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9주 참된 예배, 참된 믿음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사 1:1, 10-20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 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 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 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 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 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응송 | 시 50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 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서신 | 히 11:1-3, 8-16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 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 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 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 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 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복음 | 눅 12:32-40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 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 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 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 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1:1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거절하시는 이유로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② 히 11:8-10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③ 눅 12:32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제와 사랑의 삶을(눅 12:33) 살아가야 할 이유를 뭐라고 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참된 예배, 참된 믿음, 참된 삶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a)는 사도 바울의 당부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는 '위'란 어느 물리적 공간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공간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골 3:1b)이며,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할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그리고 '찾으라'는 당부는 단순한 '지향'을 넘어서 온 존재를 기울여 추구하는 영적 활동을 뜻합니다. 그 영적 활동이란 어떤 것들일까요? 말씀 묵상과 기도와 찬미 등의 활동을 뜻하는데,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영적 활동은 예배입니다. 예배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지고하신 역사들을 묵상하고 찬미할 뿐 아니라 삶으로서 따르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제사(祭祀 sacrifice)라고 했는데, 제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 행위였습니다. 그들의 제사행위는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되어서,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기록이 나오고, 창세기 14장에는 멜기세댁의 제사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제사가 이스라엘 신앙생활의 중심에 선 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시키신 이후부터였습니다(출 12:25). 그들은 유월절 제사를 드림으로써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미하였으며, 신명기 26:5-9의 말씀을 인용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한 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고, 그 정체성을 되풀이해 고백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전승해 해주었습니다. 신약시대 예배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최후의 만찬입니다(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 고전 11:23-25).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계승하셔서(눅 22:8)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희생당하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생명의 떡'(요 6:48)으로서, 그리고 '새 언약의 피'(막 14:24;눅 22:20)로서 계시하셨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b) 하심으로서 이후의 교회 공동체를 향해 이 생명의 식사를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식사 안에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있고, 이후로 이 식사를 거행할 때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후대에 전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의 제사와 신약시대 예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경험과 기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유월절 식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당한 종살이의 경험과 출애굽의 경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 경험과 기억은 자신들의 영혼을 각성시켜 '오늘', '여기'에서 자유와 해방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시대에는 성찬을 행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빠져 산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예수께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 회복시켜주신 새 생명으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예배 활동에서 실종되거나 진정한 예배의 가치를 망각하고 예배할 때, 우리는 예배의 전 과정을 통해 기억해야 할 과거의 죄와 죽음의 경험을 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억마저 잊음으로, 망각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인 이사야서가 기록되던 BC 740-680년은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정복군주인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이미 북시리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다 정복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람의 도시국가인 하맛 정복을 필두로 시리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최강대국 중 하나인 애굽의 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정복일지에 '애굽 강 앞에 군사기지를 구축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의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에게 조공으로 은 천 달란트를 바침으로 가까스로 자기 왕위를 유지했는데(왕하 15:19), 당시 앗수르 제국의 정복일지에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 유다 왕 웃시야는, 조공을 바친 공신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걸 보면, 아직 앗수르의 공격이 남부 팔레스타인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남 유다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웃시야의 치하에서 남 유다는 주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대하 26:15), 정치적 강국의 면모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웃시야가 죽던 해'(사 6:1)가 BC 742년임을 가정하면 그들의 안정된 삶 역시 시한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구약의 말씀은 '곧 끝나버릴 안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가슴에 품지도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안정에 겨워 흥청망청 살아버린 당시 남 유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 사 1:1
역대하 26:22절과 32:32절에 보면 이사야가 웃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받기 전부터 나라의 외교정책과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의 고위 관료들과 유다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사 1:10
여기서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악하게 주도해 온 두 세력을 적시합니다. 그들은 '관원들'과 '백성'이었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소돔의 관원'이라 불린 건, 그들이 권력을 이용해 가난한 백성을 수탈했었기 때문이고, 백성들이 '고모라의 백성'이라 불린 건 그들이 땅과 관련해 사회적인 약자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 망라되고 단죄된 그들의 죄악상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깨뜨린 자요, 하나님이 정하신 선악의 기준을 뒤엎어 버린 자들이었습니다(사 5:8-24).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지탱해주는 하나님의 의지이자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뜻을 깨닫고 마음에 품는 대신 온갖 '죄성(罪性)'을 마음에서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들의 죄악상을 보다 상세하게 나열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사 1:11, 12
그들의 타락은 제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리는 외형의 의무는 다하면서도 그러나 그 마음엔 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허울뿐인 제사로 하나님을 속였고,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 제사를 혐오하셨습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노여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신 과거를 망각하고, 지금 여기에서 다시 죄의 노예가 되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은 노여운 어조로 거절하십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 사 1:13-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거룩한 절기를 지켰습니다. 제물을 가져올 뿐 아니라 분향도 했고, 월삭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약자를 착취했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어찌 참 믿음일 수 있었겠으며, 그 제사를 어떻게 참 제사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참 믿음, 참 예배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이 같은 것이 참된 믿음이고, 진정한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답게 악에서 떠나야 하고, 예배하는 사람답게 손에 피를 묻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배하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엘런 케이(J. Alan Kay)는 예배를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과 행동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했고,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그리스도교 예배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 앎에 응답함으로써 살아가는 신중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지하고(앎), 만나고,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히 11:1-3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70년경에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때 그들은 비(非) 그리스도인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 모두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자기 땅을 버리고 떠나도록 강요를 당했습니다. 낙심한 그들은, 혹시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실수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믿음이 위축되었습니다. 믿음이 위축된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갈 바를 모르면서도 떠날 수 있었고, 낯선 땅에 천막을 치고 나그네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히 11:8-10). 그가 이 말씀을 전해주는 이유는 동시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같이'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구약성경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은 '현재'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영광스러운 '과거'와 하나님이 창조하실 영광스러운 '미래' 사이에 고통스럽게 끼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스러운 '현재'에 발을 디딘 채,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위대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위대한 '미래'를 내다봅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사야 시대에는 '남은 자'들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롬 9:27-29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합니다. 구약시대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아직 돌이키지 못한 사람들이 회개할 때까지 촉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격자로서 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킨 사람들이고,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한 형제와 이웃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역사는 물론이요, 교회사 역시 인간의 누적된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 한가운데 세워진 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오염과 부패의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하고, 교회 외적으로는 '빛의 삶'으로 거룩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누가복음의 수신자들 역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늦어지고,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될 때, 그들은 그만 낙담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서 들려줍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 눅 12:32-33a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당하신 배척과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것이었고, 세상 모든 삶의 단편들이 예수님의 삶 안에 하나로 모아져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믿음과 삶과 죽음은 우리가 따라 살아내야 할 내 삶의 심장박동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믿고, 예수님처럼 예배하며, 예수님처럼 살면 내 믿음의 심장은 박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되고, 우리의 예배도 참된 예배가 됩니다. 그렇게 참된 믿음으로, 참된 예배를 하고, 그 믿음과 예배가 내 삶을 바꾸어 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그 나라를 향해 돌아서라'는 말씀이고, 동시에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 있어 '기억'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첫째는 '기억(기념)'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Ϛ)'가 의미하듯이, 과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예배에 참여함으로 재현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히브리들의 유월절 해방이 공동체적 기억이었듯이, 예수님 희생으로 구원받은 기억도 공동체적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들이 유월절이라는 공동의 경험, 공동의 기억을 유월절 식탁을 통해 재현하고, 자녀들에게 전수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을 통한 구원이라는 공동의 경험과 공동의 기억을 성찬 식탁에서 재현하고 전수합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찢기신 예수의 살과 우리를 살리시려고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 존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혈관 안에 흘러내려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나를 나 되게 하는 현실임을 기억하며, 주님의 살과 피가 흐르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예배요 참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걸을 길은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신 공동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믿고, 예수님처럼 예배하며,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믿음의 심장은 건강하게 박동하고, 지금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배에 실패함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도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② 참 믿음으로 참된 예배를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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