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1주 안식일의 참 의미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58:9b-14
9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 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 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 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 이니라
응송 | 시 103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 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서신 | 히 12:18-29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 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 하는 뿌린 피니라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 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 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복음 | 눅 13:10-17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13:14-16절을 묵상하십시오. 회당장이 분을 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② 사 58:13, 14절을 묵상하십시오.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겨 자신의 길 로 행하거나 오락을 구하지 않을 때 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히 12:25절을 묵상하십시오.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안식일의 참 의미
이스라엘 신앙전통에는 두 개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시적 공간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聖殿)'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 속의 성전이라 불리는 '안식일'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매 절기 때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제의(祭儀)를 통해 선민(選民)으로서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할 사정이 안 될 때는, 시간 속에서 안식일을 구별해 거룩하게 지킴으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안식일은 유대인들 뇌리와 가슴에 '시간 속의 성전'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을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 만나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바로 이 안식일로 인해 갈등이 빚어질 때입니다. 예수님은 번번이 안식일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셨고,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안식일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던지, 아니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안식일의 의미와, 유대인이 생각하는 안식일의 의미가 달랐던지 입니다. 아무튼 확실한 건 예수님이 유대인들 방식대로는 안식일을 지키실 마음이 없어 보였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도 가뜩이나 눈에 거슬리는데,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밀 이삭을 잘라먹는데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막 2:23). 뿐만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며 심지어 사람을 안식일보다 우위에 두는 발언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시각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보았던 안식일 개념과 같은 맥락에서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사야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을 딱딱한 법과 규례로서가 아닌 '즐거운 날'(사 58:13)로서 소개합니다. 안식일은 '존귀한 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얻는 날'(사 58:14)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눅 13:10, 11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이 여자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 누가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만약 이 여자가 처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면 지금 그녀의 나이는 꽃다운 열여덟 살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영혼과 신체 모두가 부자유한 채 산 것입니다. 그녀는 귀신들려 고통 받고, 몸마저 꼬부라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회당 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어떤 심정으로 예수님 말씀을 들었을지, 말씀이 여인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을 다 아신다는 듯 예수님께서 그녀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 눅 13:12
마치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둘러싸인 우주를 향해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그 때의 그 음성 그대로 여인에게 자유를 선포해주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안수해 주시는데(눅 13:13a), 누가는 그 결과를 이렇게 놀랍게 증언해 줍니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 눅 13:13
어찌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그녀에게 임하시자 여인에게 새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손'을 그녀에게 얹으셨습니다. 그러자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싸였던 여인에게서 병마가 떠나가고 그녀는 밝음 속에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 눅 13:14a
때때로 보면 모두가 감동하는 기쁜 일 앞에서 이상하게 분을 내며 돌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회당장은 이렇게 분을 내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여인을 고쳐주신 그 때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십시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 눅 13:14b
물론 이 사람의 말이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사람은 병자를 고친 것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안식일까지 범하며 병을 고치지 않더라도 나머지 엿새 동안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장애를 앓던 이 사람이 하루 뒤에 치료된다고 해서 크게 억울한 건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미 열여덟 해 동안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회당장과 예수님의 생각은 그 출발부터가 달랐습니다. 이 차이는 인격이나 성품이나 지식의 차이가 아닌 신앙관의 차이였고, 사람을 향한 마음의 차이였습니다. 회당장에게는 '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더 중요했습니다. 회당장에게는 법이 목적이고 사람은 수단이었던 반면에, 예수님께는 사람이 목적이고 법은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말씀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 눅 13:15, 16
이 말씀 안에 주님의 마음이 애틋하게 담겨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주님의 표현을 보십시오. 주님께 그녀는 귀신들린 사람도, 몸이 꼬부라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행복할 권리, 즐거울 권리가 있는 '아브라함의 딸'이었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은 '즐거운 날'이기 때문에 그녀는 더 즐거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처음 안식일은 만드시던 당시 현장으로 되돌아가서 봐야 합니다. 창 2: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유대교 신학자로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이 창세기 2:2절을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없었는가? 안식(메누하 menuha)이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주는 완전해졌다. (중략) 일곱째 날에는 무엇이 창조되었는가? 평온, 고요, 평화, 그리고 휴식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2:2절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을 종합하면, 안식은 철저히 하나님의 창조의 산물이자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창조하셨고, 당신께서 가장 먼저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일곱째 날 작품인 안식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버려서는 안 되며, 안식 그 자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안식이 부재한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만들어주신 안식을 버리고, 돈과 출세를 좇아 경쟁하느라 너나없이 몸이 꼬부라져 있습니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에서 박경미는 "우리사회는 끝없이 확대되고 복잡해졌지만 오로지 한 방향으로 움직여왔다"며, "그것은 물질적 이익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방향이다." 라고 직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마저도 하나님대신 마몬(맘몬)을 섬기고 있다며, 돈 귀신이 지배하는 시장전체주의는 예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경쟁은 짐승들에게 맡기고 우리 인간들은 '예수의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교회가 필요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안식'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삶이 복음입니다. 윌터 부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다'에서 "안식일이 없으면 하나님 자신이 쉬신 것에 뿌리를 두고 우리와 함께 쉬어야 할 이웃에게까지 확장된 쉼을 깨닫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쉼을 알 때까지, 상처와 두려움과 탈진 상태를 붙들고 쉼이 없는 채로 버려진 자들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안식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고 팍팍한 세상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세상을 경계하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인류 전체가 이 여자처럼 땅을 향해 등이 굽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만든 적을 이미 알고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나를 잡으려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쳤고 내 앞에 함정을 팠으나 저희가 스스로 빠졌습니다"(시 57:6 공동번역).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남자와 여자의 영혼을 땅으로 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것들에 몰두하여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골 3:1 참조). 이들이야 말로 땅을 향해 등이 굽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뜻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묶인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왔습니다."
회당장이 그랬습니다. 그는 안식일의 문자적인 법령을 내세우며 그토록 분을 내고 있지만, 정작 안식일의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회당장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 ύποκριτής)'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사용하신 단어인데,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가장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안식일을 내세워 분을 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며 사납게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안식일에 이 여자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안식일에 이 여자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 회당장이 그렇게 금과옥조로 여기는 안식일의 근본 의미가 살아났습니다. 이 생명과 해방이 없다면, 아무리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을 딱딱한 법령이나 규례로서가 아닌 '즐거운 날', '즐거움을 얻는 날'로 소개합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 사 58:13, 14
안식일은 '존귀한 날'인 만큼 삼가 발을 금하고, 자신의 길로 행하지 않고, 오락을 금해야 하며, 사사로운 말을 삼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그럼으로써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씀하는 '즐거움'은,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걸으며 얻는 즐거움이나 오락을 구하며 얻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즐거움'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 히 12:25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면 풍요로운 생명과 해방을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말씀의 본뜻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따라가면 자신도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무거운 짐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뜻을 밝혀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신의 장한 일을 알리셨다."(시 103:7 공동번역)며,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당신의 뜻을 밝혀주시고, 당신께서 하시려는 일을 사람들이 알게 하셨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신 안식일역시 법령이 목적이고, 제재나 처벌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의무이기 이전에 선물이자 권리이고,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이 다가오면 행복과 즐거움으로 맞아야 합니다. 리젠트 칼리지의 미르바 던 교수가 안식일의 의미를 네 가지로 정리해서 신선하고 탁월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은 '그침(ceasing)'이고, '쉼(resting)'이며, '받아들임(embracing)'이고, '향연(feasting)'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 지키기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일은 우리를 칠일마다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 영역으로 물러나는 별난 사람들로서 세상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세상과 그 필요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과 목적으로 더 깊이 이끌기 때문이다. 즉 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이 새롭게 되고, 영이 되살아나고, 정서가 힘을 얻고, 몸이 건강해지고, 진정한 관계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의 여백들을 이해하고, 끌어안아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성수'라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때로는 그것이 무거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말씀은 안식일과 주일이 법과 규례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일상을 그치고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써, 영과 마음과 몸이 되살아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서 '사람'이 '법'보다 중요함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일을 무겁게 맞이하지 말고, 엿새 동안 지친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을 하나님의 창조 리듬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안에 머물 때,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은 회복됩니다. 우리에게 주일은 그런 날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일을 법과 규례로 이해해 부담스럽게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② 주일을 쉼과 축제의 날로 받아들여 행복하게 맞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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