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8주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호 11:1-11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 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 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 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 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응송 | 시 107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서신 | 골 3:1-1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 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 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 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 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 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복음 | 눅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 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 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골 3:1, 2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존 재로서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눅 12:13을 묵상하십시오. 재산 분배 문제로 주님을 찾아온 청년의 마음에서 주님이 보신 것은 무엇입니까?
③ 호 11:1, 2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냈거늘, 이스라엘의 태도는 정작 어떠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
1953년에 발표된 장 지오노(Jean Giono)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은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나'의 약 40년 전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여행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됩니다. 알프스 산맥이 뻗어 내린 고원지대인 프로방스 기슭에는 너덧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견디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밀쳐내며 이기심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숯을 파는 것을 두고, 교회의 앉는 자리를 놓고서도 경쟁했으며,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마을엔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졌고, 정신병마저 사람들을 흔들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어내는 바람에 그곳은 폐허로 변하고 결국 사람들도, 새와 동물들도 그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서,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양치기 노인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납니다. 쉰다섯 살인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후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3년 전부터 이 폐허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습니다. 먼저 그는 도토리 10만 개를 심었습니다. 그 10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습니다. 그는 들쥐나 산토끼들이 나무를 갉아먹어서 2만 그루 가운데 절반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1만 그루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 속에서 그는 쇠막대기로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고 덮었으며,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 재배법을 연구하고, 어린묘목을 길렀습니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화자는 5년 동안 전쟁터에서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5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화자가 프로방스에 다시 들렀을 때도 그는 변함없이 나무를 심고 있었고, 어느덧 떡갈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39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도 그가 일구어낸 숲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화자가 다시 그를 찾아간 1945년 6월, 엘제아르 부피에는 어느덧 여든일곱 노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나라를 온통 황폐하게 만들었음에도 프로방스 지방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습니다. 옛날의 메마르고 거친 바람대신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물 흐르는 소리도 힘차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은 부활의 상징으로 다가왔고, 채소밭에는 양배추와 장미 등 채소와 꽃들이 어울려 그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너 명만 살던 마을에는 사람들이 스물여덟 명으로 늘어났다가, 다시 1만 명이 모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토록 생명이 넘치는 마을이 된 풍경을 장 지오노는 '무덤 밖에 나와 있는 나사로' 로 묘사했습니다. 폐허가 되어 사람들이 살 수 없던 마을이 생명 넘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마을이 되었으니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무를 심은 사람' 편집자에 따르면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성자(聖者)나 영웅들은 장 지오노의 다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침묵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숭배하지 않으며,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 고독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하나님 음성을 듣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런 현자(賢者)들을 통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장 지오노는 주로 그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아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20여 년 동안 다듬어 완성한 작품이고 보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인물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야 할 환경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천차만별의 환경에서 그리스도인과 비(非) 그리스도인이 뒤섞여 살아가는데,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환경 속에서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쇄신해서(롬 12:2a)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 살아가는(롬 12:2b)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 관습에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사람 말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배경이 되는 골로새라는 도시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내륙의 루코스 강 계곡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현재는 튀르키예(Tűrkiye)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곳이고, 고대에는 부르기아(phrygia) 왕국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시대와 헬라 제국시대에는 '부르기아의 대도시'라 불릴 만큼, 이 골로새는 인구가 밀집되고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아와 함께 풍요를 누리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시대에는 에베소 지방과 유프라테스를 잇던 교역로가 변경되면서 골로새는 일개 시장도시로 전락되어 갔고 사람들은 골로새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혹자는 당시 골로새교회를 일컬어 '바울의 편지를 받은 교회 중 가장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실제 골로새교회의 설립에 관한 기록은 심지어 사도행전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도중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행 19:1-10), 골로새 지방이 복음화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로새교회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관련한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의 흐름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골로새서가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쇠퇴해져만 가던 골로새 지방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영지주의를 위시한 이단사상들이 발호하면서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이 크게 흔들릴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해 편지를 쓴 것이 바로 오늘 서신서의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골 3:1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시작하는데 있어 앞장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 했던 사실들, 즉 골로새교인들이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한(골 2:12, 20) 복음을 전제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 따르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존재로서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과 관련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두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엣 것'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찾으라'는 단어입니다. '위엣 것'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미 1:5, 16, 20절 등에서 '하늘'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하늘'은 단순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상태, 즉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할 궁극적인 곳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라고 읽어도 적절합니다. 그리고 '찾는다'는 말은 단순한 '지향'이 아니라 온 존재를 기울여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위의 것을 찾으라" 이 말씀의 본뜻은 주님께서 추구하셨던 그것을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추구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골 3:2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 골 3:3
여기에서 "너희가 죽었고"라는 바울의 선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순간부터 '땅의 것' 즉 '옛 질서'에 대해 죽은 존재입니다. 그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고(롬 6:6, 11), 율법에 대한 죽음이며(롬 7:4), 세상에 대한 죽음(갈 6:14)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깊이 숨겨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인데, 그 순간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골 3:4
주님이 이 역사 속으로 다시 오시는 때가 있습니다. 역사는 모름지기 그 '때'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를 염두(念頭)에 두고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땅의 것'에 대해 죽고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그 때에,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골 3:5
음란과 부정, 색욕과 사악한 욕망, 그리고 탐심 이것은 모두 우리 생각 속에 피어나는 죄들인데, 에바그리오스 폰티쿠스는 이런 죄악 된 생각들을 '발생학적 생각(γενικώτατο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발생학적 생각이란 스토아학파가 욕정을 분류할 때 사용한 형용사로, '가장 일반적인 죄악 된 생각들이 다른 생각들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에바그리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다. 바로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는 우리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그래서 바울은 악한 생각들이 우리 영혼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골 3:7)고 당부합니다. 악한 생각들이 제어되지 않고 내 영혼 안에 머무를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악행들은 듣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골 3:8b, 9
악한 생각은 분함과 노여움으로 시작해서 악의와 비방이라는 악행으로 결말짓습니다. 물론 분(忿) 가운데는 거룩한 분노도 있지만, 대부분 분노는 내 영혼 안에 머무르고 있던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이 충족되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분노는 대개 내 욕심을 충족시키는데 걸림이 되는 이웃이나 경쟁상대를 향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악의와 비방으로 발전하고 마침내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들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오늘 복음서에 그 한 예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을 수 있게 형을 설득해달라고 청탁합니다(눅 12:13). 그런데 청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 눅 12:14, 15
주님은 그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에게 분배는 표면적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속마음을 채운 탐심을 지목하십니다. 탐심은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자기 영혼 안에 머무른 탐심을 방치하니, 그 영혼은 순식간에 미쳐 날뛰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알았기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삶은 땅의 것에 대한 탐심을 죽일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대해 죽은 사람만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또 9절에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죽이라', '벗어버리라' 이런 말씀들은 일시적인 행동이나 결단이 아닌 지속적인 결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계속해서 죽고, 계속해서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삶은 지속적인 '옛 사람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속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린 사람만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명령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벗었으면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절에서 바울은 "입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골 3:10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그의 지식이 온통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까지 새로워져야 합니다. 기독교 인간관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形狀)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존재의 속성으로서의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 11:45).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우리인 만큼, 우리 존재의 속성 또한 거룩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속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 호 11:1-3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 호 11:7, 8
아직 이스라엘이 철이 없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타게 부르셔도 누구도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이스라엘을 높여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점점 황폐해갔습니다. 그러한 비극이 우리에게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환경은 모두 다르지만, 마땅히 살아내야 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존재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은 '위의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추구하셨던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곳은 탐심이 아닌 사랑으로 일구는 나라입니다. 탐심은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온 존재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고 힘써 생명을 심어가는 그리스도인, 내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참된 인간상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땅에 속한 자로 '땅의 것'에 관심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시선과 존재의 중심을 '위엣 것'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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