를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앙의 자리에서조차 이 사다리를 좀처럼 보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라는 구조가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구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자기를 높인다는 건 스스로를 완성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완성을 위해 공부도 해야 하고, 성실히 땀 흘려 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다움'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스로의 완성과 성취를 이룬 이후에 그것으로 인해 자칫 교만해지지 않고, 나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나를 살리시려고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 앞에서 여전히 나는 은혜로 사는 존재요, 작은 존재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움입니다. 박효섭 목사님은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 '꼴찌들의 잔치'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꼴찌들을 위한 '꼴찌들의 잔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쓰고 애쓰는 고행자의 차지도 아니요, 화려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종교인들의 차지도 아니요, 주님 앞에서 자신의 한없이 작음을 알고 끝자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사실은 참 넓고도 쉽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며 애쓰지 않고, 그저 지금 자리에 감사하며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벗이여 올라앉으라 | 눅 14:10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습니까? 겸손한 사람을 천상을 향한 사다리에로 불러 앉히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만히 보니까 초청받은 바리새인들의 태도만 교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역시 같은 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초청하지 않고, 부유하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만 초청했던 것 같습니다. 부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야 자기도 그들에게 초청받아 그들 잔치에 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내를 감추고 당신을 초청한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 | 눅 14:12, 13
주님의 이 말씀은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초청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만을 초청한 것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 말씀하신 벗,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과, 13절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그리고 저는 자들과 맹인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리새인이고, 그 중에서도 지도라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벗이나 형제나 친척 역시 당시 사회에서 상류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훗날 초청에 보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초청한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과 맹인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훗날 초청으로 보답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이득으로 보답해줄 사정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은 비현실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비현실적이라는 핑계로 예수님 말씀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설사 예수님 말씀이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은 잔치에 초청받은 자 뿐 아니라 잔치에 초청한 사람의 마음도 주님과 같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아끼는 마음입니다. 교회가 가장 교회답지 않을 때가 언제일까요? 신앙인들이 예수님 마음에서 일탈할 때입니다. 신자들이 본능을 따라 윗자리를 탐하거나, 내 기준을 따라 사람을 차별할 때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묻지 않을 때, 더 이상 십자가를 묻지 않을 때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했을 때, 그들이 보인 모습은 헛된 것을 따라 행하며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 렘 2:5-6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 렘 2:8
거듭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속상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필연적으로 헛된 것에 집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키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사막을 건너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반석에서 음료를 주신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며, 스스로 높아져 압제하는 자도 없고, 억압받는 자도 없는 공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꾸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묻지 조차 않았습니다. 헛된 것을 따라 헛되고 무익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렘 2:9
"너희들과도 싸울 뿐 아니라,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겠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싸우려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하나님이 어디 게시냐고 묻지도 않는 삶은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삶입니다.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히 13:1, 2
누구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단박에 아브라함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기억되는 얼굴일까요? '교만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일까요? '겸손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일까요? '섬김의 사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히 13:7, 8
왜 행실을 본받으라고 안하고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의 겸손하고 따뜻한 행실이 믿음에서 나온 행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묻지 조차 않았던 교만스런 사람들과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원주의 예수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을 회고하며 쓴 이야기책인 '좁쌀 한 알 장일순'을 읽다 보면, 장일순 선생이 제재소를 하던 최병하에게 한 말이 나옵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여.
아마도 장일순 선생이 성경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서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하는 말들 속에 예수님 마음이 배여 있는 듯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삶이 되고 있는지, 그래서 평화로운 삶인지 말입니다. 마음의 교만을 어쩌지 못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눅 14:9) 하시는 부끄러운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듣기 보다는, 마음의 믿음이 동기가 되어 스스로를 낮은 자리에 두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중에 "벗이여 올라 앉으라"(눅 14:10)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경쟁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섬김으로 평화를 일구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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